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91
(평설 인물삼국지 )
9. 사마소
인물평: 진나라의 기초를 세운 마키아벨리스트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소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면서도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황제 조모를 시해한 흉험한 인물이며, 나라를 찬역한 역적이다. 게다가 사람이 음험해 종회와 등애를 시켜 서촉을 정벌하면서도 그들을 의심해 일이 성공한 후에는 이들을 모두 반역죄로 몰아 처단한다. 또 진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진공의 지위와 구석의 특전을 수도 없이 하사받고 끝없이 사양하고 반납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마치 사심이 없는 듯 교활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사마소는 간교한 찬탈자라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정의는 승자의 것이라는 식의 춘추공양학파적 견해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최근 중국의 일부 논객들은 사마소는 조씨의 위나라를 충심을 보좌했고 어질게 나라를 다스린 유능한 통치자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마소가 충신으로 위나라를 찬탈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근거로서 진공의 지위와 구석의 특전을 여섯 번이나 사양했고, 그 중에 한 번은 무려 세 번씩 세 번 도합 아홉 번이나 사양의 의사를 표했다는 것이다. 사마소에게 역적질을 할 의도가 있었다면 이렇게 했겠느냐는 것이다.
또 이들은 사마소는 위나라 황제 조모를 죽인 일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철딱서니 없는 조모가 분별없이 병력을 이끌고 사마소를 잡아 죽이겠다고 쳐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그가 봉변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병사를 동원해 막게 한 그의 측근 가충에게 물어야지 사마소에게는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등애가 죽은 일은 그가 분수를 모르고 설친 점이 있는데다 종회가 모함을 했기 때문이고, 종회를 죽인 일은 그가 분명히 모반을 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한다. 반면에 사마소는 10년에 걸친 집권기간 동안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내치에만 주력했으므로 백성들이 안심하고 평온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가 진공의 작위와 구석의 특전을 여섯 번이나 사양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찬역의 뜻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면 그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진공에 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거듭 사양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조야의 여론을 의식한 행위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촉한을 멸해 천하에 위명이 높아져 아무도 감히 반대할 수 없게 된 이후에는 진공의 자리를 바로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진왕이 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를 보면 그는 처음부터 진공이나 진왕이 되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던 것이고 다만 여론의 향배를 보기 위해 끊임없이 간을 보았다고 보아야 한다. 또 사마소가 황제를 위협해 권력을 세습하고, 황제를 시해한 일을 어찌 그의 가신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암묵적 허락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끝내 황제의 지위를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찬역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말년에 석포에게 주문왕이 되고자 한다는 뜻을 피력했고 그가 죽자 마자 바로 그해에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를 대신한 것을 보면 그가 당대에 찬위하지 않은 것은 단지 후세 사람들로부터 찬탈자라는 비난 받을 것을 모면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그가 교활한 찬역자가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사마소는 매우 유능하고 신중한 인물이었던 것을 틀림없다. 훌륭한 통치자이자 위정자였던 것이다. 사마소는 문무에서 훌륭한 능력과 업적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방관이 되었을 때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일을 금했으며 농사지을 때 노동력을 징발하는 일을 금했으므로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제갈탄의 난이나 강유의 침입을 요리한 것을 보면 그가 탁월한 군략가였음을 알 수 있다. 집권 후 그의 통치기간 10년 동안 위나라는 큰 전란에 휘말리지 않았고, 통치는 관대하고 효과적이어서 백성들은 그야말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중원의 경제가 되살아나고 인구가 회복되었다. 중원의 국력이 회복되자 사마소는 일거에 힘을 쏟아 오랜 골치덩어리였던 촉한을 단번에 멸했으니 그가 얼마나 유능한 전략가였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그의 부형과 달리 잔혹하지 않고 관대한 성품이었다. 제갈탄의 난이 끝나고 항복한 오나라의 군사들을 땅속에 묻어 죽이자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륙으로 이주해 살게 해준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마소가 충의와 인덕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간교한 역적이라고만 폄하할 수는 없다. 그는 위정자로서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 사마소는 형식적으로나마 조위에 충성했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며 관대하게 아량을 베풀었다. 중원의 인심이 다 사마씨에게 쏠렸기 때문에 그의 아들 사마염의 대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위나라를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사자와 같은 무자비함과 여우와 같은 간교함을 지닌 마키아벨리즘에 정통한 매우 유능한 통치자였다
일화: 사마소와 사마사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는 모두 유능했기에 한 나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품은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사마사는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나 잔혹했고, 사마소는 소심하고 신중했으나 관대했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쿠데타 바로 전날 모든 모의를 마치고 나서 사마의는 두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몰래 살펴본 적이 있었다. 사마사는 실패하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대사를 앞에 두고도 태평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사마소는 걱정스러워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서성거렸다고 한다.
고평릉의 난을 성공시켜 사마씨 정권의 기틀을 닦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마사의 공이였다. 병력동원의 책임을 사마사가 맡았는데 거사 당일 사마의가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삼천 명의 정병들이 질서정연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모의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이 군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마의조차 놀라 감탄했다고 한다.
“이 아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구나.”
사마사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중호군으로 재직하던 시절 군부 내에 만연했던 금품거래에 의한 인사관행을 뿌리 뽑아 젊은 무장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유능하다고 이름이 높았던 그의 전임자들인 장제나 하후현조차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마사의 일처리 솜씨가 이처럼 과단성이 있었기에 그와는 정적이었던 하안도 늘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고 한다.
“생각컨대 천하의 일을 완성시킬 자는 오로지 사마사일 것이오.”
사마사는 그릇됨이 커서 많은 사람들의 중망을 모았다. 동흥의 싸움에서 위나라 군대가 크게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패전 책임이 있는 여러 장수들을 해임해야 한다는 의론이 크게 일었다. 실권자였던 대장군 사마사가 말했다.
“내가 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오. 이는 나의 잘못이지 여러 장수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사마사는 제갈탄과 관구검의 임지를 서로 교체한 것 이외에는 일체 패전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했다. 같은 해에 옹주자사 진태가 병주에 조칙을 내려 자신과 힘을 합쳐 호족을 토벌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사마사가 이를 허락했다. 병주의 병사들이 고향을 떠나 멀리 전장에 가는 것을 싫어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사마사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사마사는 진태를 대신해 조정 내외의 관리들에게 사과했다.
“이는 나의 잘못이지 진태의 책임이 아니오!”
책임을 져야 했던 많은 사람들은 사마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사마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얻는 일에 탁월했던 셈이다.
반면에 사마사의 과단성은 정적을 숙청하는 데 있어서는 잔혹함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사마씨 집권 이후의 유혈낭자한 숙청과 살육은 대부분 사마사의 몫이었다. 그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반대파를 모조리 처형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권력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의 무자비함은 역쿠데타를 모의한 이풍을 무단으로 체포한 후 고문 끝에 죽인 일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이 때 그는 욕을 했다는 이유로 이풍의 입을 칼로 난도질하기도 했다. 아무튼 진의 건국은 그의 무자비한 숙청과 권력강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의 뒤를 이은 사마소도 진의 건국이 사마사의 공로라는 것을 인정해 늘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이 나라는 사마경왕(사마사)의 나라이다.”
사마소는 심지어 둘째 아들 사마유를 사마사의 양자로 입양시키고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려 했을 정도였다.
사마사의 권력욕은 그의 강한 질투심에서 기인된 바가 컸다. 사마사는 젊은 시절부터 하후현, 하안 등과 더불어 최고의 인재라는 평판이 있었다. 이풍의 난에 연루되어 하후현이 체포되자 평소 그와 친분이 있었던 사마소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사마사가 딱 잘라 거절했다.
“경은 조사공(趙司空) 장례식 때의 일을 벌써 잊었는가?”
10여년 전 사공 조엄이 사망했을 때 사마사 형제가 조문을 하러 갔다. 뒤늦게 하후현이 도착했는데 사마사 형제가 왔을 때는 꼼짝도 않고 있던 백여 명의 조문객들이 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고 한다. 사마사는 하후현이 중망을 얻고 있는 것을 몹시 질투했다. 사마사는 결코 이를 잊지 않았다.
거짓말
삼국지연의를 보면 사마의 삼부자가 제갈량의 계교에 빠져 상방곡에서 불에 타 죽을 뻔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소 역시 강유에게 당해 철롱산에 갇혀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사마사도 양평관에서 제갈량이 발명한 연노에 혼쭐이 났다고 한다.
다 거짓말이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서방에서 촉한의 제갈량이나 강유와 직접 전투를 벌인 일이 없다. 삼국지연의는 사마사와 사마소를 그저 부친 사마의의 후광을 이어받은 무능한 인물로 그리고 있으나 그랬다면 사마씨의 정권이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 육손의 아들들과 비교한다면 사마씨 형제가 가장 유능했다. 육손의 아들 육항은 동오의 덕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허명만 높았지 가장 무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