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2 - 평행이론
조선태종과 고려광종
역사에도 평행이론이 있다.
평행이론(Parallel Life)이란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일정한 시차를 두고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역사 평행이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미국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존 F.케네디' 이 두 사람에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두 사람에게 일어난 암살 사건이 100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재연되었다는 점 말고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링컨은 1860년에, 케네디는 1960년에 꼭 100 년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은 1808 년에 남부에서 태어난 민주당 상원의원 출신인 앤드루 존슨대통령에 의해 권력이 승계되었다.
케네디는 그로부터 정확하게 100년뒤인 1908년 남부에서 태어난 민주당 상원의원 출신인 린드 존슨대통령에 의해 권력을 승계받았다.
두 대통령이 암살된 날도 부인을 동반한 금요일이었다.
둘 다 뒷머리의 비슷한 지점에 명중한 탄환에 의해 피살되었다.
링컨은 포드극장에서, 케네디는 포드자동차 회사의 링컨 콘버터블 승용차안에서 피살되었다.
링컨을 살해한 존 월크스 부스는 1839년에 남부에서 태어났다.
케네디를 살해안 리 하비 오드왈드는 100년뒤인 1939년에 남부에서 태어났다.
링컨의 암살범 부스는 링컨을 극장에서 저격하고 창고로 도망가 숨었다가 체포되었다.
케네디 암살범 오스왈드는 창고에서 저격하고 극장으로 도망가 숨어있다가 체포되었다.
암살범 두명은 이름이 15자로 이루어져 있다.
둘 다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두 대통령 이름 철자 수가 같다는 등 비슷한 점이 꽤 많다.
우리나라에도 역사 평행이론에 해당 될만한 두 인물이 있다.
고려광종과 조선태종이다.
고려광종은 949년 왕위에 오르고 조선태종이 1400년에 왕위에 즉위하니 두 사람 사이에는
약 450년 정도의 시간차이가 있다.
이 시간 차이로 봐서는 조선태종이 고려광종을 따라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광종과 태종은 둘 다 나라를 건국한 태조왕건과 태조이성계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둘 다 맏이가 아니어서 정상적으로는 왕이 될 수 없었다.
광종은 이복 형들인 혜종이 2년, 정종이 4년만에 후사없이 죽자 고려 4대왕으로 즉위한다.
태종은 스스로 제1,2차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로 이복동생을 죽이고 자기 친형인 정종을 왕으로 추대했다가 2년만에 스스로 조선 3대왕이 된다.
광종과 태종은 둘 다 강력한 개혁정치로 왕권을 확보하고 막 건국한 고려와 조선의 확실한 기반을 닦아 놓는다.
또 둘 다 왕권안정에 대한 집념이 아주 강렬해 측근들은 물론 골육과 친인척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번 의심이 가면 그들 살육마저도 주저하지 않는 잔인함이 있었다.
광종은 선대왕이자 형제였던 혜종과 정종의 아들인 자기 친조카들을 역모를 씌워 살해했다.
태종은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이 된 후 자기 처남들을 죽이고 아들 세종의 장인도 죽인다.
광종은 왕권강화책 일환으로 호족세력의 제거와 956년에 우리나라 노비해방법인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958년에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우리역사 최초로 과거제도를 시행한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도 제정했다.
이외에도 광종은 많은 치적을 남겼다.
대외정책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려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태종도 왕위에 오르자마자 태종이 재위하는 동안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이었다.
그는 먼저 관제개편을 단행해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가 분장하게 하는 육조직계제를 채택했다.
육조직계제는 육조에서 각각의 담당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다.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대부분의 정사를 직접 처리하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이 그만큼 줄어들고 왕권을 강화시킨다.
이는 건국 초기에 정도전이 펼친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와는 다른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였다.
그러나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는 정도로 만족할 태종이 아니었다.
태종이 빼어 든 보다 강력한 왕권 강화 카드는 사병혁파와 외척세력의 견제였다.
정도전의 요동정벌을 위한 사병혁파에 반발로 쿠데타를 일으킨 태종이방원은 왕이 되고 나서는 그와 정반대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정종 측근들이 이방간 편에 섰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으로 사병을 혁파시키고 모든 병권을 왕 아래두어 왕권을 크게 강화시켰다.
태종은 왕의 외척은 왕이 힘이 없을 때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득세할 경우에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절대왕권을 꿈꾸었던 태종에게 외척득세는 용납할 수 없었다.
1406년(태종 6) 8월,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섰다.
갑작스러운 왕의 선위 발언에 놀란 백관과 종친 들이 펄쩍 뛰며 명을 거두라 아뢰었다. 그러자 태종은 며칠 만에 못 이기는 척 선위하겠다는 명을 철회했다.
그러나 태종의 이 선위 파동으로 화를 입게 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였다.
태종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이들은 내심으로 좋아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을 빌미로 이 두 형제를 귀양보내고 귀양지에서 자진하게 했다.
후에 민씨 형제의 막내인 민무회가 이 문제로 태종에 대해서 불충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형인 민무휼 역시 민무회가 불충의 죄를 지은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 두 사람 역시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좌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정실부인 원경왕후 친정인 민씨 집안을 풍지박살을 만들어 버렸다.
개인 인간사로 보면 자기 성공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조강지처를 내치는 것도 부족해 처갓집 식구를 몰살 시켜버렸으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력의 비정함을 인정한다 해도 지나친 처사였다.
당시 원경왕후의 피를 쏟는 원통함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오래 전 인기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왕으로서 왕권안정을 통한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고육직책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용의 눈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꼭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태종이 아들 세종의 처갓집 장인 심온을 비롯한 청송 심씨 집안을 개박살 내버린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태종 또한 고려광종처럼 대외정책도 눈부시다.
태종은 즉위 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다.
첫 신호탄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의 고명과 인신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태종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조선왕은 당시 대외 외교적으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명나라가 조선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고서도 병권을 놓지않았다.
세종 1년에 일어난 대마도 정벌도 사실은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주도했다.
태종 사후에 실현시킨 세종의 4군6진 개척도 태종의 국방정책 강화가 기반이 되었다.
고려광종은 후반기에 가서는 미친광종으로 표현 될만큼 호족세력 숙청과정이 정도를 넘어섰다.
당시 감옥이 항상 가득차고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태종도 자기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데 큰 공헌을 한 태종의 최측근 이숙번, 이무등을 제거하고 '서얼차대법' '과부재가금지법'등 조선의 최대 악법도 제정한다.
그 둘은 치적뿐만 아니라 악행까지도 닮아있다.
고려광종과 조선태종은 한 나라를 창업한 군주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왕권강화를 통한 한 국가를 안정적 기반을 만들어 놓는데 성공하여 이후 수 백 년을 지속 되는데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를 본다는 것에도 공통점이 있다.
다른 점은 태종사후 세종이 태종이 피로 만들어 논 기반위에 조선을 찬란하게 꽃 피우는데 광종사후 고려경종은 광종개혁을 후퇴시켜 모든 것을 광종 이전으로 돌려 놓는다.
고려광종과 조선태종 또한 역사의 평행이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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