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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를 만나서 강연 강평
반갑습니다.
오늘 김혜향 교도가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내용이 미리연마를 잘 해서 짜임새 있게 진행이 되어 잘 들으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어떤 생각이 들으셨습니까?
혜향교우는 박윤호 교무가 청년회 교우였을 때, 고대 역사학과를 다녔습니다. 그때 윤호교우를 따라 원불교를 오게 되었고 아주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10여년을 지켜보니 혜향교우가 가진 장점도 많지만 윤호교우가 혜향 교우를 처음 보았을 때 , 저렇게 이기적인 애를 처음본다고 했었습니다 . 그러더니 그렇게 말한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네요.
처음에 와서는 원불교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마음공부와 종교활동에 소홀이 합니다. 하다가 어떤 계기들이 있어서 열심히 하게 됩니다. 삼학을 듣고 <야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이 생각했던 종교와 실제의 종교가 차이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지요. 또 아버지께서 열반하면서 생사의 문제를 생각을 하게 되었겠지요. 제가 전농에 있을 때 연말에 청년들을 시상을 하면 삼분의 일이 무결석이었습니다. 원불교 역사에 기록이 될 만한 일입니다. 그런 청년회가 그동안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 선물로 무결석 자에게 제가 청정주가 새겨진 금장 카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혜향교우가 무결석하게 된 계기가 또 거기에서 나오게 되었지요.
불공중에는 이렇게 자기 불공을 잘 하면 대타불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결석 하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한번 해 보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지 않습니까 ? 본인이 무결석을 해서 본인도 뿌듯하고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을 은연중에 주게 되는 것입니다.
원불교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반 이상은 인연따라 옵니다. 그런데 인연이라고 해도 원불교를 다 다니지 않습니다. 지혜가 동반이 되어야 원불교에 오래 남습니다. 원불교의 대종사가 누구이고, 교법이 얼마나 이치적이고 합리적인지를 알게 되면 수긍을 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저것을 어떻게 나에게 적용을 해 볼 것인가 싶고 임원도 하고 훈련도 나고 하면서 공부가 깊어집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시키니까 하고 책임과 의무로 하고 하다가 나중에 보면 이제 영역이 확대가 됩니다. 부모와 스승과 국가사회가 고맙고 더 나아가 성자가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알게됩니다.
우리 혜향교우가 참 열심히 했습니다. 만덕산 훈련을 한번 다녀오고 고원회 회장을 하게 됩니다. 혜향교우가 지혜가 있거든요, 한번 훈련만으로도 <나라는 존재가 정말 일원상 자리이구나 . 텅 비어서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이런 자리이구나 > 하는 것을 감을 잡은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을 통해 깨친 것이 아니라 이해만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몸으로 실천을 해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책이나 글을 통해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행을 했을 때 이해했던 것을 깨닫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교당 법회 보면서 무결석하고 문화부장도 하고 고원회 회장을 하고 여러 가지를 열심히 합니다. 교당 공연 많이 보셨죠? 그렇게 하기까지 우리 혜향 교우가 전날 밤새워 연습시키고 자기집 데리고 가서 재우고 먹이고 하면서 연습 시킨 겁니다. 공부방도 그렇고 반주도 그렇고 여러 가지를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청년교화를 하면서 특별히 고마운 몇몇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전농의 김현종 교우라고 있었고요, 그 다음에 박순명 교우입니다. 순명교우가 타이핑 한 자료들이 아직도 우리 카페에 남아 있습니다. 전농에 있을 때 순명교우가 동생이 구로병원에서 수술을 했다고 하기에 우리 정토회원하고 같이 구로 병원에 갔었습니다. 윤호 교우가 누워있는데 저를 보기를 <저 사람이 왜 왔을꼬> 하는 눈으로 저를 보았지요.
윤호 교우도 처음에 교화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저항적이고 사회운동도 많이 하고 대모도 많이 하고 하는 친구였습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타고 올라가고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윤호교우가 교화가 되니까 이제 지금의 혜향교우도 교화가 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배성원이라는 한의사하고 이제선 서도안 이현도 진대성 이런 청년들이 아주 잘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김혜향교우가 또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지금 우리 청년들 중에는 일 많다고 내지는 자기가 일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우리 혜향교우의 반도 다 못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무시선을 저절로 터득하고 일과 사람관계 속에서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다 되는 것입니다. 몸으로 하다보면 모든 것이 다 알아서 됩니다. 생각할 것 없이 그대로 되는 것이 바로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련은 이치에 바탕하고 도에 바탕하면서 내가 해 본 일들에 대해서 스승의 문답감정을 받으면서 해 나가야 하는 일들입니다. 스승의 문답감정을 받지 않으면 봉사하고 일 한것에 대해서 자신의 상만 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병이 생기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확실하게 이 법이 좋은 줄 알고 이 법을 터득해 놓으면 나머지 생에서 수행하기가 수월해집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이렇게 열심히 해도 결혼을 하게 되면 강급을 합니다.
제가 결혼을 해서 진급한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인연의 얽힘의 강도가 4배가 증가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이 많고 대소사가 많아서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경우가 잦아집니다. 조석심고 하다가 안하고 아기 남편 시어머니 핑계가 많아집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이 시기에 강급만 안해도 진급을 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혹독하게 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입니다. 이렇게 혹독하게 하지 않으면 결혼 후에 거의 강급하기 때문입니다.
전국의 교당에 제가 청년들을 혹독하게 공부 시킨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혹독하게 시키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경계에 다들 강급합니다. 신심없는 마누라 만나면 사라지고 온갖 핑계를 대며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물며 적당히 법회만 보고 교무님한테 이쁨만 받고 적당히 손님으로 다닌 사람들은 어쩌겠습니까.
강한 타력을 받거나 인연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만나지 않으면 안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보십시오, 그렇게 신심있는 교도들도 잘 안나오지 않습니까? 젊을 때 놓쳐서 그렇습니다. 이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내 안에서 인정하지 못하고 타협하기 때문에 강급하여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나만큼, 제 법력만큼 교화가 될 것이고 여러분 본인 법력만큼 자녀교화가 될 것이고 자기의 역량만큼 회사가 운영이 될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물었습니다. 공자님한테 <내가 정말 훌륭한 왕이 되고 싶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했더니 공자님 왈, 니 자신부터 잘 챙기라 하십니다. 수기(修己)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신(修身)을 먼저 잘해라 이겁니다. 아무리 타력을 통해 왕의 자리에 올라가도 자기 관리 못하면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수많은 경계속에서 버티기 힘듭니다.
실지로 단련하지 않고서는 성장하기 힘듭니다.
고원회 회장을 하면서 혜향교우가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신심없는 청년은 회장하니 교당 못나온다, 회장해서 학교성적 못나온다 이런 사람 많습니다. 사람도 천양지차 천차만별입니다. 일생 살면서 자기 몸하나 돌보며 산 사람도 있고, 그 수십배 수백배 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하루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수십배 수천배 합니다. 그런 사람이 출가위 여래위입니다. 범부들은 자기 책임과 의무에 어떤 일 고작 하나 하고 맙니다.
나주 촌에서 고등학교 나와 고대 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 선허도 옥천 촌에서 고대에 왔지요. 인과보응의 이치를 믿고 깨닫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인과를 알면 원망하던 환경을 극복하고 개척을 합니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하지만 모두 축복이 아닙니다. 고난이 삼세 인과에 의해 공부가 들어갈 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들어가지 않으면 고난은 원망이 대상이고 상처투성이입니다.
이 세상 살아보면 인과를 모르면 불평불만과 원망이 많고 비교심도 많습니다. 이걸봐도 기가죽고 저걸봐도 기가 죽고 이럽니다. 제가 예전에 이야기 했죠? 제가 재수 할 때 , 교보문고에 우연히 갔다가 한 가족이 기사가 댄 좋은 차를 타고 웃으면서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구요. 제가 늘 그리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제가 아침까지 울었습니다. 무슨 눈물일까요? 상대 세계에서의 어리섞은 눈물입니다. 욕심을 채우지 못하여 분한 눈물입니다. 제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걸 보고 그렇게 분했습니다. 누구는 저렇게 살고 나는 이렇게 사냐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함이 얼마나 어리섞은 분함인가....진정한 도인을 보고 진정한 스승을 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하지 못하는가 하는 분함을 내어야지요.
서가모니 부처님 당대에도 어떤 사람이 소를 잃고 당황하여 소를 찾자 부처님께서 그러시지요, 소를 잃은 것은 저렇게 찾으나 자신의 마음을 잃은 것은 찾지 못한다고요.
그러자 이 사람이 그때 깨닫고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 않습니까?
혜향교우는 결혼하기 전에 기도의 맛을 본 사람입니다. 기복적 기도가 아니라 신앙적 기도, 수행적 기도가 같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제가 한번은 혜향교우의 자취방에 간 적이 있습니다. 여동생이랑 둘이 같이 사는데 여동생이 혜향교우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어째 그러한가 했더니 혜향교우가 단원이나 공연 준비하는 교우들을 주려고 음식을 냉장고에 사다 놓으면 동생이 먹으려 할 때 그걸 못먹게 한다는 겁니다. 사실 제가 말은 안했지만 많이 감동했습니다. <야, 저런 마음이구나, 단장이 단원을 챙기고 교우들을 챙기는 마음이 저런 마음이구나> 싶었습니다. 혜향교우가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자기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단원들 챙긴다고 그리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학원 강사하면서 아껴가지고 단원들 주려고 하는 그 마음, 그런게 부처님 마음입니다. 그렇게 연탄같이 뜨거워 본 적이 있는지요.
우리 전성욱교무님 지금 훈련가 계시지요. 아마 훈련 끝나면 오기 싫을 겁니다. 교당에 있으면 법회밥상 차리시느라 바쁘지요? 설교 준비해야지 이것저것 준비해야지 간식 준비해야지 바쁩니다. 그런데 훈련가면 준비한거 받기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 법회 마치면 식사하시고 갈 겁니다. 물론 식당번 하신 분도 있고 반주하신 분도 있고 사회보신 분도 있고 봉사하신 분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앉아서 설교 듣다가 식사 마치고 편히 갑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철저하게 도움을 주는 이유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받는걸 습관들이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준비하여 여러분께 설교를 드리면 집에서 사회에서 풀어 쓰셔야 합니다. 선순환이 되어야 하는데 계속 받아만 가고 좋다좋다만 하면 진급이 없습니다. 받을 때는 좋지만 베풀 때는 더 좋습니다.
베풀고 끝납니까? 순환과 인과의 원리에 의해 반드시 다시 옵니다.
순환을 시켜야 합니다. 은생어해 해생어은 입니다. 불보살들은 이것을 초월합니다. 은생어은 합니다. 누가 나에게 은혜를 주면 그걸 다시 같이 베풀어 버립니다. 복족족 혜족족의 여래위의 경지입니다. 중생은 보통 해생어해 합니다. 보통은 은(恩)과 해(害)가 순환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마음을 챙기지 않으면 해가 순환합니다. 고난을 극복하려면 인과에 대한 신앙과 수행이 있어야 합니다. 진짜 뛰어난 사람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음양의 원리와 인과를 아는 것입니다.
혜향교우가 교당에서 피아노 반주를 합니다. 교회에서는 한번 반주에 5-10만원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혜향교우는 공짜로 봉사합니다. 혜향교우 때문에 우리 임무성님이 반주를 그만 하시게 되었지요.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실력차이가 나서 어쩔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와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이 철이 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화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입니다. 명상으로 자신과 대화가 되기도 하지만 기도를 하다가도 대화가 되고 헌배를 하다가도 대화가 됩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쓰면서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 대화속에 참회가 있기도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참회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심하고 진실감있는 사람은 참회가 항상 주변에 있습니다. 참회는 새 생활을 개척하자는 것입니다. 진실한 눈물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이 없이 참회가 될 수 없습니다.
혜향교우가 미리준비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저는 오덕이나 봉도에서 훈련을 예약할 때 1년 전에 예약을 합니다. 저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구에서 뭐 하려고 했다가 제가 먼저 예약을 해서 못한 일이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 세상을 편하고 효과적이고 여유있고 생산성 있게 사는 방법이 바로 미리준비인 것 같습니다. 여러 분야의 미리준비가 있습니다. 건강, 공부, 경제, 수행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동물들은 이 미리준비를 진짜 잘합니다. 새들은 6개월 후의 태풍도 예견하고 집의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고 합니다. 개미들도 지진이나 화산폭발이 오면 몇 달 전부터 안다고 합니다.
사람은 왜 모를까요?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사람은 욕심에 가려서 지혜가 없어집니다. 지혜가 원래 있는데 욕심에 가려서 안보이는 것입니다. 북유럽에 가면 눈 시력이 5.0이 다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도 고래다 상어다 이렇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원만 구족한 능력이 있었으나 욕심에 가려서 사용하고 이용하지 못합니다.
제가 운동을 갈 때마다 느낍니다. 나이 드신 분 중에 반듯이 걷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다들 힘들게 걷습니다. 중간에 건강한 몸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원기 100년 10월 11일 일반법회 <정산종사 법어 무본편3장>
이제부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좀 다른 설교일겁니다.
오늘은 중(中)에 대해서 설명을 할까 합니다.
중(中)은 가운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中)은 온전함을 말합니다. 온전함을 중(中)이라 합니다. 희(喜)노(怒)애락(哀樂) 미발 자리라 합니다. 일념미생전과 같은 뜻입니다. 저 중(中)이 일원상 자리를 말하는 겁니다.
중(中)은 그 자체가 없으면서 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저 중(中)은 자리이타입니다. 저 중(中)을 인(仁)이라고도 합니다. 저 어짊은 사욕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일원상자리에 합일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중(中)의 이치를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중(中)이 있으면 정말 가장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인자무적이라고 하지요? 어진사람은 적이 없다 라고 해석하는데 이건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어짊이라는 자체는 본래 대적 할 것이 없습니다. 무유공포- 원래 우리의 마음은 무유공포입니다. 공포가 본래 없습니다. 제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도학과 과학 그럽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도학과 과학의 중을 지키고 살아가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대종사님은 그 중에 도학이 더 주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학을 무시하면 안된다 하십니다. 유형과 무형의 세계를 둘 다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중(中)이라는 것은 유형과 무형을 포함합니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 이것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집착하듯이 막 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그 당시에는 잘 하는 것 같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창의적인 직업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죽고 나서 자력이 없습니다. 너무 자유롭게만 해도 아이가 교만해져서 골든 타임을 놓칩니다.
우리나라는 노벨상 수상자가 한 사람 이지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이요. 일본은 23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습니다. 그 중에 20명이 과학자입니다. 일본의 인구는 1억 2000입니다.
2000만명 밖에 없는 유태인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200명이 넘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노벨상 과학분야가 안나올까요? 이것이 저는 중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대학교에서의 자율과 타율의 비조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로부터 교육 기관에 온갖 규제가 들어옵니다. 그러나 대학은 대학 자체의 자율이 또 필요합니다.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갖도록 자율을 주어야지요.
그런데 등록금이며 무엇이며 국가에서 다 규제가 들어옵니다. 지난번에 교수 한분이 저에게 <우리나라는 노벨상이 안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제출해야 하는 실적이 중요하고 그 실적을 보고하기 위한 보고서를 제출하다가 연구를 제대로 못합니다. > 라고 하십니다. 일본은 보고서가 딱 한쪽이면 된다고 합니다. 한국은 보고서가 논문 같다고 합니다. 항상 형식만 갖추어 지고 내용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유미숙 교수님께서 30-40대 훈련에서 강연을 하는데 제가 힌트를 딱 하고 얻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부간의 관계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너무 가까워도 안됩니다. 효자 효부 같지만 너무 가까우면 또 화가 생깁니다. 이제 성인이 되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자녀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이혼이 많아지는 계기도 부모의 간섭이 많아지기 때문인 이유도 있습니다. 두 부부 잘 사는데 거기에 끼어드는 부모님들 때문에 관계가 더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中)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새도 어느 정도 크면 자식의 머리를 부리로 찍어서 멀리 보내려 합니다. 툭 떼어 보내야 하는데 그걸 못합니다. 딸이 싸우면 엄마한테 전화하고 엄마가 다시 사위에게 전화하지요. 싸우더라도 냅두십시오. 그래야 둘이 더 잘살게 되고 나도 그 간섭할 시간에 차라리 내 일 챙기면 됩니다. 뭐하러 더 싸우게 만들고 이혼하게 만듭니까? 냅두세요.
형제간에도 그럽니다. 유교에서는 효제(孝悌)라 하여 형제관계도 중요시 하지요. 수직과 수평관계의 불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공경할 제(悌)자입니다. 수직과 수평을 잘 챙기는 것이 중(中)입니다.
북한과 관계를 할 때도 중(中)으로 해야 합니다. 견제와 베품을 중(中)에 맞게 해야 합니다.
만약 첫째 아들이 전문직 직종이라 다른 형제보다 잘산다고 합시다. 그런데도 가족 행사에 같은 돈을 내는 것은 중(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많이 내는 것도 중(中)이 아닙니다. 자율성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효심이 많고 적음으로 중(中)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 둘째가 와일드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많습니다. 저는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책임은 니가 다 지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자율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율성을 주어야 합니다. 자녀를 부모에게 의존하게 만들면 중(中)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부자들도 자력을 길러준 자녀들이 부를 이어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재산을 탕진합니다.
세월호 사건을 한번 봅시다. 그리고 메르스 사건이 났습니다. 우리가 초반에 어떻게 처신을 했습니까?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에서 지금까지 참 최고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경제적 성장과는 다르게 도덕과 윤리감이 성장하는 속도는 느려져 중(中)이 맞지 않았습니다. 선장이 어떻게 도덕심이 없이 아이들을 두고 나올 수 있으며 의사가 내 병원 하루 문닫으면 10억 손해 본다는 생각에 전국에 질병을 퍼뜨릴 수 있습니까?
영육쌍전법에 의식주와 삼학으로 진리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삼학으로만 구할 수 없고 의식주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도 있어야 하고 삼학공부도 해야 합니다. 삼학으로만 구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상 모든 종교가도 경제가 동반되지 않으면서 발전한 적은 없습니다.
불교가 왜 거기서 성장했느냐 ? 경제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도 경제인들이 다 후원해 주었습니다. 종교 자체로만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중(中)입니다.
교화를 하다보면 해외 교화를 하려고 할 때 국내 교화나 잘하자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중(中)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형편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국내 교화도 해야 하지만 해외 교화도 해야 합니다.
우리 상산 박장식 종사님은 갖은 일들에 나중에는 교정원장까지 하시면서 고생했는데 65세에 대산종사님이 다시 미국으로 보내십니다. 12년간 미국에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1년만에 <아이고 나 말도 안통하고 죽겄어> 하고 오셨을 겁니다.
대종사님의 뜻을 받들어 보니 중(中)이 서서 앞으로 해외교화가 필요함을 아셨고 그래서 하신겁니다. 중(中)의 이치를 하시고 멀리 보실줄 알고 타이밍을 아시는 분입니다. 95세 때까지 법문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중(中)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타이밍을 맞출 줄 압니다. 그리고 초월해버리기까지 합니다. 노쇠했다는 것 마저도 초월합니다. 그게 중(中)입니다.
남북문제를 보세요. 미국이 통일을 바랄까요 중국이 통일을 바랄까요? 지금 남북이 대치하는데 들어가는 돈을 통일에 쓴다면 그 돈으로 충분히 통일을 잘 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걸 모르고 통일 이야기를 하면 종북이라고만 합니다.
내수와 수출을 보세요. 내수와 수출도 중(中)이 맞아야 합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우리보다 과학적으로 앞서갔습니다. 우리는 그 시기에 흥선대원군이 쇄국을 합니다. 중(中)을 못한겁니다.
여러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과 밖이 균형이 맞는 것, 이것이 중(中)입니다.
주종과 순서와 힘과 영향과 환경과 여건에 맞게 하는 것이 원만이고 중(中)입니다.
진공묘유가 원만함이고 이것이 중(中)입니다.
회사가 본사가 있고 현장이 있습니다. 원불교로 치면 중앙 총부가 있고 각 교당이 있는 것처럼 회사도 그렇겠지요. 중(中)이라는 것은 양면을 다 챙기는 것이 중(中)입니다. 본사만 중요하거나 현장만 중요하면 이건 중(中)이 깨진겁니다.
노사문제를 봅시다. 서로 하나된 입장으로 본 것이 중입니다.
강자 약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강자이고 영원히 약자가 아닙니다. 부분적 강약이 있고 파트별 강약이 모두 있습니다. 여기서는 강이면서 저기서는 약일 수 있습니다. 중을 지켜야 합니다.
상과 벌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종교가는 상만 주어야 할 것 같지요? 교무님은 성질내면 안되지요 ? 종교인이니까요? 성질을 한 번도 안내시는 분은 여래위이던가 중(中)을 못지킨 것이던가 둘 중 하나입니다. 중(中)을 잡지 못하면 자기가 믿는 대로만 생각합니다. 항상 웃기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中)은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中)입니다.
생사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중(中)은 생과 사도 생과 사를 넘어서서 생과 사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중(中)입니다.
남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품자리에는 본래 남녀가 없지만 눈뜨면 있습니다. 이게 중(中)자리입니다. 보면 남자는 남자라고 여자는 여자라고 그렇게 아웅다웅합니다.
구타원 이공주님께서 한국의 여성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실 때 대종사님께서 <공주는 여자밖에 보이지 않는가? 세상에 여자밖에 없는가 ? >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중(中)을 제시한 것입니다. 다 사람이고 일체생령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출가 재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재가니까 좌선 안하고 출가라고 목에 힘주고 잘난체 하고 하는 것은 중(中)을 넘어선 겁니다. 중(中)자리에 출재가 구분이 어딨습니까?
내 몸에 상처가 나면 아프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장기에 문제가 생기면 생명이 위태롭지요. 몸도 중자리를 지킵니다.
유교에서의 화(和)는 예(禮)를 실천할 때 화(和)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인(仁)에 바탕합니다. 그런데 인(仁)이 바로 중(中)이지요? 우리의 삼학이 바로 중화(中和)의 도입니다.
저도 이 공부를 해 보니 왜 스승님들이 삼동윤리를 내놓으시고 왜 우리 좌산님은 퇴임을 하셔서도 미국가시고 일본가시고 외국에 가시는 지를 알 듯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좌산님한테 가만히좀 계시지 어딜 그렇게 다니시냐고 하십니다. 좌산님은 어떻게 하면 이 초기 교단에 해외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거점을 확보할까를 고민하시면서 세상에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면서 중(中)을 지키고 계시는데 그렇지 않고 중(中)을 모르는 사람들은 퇴임하시고도 저렇게 돌아다니신다고 뭐라고 하십니다.
제가 회보에 강남교당에서 뭐 하는게 있는데 그걸 좀 도와달라고 냈습니다. 육군사관학교에 건산님께서 이미 대호법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또 24억을 희사하십니다. 그래서 육사에 원불교 법당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국가땅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건물을 지으니까 5억이 넘는 세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5억까지도 건산님께 달라고 못하니 교구장님께서< 우리가 2억이라도 마련하고 나머지를 좀 도와달라고 하자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2억이 어떻게 나옵니까..그래서 1800만원씩 지구에 나누어 분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장님께서 다시 각 교당에 또 분배를 하십니다. 종로는 얼마 송천은 얼마 사직이 얼마 방학이 얼마 이렇게 분배가 되고 우리 교당도 100만원 정도 분배가 되었습니다.
안암교당 입장만 생각하면 우리교당이 무슨 육사까지 책임을 떠안냐 싶지만 중(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시면 압니다. 안암교당만 교화합니까? 교구가 잘되야 하고 원불교가 잘 되어야 교화가 됩니다. 국운이 교화다고 까지 합니다. 우리나라가 잘 되어야 교화가 잘됩니다. 하나가 하나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단에 제일 중요한 일중에 하나인 인재를 길러내야 하는데, 그것을 저기 거제도에서 할 수 있습니까? 서울에서 대학이 제일 많은 곳이 동북권인데 이 동북권에서 하지 않으면 어디서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中)의 이치입니다. 우리 교당 유지도 힘든데 그런 것 까지 하시느냐 하는 마음은 중(中)이 아닙니다.
중의 이치가 일원상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감정을 넘어서서 예를 실천하고 유무를 초월해서 예를 실천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화(和)가 되고 그 화(和)가 심화 인화 기화가 되어서 그것이 바로 출가위의 심법이 됩니다. 어딜가나 이런 사람은 다 화(和) 합니다. 그 안에 예가 있고 감정과 원근친소를 초월한 중(中)자리가 그 안에 딱 있어서 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종사님의 일원상 진리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제가 전체적으로 설명을 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원기 100년 10월 11일 일반법회설법-원불교를 만나서 강평및 정산종사법어무본편3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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