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0:6-10:18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명의 소사사, 즉 돌라와 야일 이후 악을 향해 치닫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을 확인합니다. 사사기의 흐름은 범죄, 타락, 심판, 징계, 회개, 구원의 순환을 반복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악순환은 단지 사사기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면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보이는 현상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심판으로 시작된 악의 하강 나선은 노아, 바벨탑을 거쳐 모세에 이르기까지 더욱 가속화됩니다. 그리고 사사시대, 왕정시대를 지나 결국 세상의 다윗 왕국은 결국 멸망합니다. 이 하강 나선은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역전되기는 하지만, 구약은 예수님 없는 인간의 왕국 건설 노력이 부질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행악과 곤고(6-10)
(6-7)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알, 아스다롯, 아람의 신, 시돈의 신, 모압의 신, 암몬 자손의 신, 블레셋 사람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땅의 우상만 섬긴 것이 아니라 주위 모든 나라의 신까지 다 수용한 것입니다. 그 수가 일곱인데, 이는 그들이 가리지 않고 우상을 섬겼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7명의 사사 웃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이 활동했습니다. 이 사사들을 통해 우상들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이스라엘이 숭배한 7가지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7족속의 전적인 타락을 심판하고 제사장 나라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얼마나 아찔한 말씀입니까.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방탕하여 술에 취하고, 생활의 염려에 시달린다면, 또 예수님과 교회의 승리를 담대하게 선포하고 삶으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풍조에 그대로 물들어 그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아무리 많은 이방의 신들을 섬겼어도 그 신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상들은 아무리 많아도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을 섬긴다고 해서 모압의 신이나 암몬 자손의 신을 버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우상을 섬기면 섬길수록 더 좋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다만 하나님 신앙만은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과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게 좋다고 하자며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하자. 왜 꼭 너만 옳다고 하여 갈등을 일으키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불치병을 고치는 한 가지 약이 발명되면, 왜 그 약만 효과가 있다고 하느냐 다른 약도 효과가 있다고 하자고 주장하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라는 궁극적인 문제에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옳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또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비가 필요하면 비의 신을 만족하고, 해가 필요하면 해의 신을 만족하게 하고, 다른 무엇이 필요하면 거기에 해당하는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만족시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우상과도 관계를 맺고 저 우상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반드시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거기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보다 섬기기 어렵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팔았다고 하십니다. 팔았다는 단어는 완전히 넘겨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붙들고 계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그들의 뜻대로 넘겨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블레셋과 암몬의 합동 공격입니다. 블레셋은 유대의 서쪽이고, 암몬 자손은 유대의 동쪽입니다. 즉 그들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신을 그들과 함께 섬겼지만 그것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대신 믿는 모든 우상은 결국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8-9)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요단 강 동편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18년 동안 억압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지혜로운 방법 같지만, 오히려 우리 삶을 망치고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을 벗어나면 오히려 그 구속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 암몬 자손이 요단강 동편에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대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유다와 베냐민 에브라임 족속까지 수탈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 우상을 허용하더라도 그 우상이 우리의 중심까지 침투하여 우리를 곤고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회개와 하나님의 반응(10-16)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그들은 18년이 지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예전에 미디안에게 고난을 당할 때에는 7년 만에 부르짖었지만, 그 기간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더욱 강퍅해졌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괴로움을 당해야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맞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우리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곳이 없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11-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애굽, 아모리, 암몬, 블레셋, 시돈, 아말렉, 마온 사람이 압제할 때에 부르짖으므로 구원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부터 지금까지 구원해 주셨던 일들을 상기시키는데, 역시 일곱 수를 말씀하심으로 그들에게 온전하고 충분한 구원을 베풀어주셨음을 알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에 계속해서 응답하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그러한 구원의 역사를 쉽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고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6절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우상을 택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구원을 구하라는 표현은 반어적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의지하는 우상들에게 구원을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우상은 구원의 능력이 없음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난 당할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잘되고 형통할 때는 이 세상의 것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다가 그것이 배신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필요할 때만 하나님께 도움만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도구화 삼는 일이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15-16)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그나마 바른 자세를 보입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해달라고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건져내달라고 구하며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다소 이기적이고 잘못된 그들의 신앙이 보입니다. 즉 오늘 우리를 건져내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바라는 내용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의 위기에서만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십니다. 못된 자녀이자 엇나간 자녀이지만 그 자녀의 고통에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며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자녀가 있는데 두 살때에 넘어지면서 앞니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아파서 잠시 울고 말았지만, 저는 그 모습을 보면 앞으로 사진 찍을 때마다 저렇게 뭔가 부족한 아이처럼 나올 텐데 어쩌나, 그리고 혹시라도 치아에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를 자녀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녀를 더 전인적으로 알기에,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참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생활의 모든 염려를 떨쳐 버리고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했던 것은 바로 죄에 대한 개념이었습니다. 시편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시 51:3-4)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주께만 범죄한다는 말이 참 와닿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우리야인데 어찌 주께만 범죄하였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을 그 사람과 피조물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범죄한 것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됩니다. 마치 내 자녀에게 누가 해를 끼치면 자녀보다 부모가 더 분노하고 대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고, 하나님께 하듯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대응이 나옵니다.
암몬 자손과의 대결(17-18)
(17-18)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쳤을 때 이스라엘도 미스바에 진을 칩니다. 다만 아쉽게도 하나님께 먼저 구하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하는데 누가 먼저 나가서 싸움을 할 것이냐 그가 머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발상입니다. 그들이 18년 동안 하나님을 주인 삼아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 하강 나선을 따라 내려왔기에 이제는 하나님을 모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어리석은 모습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당면한 문제가 있다면 누가 먼저 나가서 어떻게 싸움을 시작할지 궁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모습을 살펴 봤습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곧 우리의 연약함임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사정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며, 마음에 근심하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패역함이 우리의 패역함임을 봅니다. 우상을 마음껏 섬기다가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만 붙어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 자손의 우상 숭배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따랐던 영역은 없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2. 문제가 있을 때만 하나님을 구한 기억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할 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3.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 또는 허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4.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해 보 십시오.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