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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는 민족의 유산인 만큼 불교계에서만 하는 일이라고 보지 말아 달라"는 권영관 불화장. 그에게 불화는 곧 삶이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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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서울에서 고려시대의 불교미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 전시회가 열렸다. 행사장에는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고려시대의 불화 수십 점도 있었다. 주최 측에서 행사의 격을 높이기 위해 일본에서 특별히 대관해 온 것들. 모두들 경이의 눈으로 관심있게 지켜봤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국보급 작품들이 때를 잘못 만나 우리나라에 머물지 못한 채 일본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그런 관객들 가운데는 더 유난히 '눈에 불을 켠 채' 불화들을 뚫어지게 보는 이가 있었다. 작품의 수준도 수준이거니와 수백 년 전의 그림들이 마치 금방 그린 것처럼 깔끔했던 까닭이었다. 보존상태로 본다면 조선시대의 불화들보다 더 좋았다. 소장자가 단순히 관리를 잘했다고 넘기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이리저리 작품들을 살펴보다 마침내 내린 답은 한 가지. 천연채색이었다. 고려 불화의 화려한 색채는 돌가루로 만든 물감으로 그렸던 것. 즉 석채(石彩)였다.
"그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가루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오래간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니까요. 그 후부터 석채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려 불화의 매력에 빠지다
지난해 말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5호 불화장(佛畵匠)으로 지정된 권영관(57) 씨. 기존에 쉽게 구할 수 있던 물감으로 조금은 수월하게(?) 불화를 그리던 그의 작품활동은 이때부터 고행의 길로 들어선다. 천연채색을 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어디에서 그것들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직접 몸을 일으켜 찾으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국을 돌아다녔다. 색깔 있는 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디든 마다않았다. 은은한 초록 기운이 도는 '뇌록색(磊綠色)' 돌을 감포 근처 뇌성산에서 발견한 것은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좋은 돌을 찾기 위한 권 불화장의 행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구해온 돌은 일단 쇠절구통으로 찧어 가루를 낸다. 그리고 원료를 물속에 넣고 휘저어 잡것들을 없애는 '수비(水飛)'작업을 거쳐 미세한 체로 걸러 입자별로 선별을 한다. 그런 다음 실제로 색을 낼 수 있는지 채색을 해 보는데 마음에 드는 색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좋은 재료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 명제를 인정하더라도 남들이 보기에 지나치다고 할 만큼 권 불화장이 천연채색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천연채색으로 불화 하나를 그릴 시간이면 일반채색 불화 7~8개를 그릴 수 있다는데.
"불화는 성화(聖畵)입니다. 법당에 모셔 의식을 올리면 그 자체가 부처님이지요. 그런 그림이 내구성이 없다면 그 의미가 반감되지 않겠습니까. 천연채색으로 불화를 그리는 것은 그래서 타당한 것입니다."
권 불화장의 가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모(佛母·불화를 그리거나 불탑 등을 만드는 사람)' 집안이다.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버지, 세 명의 숙부가 모두 불모다. 아버지 권정두 불모는 당대 최고의 단청장이던 완호 스님에게서 불화 불상 단청 등 불교 미술 전반에 대한 기법을 전수받았다. 세 명의 숙부 역시 큰형님으로부터 불교미술을 배웠다.
이런 집안 분위기인지라 권 불화장이 불모가 된 것은 필연적인 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 길로 빠져들었다. 아버지와 숙부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흉내내는 권 불화장을 보고 부친은 썩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림을 그리면 나중에 빌어먹는다는데"라는 정도의 걱정은 했다.
그가 부산시 무형문화재가 된 데는 뛰어난 실력도 실력이지만 집안 내력도 한몫을 했다. 조선중기 대불모인 유성선사로부터 시작해 주룡화상, 완호스님, 권 불화장의 할아버지인 용성스님으로 이어지는 정통 불모의 계보를 권 불화장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부산시도 그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전승관계가 확실하다는 점'을 적시했다.
권 불화장 집안은 한때 이 계통에서 '공공의 적'(?)이기도 했다. 1970년에 시작된 대한불교조계종의 불교미술대전에서 몇 년을 연이어 권 씨 집안이 수상을 했던 까닭이다. 1회 때는 큰 숙부가, 3, 4회 때는 지금 생존해 있는 막내 숙부 권정환 씨가 대상을 받았고 5회 때는 권 불화장이 대상을 차지했다. 그는 "우리 집안이 대회를 휩쓸다 보니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의 질시도 약간 있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전통은 이어져야 한다
불화를 그리는 일은 힘들다. 대개 대형 작품이라 작업 시간도 오래 걸린다. 지금 그리고 있는 불화만 해도 가로가 6m에 이른다. 지난 27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불교미술포럼전에서는 그가 그린 후불탱화의 크기가 너무 커 작품이 전시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촌극이 빚어질 정도였다.
하루 종일 엎드려 작업을 해야 하는 것도 고통이다. 하루 일을 마치면 온몸이 아프다. 근데 사람의 몸이라는 게 이상한 것이어서 40여 년을 그렇게 하다보니 어떤 때는 엎드린 자세가 더 편안할 때도 있다.
"불화를 고집하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덕으로 이만큼 살았는데 이 시대에도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한 불모가 있었다는 것을 남겨줘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하는 것이니까요."
부친과 숙부들 밑에서 엄격한 도제교육을 받은 권 불화장은 최근 불화계에서 나타나는 장인의식의 실종에 대해 심기가 마뜩찮다. 세상이 편해지다 보니 불모들마저 아주 쉽게 일을 한다고 보는 까닭이다.
예컨대 제대로 된 불화 하나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천 수만 번의 기초연습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 불화 원본을 대고 시왕초(백묘화) 천 장을 그린 뒤 다시 보살초 천 장, 이어 천왕초 천 장을 그려야만 비로소 불화에 손을 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으로 간주된다. 최소 3000장 정도의 습작이 있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요즘에는 이 같은 절차를 생략한 채 밑그림을 사진으로 스캔을 받는 경우도 있다.
국적 없는 불화가 양산되는 것도 권 불화장의 시각에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비록 불화가 인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지만 선조 불모들의 노력으로 우리 불화는 나름대로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이런 점을 무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예술가라면 남의 작품을 모방만 해서는 절대 안되죠. 근본조차 모를 작품을 전통불화랍시고 버젓이 전시회를 여는 것을 보면 분통이 터집니다. 요즘에는 중국 불상이 수입되기도 합니다. 불상이나 불화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문화재가 될 터인데 만약 이런 것들이 나중에 문화재로 인정받는다면 아주 모순이죠. 이런 부분은 언젠가는 정리가 돼야 합니다."
부산 북구에 경암불교미술원이라는 작업장을 갖고 있는 권 불화장은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틈틈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서울의 동방불교대학에서 전통불화를 강의한다. 힘들게 해온 작업이지만 평생 한 것이니만큼 졸업생 가운데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불모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배울 때처럼 아주 엄한 교육을 시킨다면 남아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사실, 그의 미술원으로 불화를 배우러 왔다가 중도에 그만둔 이도 꽤 된다. 권 불화장은 그게 제일 안타깝다.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고, 어느 시점엔가는 자신이 해온 작업을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하나 사람을 찾기 힘든 이유에서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대학생 딸마저 "취미로는 하겠지만 평생 가업으로 하기는 힘들겠다"고 손사래를 칠 정도다. 하지만 권 불화장은 "나이가 더 들면 딸의 맘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며 웃음을 지었다.
"완호스님이나 부친이 그린 백묘화를 아직도 지니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것들도 전시회에 내보였으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불화가 만들어지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문화는 그 민족의 정신 아닙니까. 불화는 조상이 물려준 정신적 유산이기도 하고요. 사회가 이것을 그냥 불교계에서 하는 작업으로만 보지 말아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