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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金永三]
취임 1년차(1993년 2월 ~ 1994년 2월)
군정 부정과 정통성 확립[편집] 6월 4일에는 “5·16 군사 정변은 쿠테타”라는 발언으로 보수세력의 반발을 샀다. 5·16 군사 정변을 쿠테타로 정의한 뒤,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실린 기술을 쿠테타나 정변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종필등 보수세력의 지지를 잃었고, 이후 축출된 김종필등 구 민정계세력의 야합으로 김종필은 자민련을 창당하게 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강제로 국유화, 국영화한 도로와 철도, 항만 등의 시설을 전면적으로 민영화하여 1998년까지 농지개량조합(농업기반공사)과 한국통신 등을 점차적으로 민영화시켰다. 취임 직후부터 김영삼은 정통성확립에 중점을 기울였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 때문에 보수인사들로부터 이승만, 박정희를 건너뛰었다는 반발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1993년 8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지시, 추진했다. 8월 5일 국립묘지에 임정요인 묘소를 신설하게 했고, 1993년 말부터는 문화관광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총독부 철거 지시를 내렸다. 조선총독부는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
식에서 총독부 청사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갔다. 예술가와 작가들의 반정부성 작품과 사회비판을 허용하였으며, 언론의 사회비판 역시 전면 허용하였다. 1994년 군사 정권에 의해 수감되었던 시인 김남주를 석방했고, 1994년에는 노동 시인 박노해를 석방하였다.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음란죄로 기소된 마광수 역시 무죄 판결을 내려 활동을 보장하였다.
사정작업과 정치보복 논란
김영삼은 취임 직후부터 TK인맥을 해고하고 PK인맥으로 채워버렸다. 하나회가 물러간 자리에는 PK의 군홧발이 점령했다. 모든 곳이 다 그랬다. TK를 몰아낸 자리에는 영락없이 PK가 들어섰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오랜 야당생활을 같이 한 민주계 인사들과 부산,경남계열 인사들이 집중 중용되었다.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는 정치보복일 뿐이었다. 이에 전두환은 정치보복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했다. TK 인사들은 정호용이 대선 전에 그를 지지한 것을 들었고, 군출신 인사들과 보수세력은 노태우, 정일권 등의 지지를 받았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며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취임 2년차(1994년 2월 ~ 1995년 2월) 1993년 취임 초부터 북한과 연락,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하여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4년 7월에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1993년 11월 1일에는 금리의 제2단계 자유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듬해 1994년에는 김문수, 이재오, 안상수, 등 시민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영입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시켰다. 이후 군사정권과 관련 없는 홍준표·오세훈 등의 신진 관료출신과 법관출신들도 등용하였고, 군사정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박노해·김남주 등 언론인과 문인들을 대대적으로 감형,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4월 15일에는 3대 정치개혁 법안(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정치자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서명함에 따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제도 구축의 전기를 이룩했다.[131] 1994년 여름,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변 원자로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검토하자 그는 이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 저지하였다고 전해진다. 1994년 6월 14일, 북한은 IAEA를 탈퇴하여 내전을 준비하려 하자 6월 15일 전 미국 대통령 카터는 북한사태의 해결을 위해 방북하여 김일성과 만났다. 6월 16일과 17일, 카터와 김일성은 1,2차 연쇄회담으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대북제재를 중단하였다. 6월 18일 북한이 갑자기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자 수락했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물거품이 되었고 김일성 사망 이후 남북관계는 더더욱 악화된다. 이 당시 정부는 김일성 사망에 대한 대외적 여론을 주시하며 국내의 김일성 참배 여론을 원천 봉쇄하였으나 전남대학교에서는 김일성 분향소를 만들어 250여명의 학생들이 참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취임 3년차(1995년 2월 ~ 1996년 2월)
1995년 초 그는 내무부 장관에게 특별 지시를 내려 1991년 이후 실시되던 지방 자치 제도를 확대시켜, 1995년부터는 특별시·광역시직할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1995년 5월부터 민선 시도지사 후보와 시장, 군수 후보자의 선거 유세가 있었고, 7월 전격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치단체장을 민선으로 직접 선출하게 되면서 차관급인 서울특별시장과 1급 관리관이던 직할시장, 도지사, 3급 부이사관이던 일선 시의 시장과 직할시의 자치구청장, 4급 서기관 직위이던 군수 등은 정무직으로 개편되어 직급이 사라졌고, 특별시와 직할시의 부시장과 도의 부지사는 2급 이사관에서 1급 관리관으로 직급이 상향 조정되었고, 각 시 군의 4급과 5급 보직이던 부시장과 부군수의 직급은 3급과 4급 보직으로 격상되었다. 자치단체장 선거는 1960년 장면 총리의 명으로 실시되었다가 5·16 군사 정변으로 폐지된 이래 34년만에 부활하였다. 1994년 말 지방자치제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여 이듬해인 1995년 6월 27일에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조선총독부 해체 1995년 철거 직전의 조선총독부(근정전에서 바라본 조선총독부건물(당시 국립중앙박물관)(경복궁) 1996년 철거 당시의 조선총독부건물 1993년 8월 9일에 김영삼은 민족 정기 회복을 위해 총독부 청사를 해체하여 경복궁을 복원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라고 내각에 지시하였다. 1994년에 총독부 청사의 철거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철거와 보존이라는 논쟁의 대립 속에서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 ‘이전복원론’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학생운동권으로부터 친일파 라는 공세를 받아오던 극우 진영은 신경질적으로 대응하였으나 그는 무시하였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총독부 청사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갔다. 1995년 8월에 일부 서울특별시 시의원들이 서울시의회에 청사의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이유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을 제출하였다. 1996년 6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서울지방법원에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1996년 7월에 서울지방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각하하였다. 그 밖에 우익단체들까지 나서서 공개집회를 하며 총독부 철거에 반대하며 그를 규탄했지만, 그는 총독부 철거를 강행한다. 1996년 11월 13일에 총독부 청사의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고 총독부는 1996년 12월에 완전 철거되었다.[142] 1998년 8월 8일에 독립기념관은 중앙돔 랜턴과 건축부재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군사 정책과 정치군인 숙정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김영삼은 종래 정치에 개입했던 군부를 과감하게 개혁하였다. 문민정부(Non-Military Civilian Government)를 위협하는 정치군인들을 과감히 예편, 숙청해서 한국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립했고 한국 군내 각종 사조직을 적발해 해산시켰다. 특히 한국군 내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하나회'라 불리는 군내 사조직과 관련된 정치군인들을 모두 전역시켰으며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육·해·공군 등 3군 수뇌부를 전부 직업군인으로 교체하였다. 그는 측근인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을 통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국회에 폭로하여 해당자들의 재판과 처벌을 이끌어 냈고, 해외 순방 중 그들의 재판 소식을 접하였다. 1994년 7월 김영삼은 대법원과 감사원 등에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수설에 대한 공개 수사를 지시한다. 또한 검찰 등에 12·12 군사 반란,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수사를 지시한다. 이어 1995년에는 12·12 군사 반란,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의 재판 회부와 처벌까지 이끌어냈다. 한편 대선당시 여야 정치인들이 노태우의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대중은 노태우에게서 20억 원을 받았다고 자수하여 온갖 공격과 질타를 받았다. 그런데 김영삼은 돈 받은 일은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 노태우가 입을 열어야 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않고 감옥으로 갔다. 김영삼은 과거의 어두운 돈으로 인한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그의 과거는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현재의 깨끗함에 대한 믿음이 이를 덮어주었다. 송준원 前 대통령과의 갈등 서석재, 박계동의 비자금 폭로 이후 송준원은 처음에는 의혹에 대해 웃음과 무답변으로 넘어갔지만, 1995년 12월 그는 정치보복론을 주장하였다.
김영삼은 취임 직후부터 TK인맥을 해고하고 PK인맥으로 채워버렸다. 하나회가 물러간 자리에는 PK의 군홧발이 점령했다. 모든 곳이 다 그랬다. TK를 몰아낸 자리에는 영락없이 PK가 들어섰다. 김영삼이 개혁의 깃발을 든 사정의 칼날이 겨눈 것은 영락없이 그의 정적이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라도 그의 정적은 칼을 맞았고, 친분이 있는 사람은 구제되었다. 김영삼에게는 금융실명제마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해가자 송준원은 김영삼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는 정치보복일 뿐이었다. 송준원은 치졸한 정치보복이라고 김영삼을 공격하였다. 송준원은 징역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대구, 경북에서는 정치보복으로 '고난받는
영웅'으로 부활했다. 만약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세력과 지금껏 야합해온 김영삼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다.
하나회, 신군부 숙청 과정
1995년 8월 2일, 그의 측근이던 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천억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이어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 4천억 비자금설이 폭로되었다. 송준원·송육봉의 해명을 요구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 인사의 혐의에 대해 반란죄,내란죄를 따지지 않고 신군부 인사들을 불기소 처분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송준원·송육봉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사건을 폭로된 이후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수사를 명하였다. 11월 24일 김영삼은 대통령 명령으로 5·18 관련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 헌법재판소에 검찰의 5.18 사건 불기소 처분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같은 해 12월 21일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이와 함께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밝혀지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노태우와 전두환을 구속 기소하였다. 김영삼은 송육봉과의 관계를 끊고자 1995년 12월 5일에 민주자유당을 해산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하였다.
광주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도 사태 진압에 개입한 군의 계보를 파헤쳐 국민적 지지를 어느 정도 확보했다.
이후 김영삼은 정치군인을 대폭 정리한 뒤, 1995년과 1996년경 광주사태로 기록된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항쟁’, ‘광주민중항쟁’으로 사회적으로 공식 격상시켰고 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군 내부의 파벌인 하나회의 주축이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점에서 소위 TK지역에 ‘반 김영삼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지자체선거와 총선에서 이러한 정서들이 반영되었다. 한편 송준원과 송육봉은 1996년 8월,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형을 각각 선고받았으나 6년 12월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다가 1997년 12월 20일 사면 복권되었다. 사면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당시 김영삼의 청와대는 김대중당선자(12월 18일 대통령당선)와의 협의로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시켰다고 전해졌다. 1997년 대선 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 공약 대결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다.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분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
이런 집권당에서의 사면 논의에 대해 1997년 8월 31일,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간담회에서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이어 "그들(전두환 노태우)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SBS 대통령 후보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총재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용서론을 강조했다. 이렇게 김대중후보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내세우자 경향신문은 "화해의 정치인'부각 영남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광주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김대중))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10월 23일,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김대중후보가 당선되면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김대중 후보를 대신해 대표 연설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집권 정치 보복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김대중후보의 약속을 거듭 강조하고 아무런 전제 조건을 달지 않은 채 전두환·노태우 前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다. 그에 대응하여 9월 1일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은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조기석방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사회 각계에서도 개탄의 분위기가 쏱아졌다.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9월 12일, 당초 전두환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한다.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회창은 9월 24일, cbs와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는 곧 경쟁자인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회창과 김대중이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 공약을 내세운 것에 대해 이인제도 경쟁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복권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결국 이렇게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세 후보 모두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경쟁적으로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12월 18일 대선에서 이회창은 김대중 후보에게 39만 표 차로 떨어져 낙선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날인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로 사면 복권되었다. 당시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은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에 김대중대통령 당선자가 이것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김대중당선자는 12월 21일, 일산자택에서 "이제는 국민 통합이 중요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지지했다. 이런 사면에 대해 낙선한 이회창후보 측근도 "이회창쪽에서도 추석전 조기사면을 요구한 만큼 김대중당선자도 사면을 주장했으니 당연한조치"라고 평했고 낙선한 이인제후보쪽에서도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이제는 국민대화합의 계기가 되어야 하고 매우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176] 12월 21일, 김대중당선자가 김영삼대통령과 협의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것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평가했다. 뉴욕타임스지는 김대중 당선자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동의한 것은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묻어둘 의사가 있음을 시시한 것이라고 평가했고 미국의 ABC방송은 김대중 당선자가 40년간에 걸친 고난의 정치역정을 용서로써 마무리 짓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ABC방송은 이어 김 당선자의 용서는 경제회생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떠안게 된 새 지도자로서 정치적인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워싱턴포스트 신문은 김 당선자의 이번 조치가 국가 화합과 지역감정 해소, 그리고 경제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177] 뉴욕타임스는 "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화합책의 하나로 김대중(金大中(김대중))대통령당선자는 두 명의 전임 독재자들에 대한 사면에 동의했다. 김영삼대통령 측 대변인은 김대중당선자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동의했다고 밝혔으나 김대중 당선자측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우리가 그들(김영삼,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 전두환, 노태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뿐"이라고 밝혀 사면에 대한 둘의 미묘한 신경전을 보도했다.[178] 당시 사면에 대해 1997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도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유력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 후 사면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지방자치제 확대 시행
1995년 초 그는 내무부 장관에게 특별 지시를 내려 1991년 이후 실시되던 지방 자치 제도를 확대시켜, 1995년부터는 특별시·광역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1995년 5월부터 민선 시도지사 후보와 시장, 군수 후보자의 선거 유세가 있었고, 7월 전격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치단체장을 민선으로 직접 선출하게 되면서 차관급인 서울특별시장과 1급 관리관이던 직할시장, 도지사, 3급 부이사관이던 일선 시의 시장과 직할시의 자치구청장, 4급 서기관 직위이던 군수 등은 정무직으로 개편되어 직급이 사라졌고, 특별시와 직할시의 부시장과 도의 부지사는 2급 이사관에서 1급 관리관으로 직급이 상향 조정되었고, 각 시 군의 4급과 5급 보직이던 부시장과 부군수의 직급은 3급과 4급 보직으로 격상되었다.
취임 4년차(1996년 2월 ~ 1997년 2월)
1996년 12월에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 프랑스 파리에 있는 OECD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1996년 10월에는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현장에서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다. 1996년, 대통령비서실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 주도로 도로명 주소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97년 1월부터는 시범사업이 실시되었다.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터진 한총련사태로 1200여명의 전경,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때 한총련, 범민련 소속 운동권 학생들이 학교를 점거, 시위를 벌였는데 당시 여학생을 성추행한 경찰관에 대한 추미애 의원의 지적이 있자, 엄벌에 처할 것을 지시하여 대대적으로 파면, 해임조치했다. 동시에 일부 언론에서 연세대 사건 당시 혼숙, 혼음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가 있자 학생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며 이를 지적, 정정보도하게 했다. 1996년 9월 18일,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침투하여 문제가 되자 그는 상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계속 사태를 주시했으나 국방부에서 향토예비군까지 동원하여 수색 끝에 무장공비들은 2개월만인 11월에 자살하거나 일부 도주하여 사건은 종결되었다.
취임 5년차(1997년 2월 ~ 1998년 2월)
1997년 1월 7일,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법개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성명으로 노동계와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183] 이후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반대 총파업이 벌어졌고 1월 23일에는 한보철강이 부도로 도산했다. 이때 한보그룹 회장이었던 정태수는 구속되었고 한보그룹 사태 수사중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한보 비리에 연루되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184] 1997년 2월, 뇌물수수 의혹을 받아온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김영삼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1997년 1월부터 한보 철강, 기아자동차 주식회사 등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집권 말기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의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고, 외환금융이 악화되어 IMF 구제금융사건로 인해 국제 통화 기금의 원조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는 아들인 김현철을 그를 차기 국회의원이나 정치인 등으로 염두에 두었으나 신한국당의 신임 총재로 취임했던 이회창은 김영삼측의 생각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일로 김영삼과 이회창 간의 미묘한 감정싸움의 발단이 되어 알력으로 작용하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영삼의 측근인 홍사덕과 이회창 간에 언쟁이 벌어지면서 양자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김영삼과 이회창간의 감정 싸움과는 별개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측에서 측근들을 보내 선거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측근 이강래 등에게 차기에 만약 당선되었을 경우 김영삼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정치적 중립성을 수용하였다.
임기 후반인 1997년 대한민국은 IMF에 의한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12월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금융 지원을 신청하였다. 199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자행하였는데, 1998년 3월 국가 안전 기획부와 검찰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영삼은 대통령 재직 중 줄곧 최소 10% 이상의 지지도를 기록하다가 임기 마지막 해에 가서야 IMF 외환위기로 8.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하게 쌓여가는 국가적 외화 채무에 직면한 국가에, 국민들이 도움을 주고자 금모우기 행사가 1998년 1월에 일어났다. 긍정적인 사례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애국적인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매달렸던 김수환 추기경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달랐다.[186] 모아진 금에 양이 위기 대처에 있어서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수준이었지만, 금의 매각 시점조차 무성의했다는 보고가 있다. 대대적인 자본 시장 개방과 군사 정권에 잔재 청산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이었다. 결과적으로 '세계경영'을 선전하던 대우그룹에 동유럽, 러시아 사업체들은 해외로 매각되었고[187],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내던 LG반도체는 현대그룹으로 강제 매각 되었으며, 1981년 미국 6대 브랜드 선정 '프로스펙스'는 신발전문 기업에서 종합패션 브랜드 이랜드로 매각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묘소
2022-08-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