
등대인근에 자갈과 모래 해변이 있어 풍경이 우수하고 아름다워 가족단위 해수욕과 낚시객이 늘어나고 있고 특히 등대에서는 도초도와 비금도는 물론 맑은 날에는 흑산도를 살필수 있는 장소로서 관광객에게 사진촬영장소로 곽광 받고 있음.

2008. 6. 18. 팔금면 읍리 탑목개 중앙에 제주시장 및 제주시 관계직원과 함께 제주도 돌하르방을 세웠음. 팔금면에 돌하르방이 세워지게 된 것은 팔금면과 제주시가 역사·문화적으로 오랜 교류관계나 유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그 배경은 지난 4. 25일 신안군 팔금면과 제주시 추자면이 전국 최초로 섬과섬 자매결연을 맺은 것이 원인이 되었음

팔금면 대심 출신으로 대산두 부락 강희일 씨와 결혼하였다. 위로는 어른을 정성껏 모시고 아래로는 자녀들을 훌륭히 교육시키며 집안을 일으키는 데 큰 일을 하였다. 병약한 분군을 위하여 갖은 약으로 봉양하였으며 끊임없는 기도로 남편의 건강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빌었다. 그러한 보람도 없이 부군이 죽어 가자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니 거짓말 같이 되살아나서 며칠을 더 살다가 운명하였다.
고씨는 남편을 여의고 난 후에도 자녀들을 훌륭히 양육하여 성혼시켰다. 74세 되던 해(1953년) 둘째 사위 김홍술 씨가 큰 잔치를 베풀고 효열비를 세웠다.

고 월촌 최양호 선생은 선친 규형씨의 3남 1녀 중 2남으로 1880년에 원마에서 출생. 팔명학당을 최초로 다닌 분으로 목포전수학원 2년 수요, 81세로 작고하였다. 선생은 1939년 구 2월 25일 나맥 소두 4두씩 밀가루 포대에 넣어 팔금도 기민에게 나누어 주었고 노인 70명에게 주연을 베풀어 경로사상을 고취했다. 1943년 정월 15일 백기도에서 백미 및 나맥 각 50가마니를 역시 기민에게 나누어 주었고, 1944년 7월 20일 팔금국민학교에 석재 교문과 학술용 인체 모형구를 기증했으며, 동교 극빈아동 10명을 선발하여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부담했고 안좌중학교에 통학하는 팔금학생 27명에게 졸업 때까지 3년간 학비를 보조한 공로가 있어 장성에 사는 강재식은 그 공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최 선생 송덕비 비용을 전담한 미거를 보였다.
고 당곡 강복동 선생은 선친 성유씨의 5남 중 3남으로 1891년에 원마에서 출생, 서당에서 한문을 이수하고 75세로 작고하셨다. 선생은 아들 4형제가 일본에 거류한 인연으로 1964년 세계 제18회 동경올림픽대회 관람차 도일하여 1개월간을 체류한 바 있다. 장남은 귀국 하였는데 장남 차남과 재일 거류 세 분 자제와 더불어 자선사업에 뜻을 품어오신 보람으로 팔금중학교 설립 추진시 팔금도민으로서는 실현불가능한 부지4,600평 매입 대금을 자제분들이 서둘러, 당시 재일교포 안좌후원회장인 5남 희신으로 하여금 1971년 5월 15일 70만원(당시 거금이었음)을 희사케 한 것은 장남 주선의 공도 컸지만 이는 오로지 선친인 선생의 유지에 의한 지배적인 결정의 공로가 인정됐었다.
고 죽파 김성진 선생은 선친 문삼씨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1892년 진고리에서 출생, 대심리로 이사온 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후 팔명학당을 월촌선생과 동문으로 수학하다가 3년 중퇴하고 가세가 곤궁하여 20세 때 목포로 나가 개인회사를 전전 고생 끝에 무안군 선작계 주사를 거친 후 남일운수주식회사 전무 20년을 하면서 목포부 협의회 의원, 전남 도협의회 의원을 했고 목포상업학교 상무 4년, 목포 문태중학교 창설에 5년간 공헌 상무 5년, 목포 문태중고등학교 이사로 24년 퇴임하셨다. 남일운수회사 전무 재직시, 목포에 나온 팔금 살마 중에 어려운 일을 당했을때 찾아가 부탁만 하면 해결해 주어서 큰 혜택을 입었다고 한 칭송이 자자했다. 1940년 7월 5일, 팔금국민학교 사택 1동 기증, 1948년 1월 10일 동교에 논 10필지 5,321평 기증, 1948년 1월 20일 안좌중학교(중학교 전신)설립시 논 40두락(약 8,000평)을 기증한 공로가 인증됐었다.
이상은 송덕비 제막식 때 보고된 공적 사항에 의거한 것임.

월촌 선생의 조모가 되는 분이시다. 김씨는 품성이 어질고 덕성스러웠으며 윗분을 잘 모시고 아랫 사람에게는 지극히 장상한 분이셨다. 남편이 23세 때 병이 나자 정성스럽게 간호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어 소생케 하였으며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쓸 정도로 그 이상 더 할 수 없는 정성으로 치료를 하였다.
어느 날 남편이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구할 방법이 없는 김씨는 신령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꿩 한 마리가 날아와서 잡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다 죽어가던 사람이 3일을 더 살았다. 그러나 결국 남편은 운명하고 말았으니 그 비통함을 어찌 하였으랴.
그때 김씨의 나이 23세, 입관하고 난 그 날 저녁 이상하게도 촛불이 꺼지면서 하늘에서 서기가 관 주위에 비춰 모든 사람들이 매우 놀랐는데 이는 김씨의 남편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하늘이 내려준 열녀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후 김씨는 자식(유복자)을 훌륭히 양육하고 교육시켰으며 조상들을 정성스러이 받을었고 부지런히 일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이후 최씨 가문은 크게 번창하였다. 김씨는 천수 99세까지 장수하다가 서거하였다.
지방민들은 김씨를 무안 향교로 추천하였고 호남 향고와 성균관까지 상신되었던 바 열녀로서의 교지가 내려졌다. 후손들은 1934에 현 위치(원마)에 열녀각을 세우고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우리 고장 팔금향에 대효가 있었으니 공을 두고 이름함이다. 공의 성은 원주이씨요, 이름은 은석이며 호는 애송으로 조선말엽 고종 무자년에 팔금에서 태어났다.
강릉도호부사인 휘 영화의 13대 후손이며 통정대부 휘 옹두의 아들이다. 공은 천질이 탁이하여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알아 숙수와 감지의 공봉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나이 17세에 부친상을 당함에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고 슬퍼하기를 예도에 지나쳐 풍우와 한서를 가리지 않고 시묘의 예를 다하니 이것은 그 가풍을 이어받고 선성의 가르침을 전수하여 상봉하솔의 도를 실천궁행한 소이이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것이 한스러워 그 어머니를 봉양함에 극진히 아니한 바 없으며 신미년초 여름에 어머니가 홀연히 병으로 앓아 눞게 되자 공은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다려 시탕의 절도가 지극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기도하기를 자신으로 병을 앓게 해 달라 하였다. 병환이 더욱 침중하여 백약이 무효로 운명의 지경에 이르러서는 호곡으로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간절하고 측은함에 하늘도 같이 감동되었던가 어머니가 홀연히 다시 갱생하니 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지정을 나누기를 3주야를 이었다가 온갖 약제의 시탕도 아랑곳없이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 망극함이 하늘에 철하였으니 이 어찌 대효가 아니고서야 감천동지의 지정을 발할 수 있겠는가? 마을 앞 안산 손좌원에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육물을 금하였으며 묘소에 배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식하여 예찬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서 봄 기운이 다행히 그늘진 언덕에까지 미쳐 공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향당에서 무안 향교와 전북 무성 서원의 천을 거쳐 경성모성공 회장 참판 이병관의 찬양문을 받았다.
사자향연이가 질 복연, 외손 박성철, 김영민의 협찬을 얻어 이 돌을 세우다.

원산에서 읍리 가는 대로에서 소산두로 들어가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전하는 바로는 이 돌비는 어떤 도사가 세웠다고 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고향에 살면서도 궁금했 던 내용이 많았네요 왠 지 가슴이 뿌듯합니다~~
아직도 못 가 본 곳도 있네요.~
이녘동네 내력을 여그서 공부허네요


그란디 맨밑의 사진은 암찌께도 이목에서 땅꾸지가는 잔둥 허리쯤인것 같은디...저 뒤에 나무가 풀잎님이 댓병쇠주 거시키 허셨다던 그 팽나무 아니라요




맞는 것 같아요.~ ㅎㅎㅎ
이돌보담 약간꼬부라진돌이 더 역사가깊을텐디.왼쪽으로자빠지면 왼쪽이 오른쪽으로자빠지면 오른쪽이 망한다나어쩐다나..
해서 심한ㄴ들이 마니자빠뜨렸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