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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에게 보내는 11신
오늘의 훈련은 내일의 건강과 성공을 위한 기초라는 마음으로 임하기를 바란다. 아버지와 엄마는
토요일(6월 16일) 아침 9시40분에 포항여객선 터미날을 출발한 [썬플라워호]에 승선(乘船)하여 우리나라에서 여덟번째로 큰 섬이며 동해안에서 가장 큰 울릉도(鬱陵島)를 향해 출발(出發)하였다. 약간은 흐린 날씨에 영일만(迎日灣)을 벗어나자 점차 심해지는 파도(물결波물결濤)에 엄마는 배멀미로 鬱陵島 道洞港(도동항)에 도착한 오후 1시15분까지 고생이 많았단다. 그 후유증(뒤後끼칠遺병증세症)으로 배에서 내려 道洞에서의 점심후 숙소(宿所)인 수궁모텔에서 엄마 혼자 쉬게 되었고 오후의 버스관광에는 동행(同行)하지 못하여 많이 아쉬웠단다. 오후의 버스관광은 걸쭉한 관광버스기사의 재미있는 설명을 들으며 도동읍을 출발하여 울릉도에서는 모래해안이 가장 길다는 사동(沙洞)해변을 지나 서면해안(海岸)의 여러 기암괴석(奇巖怪石)을 구경하고 북면의 나리분지(동이盆땅地)까지 갔다왔단다. 울릉도는 울릉읍(邑)과 서면(西面) 북면(北面)으로 이루어진 1읍(邑) 2면(面)의 행정구역으로 현재인구는 1만명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구나. 예로부터 도둑·공해·뱀이 없고, 향나무·바람·미인·물·돌이 많다 하여 3무(無) 5다(多) 섬이라고도 한다. 포항에서 東쪽으로 약 217㎞, 울진군 죽변에서 약 140㎞, 강원도 삼척시에서 137㎞ 떨어진 곳에 있다는구나.
부속섬으로 독도(獨島)·죽도(竹島)·관음도[觀音島] 등이 있는데 시간관계로 독도는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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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8일 월요일 아침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不作切齒부작절치-이를 갈일은 만들지 말라
擊壤詩云(격양시운) 격양시에 이르기를
平生不作皺眉事(평생부작추미사) 평생토록 눈썹을 찡그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世上應無切齒人(세상응무절치인) 세상에서 이를 갈 원수를 없을 것입니다.
大名豈有鐫頑石(대명기유전완석) 고명함을 어찌 돌에 완고히 새길 것인가?
路上行人口勝碑(로상행인구승비)길을걷는 사람들 입이 비석보다 낳을 것이다.
皺찡그릴추,擊칠격,壤흙덩이양,鐫새길전,頑완고할완
-참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 대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다른 재주나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보통 사람들한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인내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인내를 통해서 성공한 사람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포기합니다.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재능이 많은 것만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만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있는 것만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인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도중에 포기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낙심할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게을러질 때도 있습니다. 미국의 사업가 강철 왕 카네기는 "승부를 가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참고 있으면 반드시 기회가 생긴다" 라고 했습니다. 생존 경쟁에서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음과 삶에 인내라는 뿌리가 내리면 성공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성숙과 성공은 인내의 값을 치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귀중한 결실이니까요. 인내를 통해 삶은 성숙해집니다. - 좋은글중에서 - 오늘 마지막 명심보감 한 귀절...
凡事留人精 後來好相見(범사유인정,후래호상견)-무릇범,머물유,
평소에 인정을 베풀면 훗날 좋은 모습으로 봏 수 있다.
라이언에게 보내는 12신
서예작품에 자주 보이는 見賢思齊라는 말이 위와 같은 뜻이다. 견현사제(見賢思齊- 見: 볼 견. 賢: 어질 현. 思: 생각할 사. 齊: 가지런할 제) 어진 이를 보면 같아지기를 생각하라는 뜻이니 자신을 항상 바르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의미다 이 成語는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의 공자(孔子)의 말에서 연유한다. 공자께서 말했다. “좋은 사람(賢)을 보면 어떻게 그와 같아질까를 생각하고, 좋지 않은 사람(不賢)을 보면 자기를 반성한다.”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자왈:견현사제언,견불견현이내자성야) 순자(荀子)의 수신(修身)편에 “선을 보면 마음을 다잡아 반드시 스스로를 보존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마음을 경계하여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한다.”했는데, 바로 이 장(章)의 뜻이다. 결국 끊임없이‘ 德을 진취(進取)시키고 학업을 닦으며’‘여러 차례 자신을 反省해서’부지런히 완전한 善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의 제도나 질서와 직접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백세(百世-世는 30년이니 3000년을 말한다,)의 스승이라는 공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創始者-어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 즉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根源(근원)에 대한 탐구로 孔子는 그 根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文化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人本主義-인간이 모든것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孔子는 논어(論語)에서-화이부동(화이부동)이라고 했다.즉 함께 하되 물들지 말라고 하였다. 오늘이 6월 20일 수요일이니 면회 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구나.건강한 하루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