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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김제 52코스 제1부
심포항-진봉망해대-전선포-진봉방조제-석소마을-관기마을-몽산마을 입구
20230614
1.그믐달 뜬 김제만경평야
2주만에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심포항에 다시 왔다. 새벽 2시 50분이 안 된 시각 심포항은 고요하다. 여름 새벽의 평화가 어둠 속에 나래를 펴고 있다. 탐방객들이 헤드랜턴 불빛으로 새벽의 평화를 밀어내며 횟집단지 거리 심포6길을 내닫는다. 52코스 출발지에서 400m 거리의 심포항낙조 전망지에 이르렀다. '김제' 한글 조형물 앞에서 만경강 건너 군산 지역과 만경강 하구 새만금방조제를 가늠하지만 먼 데서 불빛이 반짝이고 까만 어둠이 몰려올 뿐이다. 만경강은 어둠의 평화를 즐기지만, 탐방객은 어둠 때문에 만경강 모습을 살피지 못하여 아쉽다. 이 어리석은 짓을 왜 감행하는가? 어둠의 평화를 깨뜨리며 평화로운 풍경을 아무것도 살필 수 없는 이 탐방을 왜 따라가는가. 길손은 이렇게 불평하지만 개인 비용이 너무 들기 때문에 경제적 실용성을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안내 탐방팀을 따라 이 미친 짓을 감행한다. 그럼에도 어둠 속 탐방이 정상적 코스 탐방과는 다른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점도 있다. 그 맛을 내세워 불평을 잠재우며 어둠의 정령이 숨쉬는 진봉산 숲길로 들어섰다.
청미래덩굴 초록잎이 불빛에 반짝여 가까이 다가가 보니 초록 열매들이 맺혀 있다. 청미래덩굴을 전라도에서는 명감나무,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라고 이른다. 경상남도 의령군의 향토식품이 망개떡인데, 멥쌀 반죽을 청미래덩굴 잎에 싸서 찐 떡이다. 망개잎은 떡과 함께 찌기에 노랗게 변한다. 망개잎에서 떡을 떼어내 씹으면 망개잎 향기가 난다. 청미래덩굴 초록 잎에 멥쌀 반죽 송이가 얹혀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망개떡을 상상하며 진봉산을 계속 오르니 왼쪽으로 무덤 3기가 만경강을 향하여 자리하고, 낮은 높이의 진봉산에는 뜻밖에도 줄기 굵은 소나무들이 솟아 있다. 밤의 정령들이 소나무 솔향을 맡으며 잠들어 있는데 탐방객은 이 고요와 평화를 깨뜨리며 전진한다. 나무계단을 올라 진봉산 정상을 내려가면 등성이에 전망대가 솟아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 3층으로 올라갔다.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에서 심포항과 만경강 하구 서해 바다, 새만금방조제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3층 전망대에서 어둠 속 새벽 풍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불빛 반짝이는 곳을 어림만 할 뿐이다. 만경강 건너편 서남쪽 불빛 반짝이는 곳은 군산시 옥서면 하제 포구, 그 북쪽 불빛 반짝이는 곳은 군산시 옥구읍 지역일 것이라 어림한다. 동쪽 하늘에 그믐달이 떠있고, 불빛 반짝이는 곳은 만경읍 일대의 만경평야일 것이다. 남쪽 바로 아래는 진봉면 심포리 명동마을, 그 뒤쪽에 불빛 반짝이는 곳은 광활면 옥포리 일대의 김제평야일 것이다. 밝음 속에서라면 드넓은 김제·만경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텐데, 어둠 속에서 ‘징게맹게 외배미들’(김제만경 너른 들)을 오직 상상으로만 그리며 진봉망해대를 내려왔다.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 추모비' 입구에 이른다. 곽경렬 선생을 처음 들어본다. 곽경렬(1901~1968) 선생은 1910년대 최대의 국내 항일조직인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 요원으로 활동하는 등 항일 독립투사로서, 상해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전송한 사실이 발각되어 2년여의 고문과 3년의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병든 몸으로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그에게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애국지사 남촌 곽경렬 선생 추모비' 아래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면 심포리 명동마을과 두곡서원이 있다. 그래서 공원에는 두곡서원(杜谷書院)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사진만 찍고서 바삐 달아났다. 탐방을 마치고 두곡서원에 대하여 알아보니, 두곡서원(杜谷書院)은 성리학자 강원기(康元紀)(1423~1498)의 거처가 있던 곳으로, 배향되어 있는 사람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봉호당 문헌공 강원기, 난계 함부림(咸傳霖) 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강원기(康元紀)는 어떤 분일까? 그는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지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강원기(康元紀)는 1348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신천(信川), 호는 봉호(鳳湖)라고 한다. 1398년(태조7) 이방원(李芳遠)이 왕위 계승 문제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 소생인 이방번(李芳蕃)과 이방석(李芳碩)을 죽이자, 화를 면하기 위하여 만경현 심포에 정착하여 영락와(永樂窩)를 짓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강원기의 심포 이주 시점인 1398년경부터 심포에 신천 강씨들이 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현재 심포마을에는 신천 강씨가 많이 살고 있는데, 대략 15대째 살고 있다. 강원기가 정착한 만경현에는 삼폐(三弊)라 하여 고려시대부터 세 가지 폐단(三弊)이 있어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첫째는 고려 때부터 시행하여 군사상 통신 역할을 했던 봉화산의 봉수대 문제였다. 봉화산 봉수대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운영상 필요한 경비를 각출해야 하는 재정상의 폐해를 감당해야 했다. 둘째는 공마(貢馬)라 하여 매년 300필의 말을 길러서 나라에 바쳐야 하는 문제였다. 매년 300필의 말을 길러서 나라에 바치는데, 인력 동원 문제며 말을 구입하는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셋째는 공여라 하여 매년 6,000편의 숫돌을 만들어 나라에 바쳐야 하는 문제였다. 만경강에 접하고 있는 석소(石所) 뒷산에서 숫돌 6,000편을 다듬어 나라에 바치는 일로, 이것 역시 인력 동원과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백성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연중 쉴 새 없이 노력과 재정의 부담을 안아야 했던 것이다. 강원기가 자신의 제자를 통하여 임금에게 이 세 가지 폐단을 알려 주민들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 결과 말 기르는 것은 제주도로, 봉수대는 부안 계화도로, 그리고 숫돌 제작은 태인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지역민들이 이러한 강원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1589년(선조 22)에 두곡서원을 세우고 배향하였다. 그 후 1869년(고종 6)에 철폐되었던 것을 1970년에 다시 지었다.(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직진하여 100m 앞에서 망해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망해사를 내려가 보고 싶지만 일행이 오른쪽으로 꺾어 숲길로 진행하기에 망해사를 들르지 않고 일행을 따라간다. 해발 72m의 진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망해사는 낙조가 아름다운 절로서, 서해의 섬들과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승지라고 하며 특히 팽나무 2그루가 멋지다고 하는데 그냥 통과한다.
심포리(深浦里) 도장골 방향으로 가는 숲길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활짝 열린 새벽 하늘에 방금 보았던 그믐달이 더욱 애처롭게 보인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청승을 떨며 서해랑길을 탐방하는 길손이나 보아 주는 그믐달이 청승스럽게 떠 처량한 빛을 흘리고 있다. 그래서 나도향은,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는 그믐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그믐달은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라고 표현했던 것일까? 길손은 청승을 떨며 가장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되어 그믐달을 자꾸 올려 보았다.
진봉면 심포리(深浦里) 규동마을과 심창초등학교로 내려가는 갈림목에 이르면 녹색명소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전망이 좋을텐데 북쪽 방향은 까만 어둠만이 밀려온다. 남쪽 바로 아래의 규동마을과 심창초등학교를 어림하며 멀리 남쪽으로 불빛 반짝이는 곳은 광활면 옥포리 지역의 김제평야 광활들일 것이라 가늠한다. 도장골 언덕의 참깨밭을 거쳐 만경강 강변으로 내려가면 강변에 갈대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갈대풀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반짝이며 길손의 옷과 신발을 적신다. 최근 새벽길을 걸으며 진주보다 더 영롱한 이슬방울을 보아왔다. 그런데 만경강 강변 갈대숲길의 이슬이 더 영롱해 보이며 탐스럽다. 이슬방울은 절대적 순수미, 어떤 티끌도 끼어들 수 없는 절대적 맑음이라고 생각한다. 길손은 갈대숲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길손의 옷은 옆구리까지 절대적 순수의 아름다움으로 물들었으며 등산화는 절대적 맑음에 풍덩 빠진 것처럼 정화되었다. 길손의 몸은 새벽의 맑음으로 정화된 느낌이 들었다.
갈대숲길이 끝나는 지점이 옛 전선포라고 하는 곳이다. 아마도 갈대숲길을 포함한 이 강변이 예전에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전선포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전선포(戰船浦)는 만경강 입구에 위치해 있어 전라도를 적군으로부터 지켜내는 요새로서, 지금의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軍港) 역할을 한 포구였으며, 고려 후기에는 왜구와 접전을 벌였다고 한다. 강변에서 전선포 제방으로 올라가 전선포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전망지로 갔다. 전선포 서쪽 봉화산으로부터, 진봉산, 국사봉, 니성산 등이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줄지어서 만경강 하구를 지키며, 이 산들을 등지고 남쪽으로 마을들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광활한 간척지 들판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만경강 건너편 북쪽에는 군산시 대야들이 마주하고 있을 텐데, 어둠 때문에 이 모든 풍경을 조망할 수 없다. 이 전망을 즐기지 못하고 전선포 제방길을 따라간다. 전선포 제방은 1920년대 일본인들이 간척 사업으로 만든 제방으로, 이 제방 축조로 인해 전선포 일부는 농경지가 되고 또 일부는 해안이 되어 전선(戰船)이 정박했던 포구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고 없다.
전선포제방길을 따라가며 간척농지 남쪽의 지방도702호선 '지평선로'를 가늠한다. '지평선로' 북쪽 구릉 아래 간척농지 건너편 불빛 반짝이는 마을이 전선포마을일 것이다. 현재 전선마을은 10여 가구가 모여 있는 한적한 농어촌 마을이라고 한다. 전선포 제방길은 국사봉 자락길로 이어진다. 어둠 속에서 가늠해 보건대 전선포 제방은 진봉산 동쪽의 낮은 구릉과 국사봉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오는 곳에 제방을 축조하여 간척한 것 같다. 전선포 제방에서 국사봉 자락길로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나성산으로 이어지는 모악기맥 입구이다. 이 갈림목에서 서해랑길은 모악기맥과 헤어져 국사봉 자락길을 따라 고사리 고사(古沙)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모악기맥이 만경강과 동진강의 수계(水界)이기에 지금부터는 만경평야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국사봉 자락길에는 해안경비초소가 두 군데나 있었다. 폐허처럼 버려진 이 초소들을 재벙비하여 탐방객들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사봉 자락길은 만경강 남쪽 언덕길로 꼬불꼬불 이어지다가 그윽한 대숲길을 지나 강변 위쪽 들길로 내려간다. 들길에 줄기가 굵은 노거수가 하늘로 솟아 있다. 무슨 나무일까? 자잘한 하얀 꽃들이 자욱하다. 알고 보니 고목에 줄사철나무 덩굴줄기가 감아오르며 하얀 꽃들을 피운 것이다. 들길 바닥에 검은 오디들이 떨어져 있어 살펴 보니 뽕나무들이 즐비하다. 만경강 강변 위 들길에 농민들이 양잠업을 위해 뽕나무들을 식재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늘에서는 그믐달이 여전히 처량하게 떠서 창백한 빛을 흘리고 있다.
뽕나무들이 즐비한 고사리(古沙里) 고사(古沙)마을 입구에서, 민가 한 채가 있는 인향(仁香)마을 입구를 거쳐 석치(石峙)마을 입구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이 돌고개를 넘어서 나룻배를 타고 군산 옥구를 왕래한 데서, 마을 이름을 돌고개의 한자 표기인 석치(石峙)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진봉방조제 석소(石所)배수갑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부터는 진봉면 면소재지 고사리 관기마을 입구까지 진봉방조제 제방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아직까지 동이 트지 않았다. 앞서 걷던 일행이 깜짝 놀라며 뱀이 있다고 한다. 일행 모두가 뒤로 물러난다. 길손은 뱀에게 가까이 다가가 헤드랜턴 불빛을 비쳤다. 새벽의 어둠 속 유혈목이 꽃뱀인 듯, 한 마리가 숙면에 취해 있는 것 같다. 꼼짝도 않는다. 새벽 추위에 떠는 것인가? 앞서간 탐방객에게 발에 밟힌 것인가? 목 주위에 아름다운 색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꽃뱀일 것이라 판단한다.
뱀은 징그럽다. 그런데 꽃뱀은 관능적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꽃뱀은 한국현대시사에서 생명의 강렬한 욕망을 노래한 생명파 시인 서정주의 '화사(花蛇)'로 하여 새롭게 빛난다. "(상략)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중략)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서정주의 '화사(花蛇)' 중에서) 징그러운 뱀, 이브를 꼬여낸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악마, 그러나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관능적 생명력으로 불타는 뱀, 상반된 이중의 감정 속에서 시인은 스물 난 색시 순네의 관능적 욕구를 찬미하고 있다.
'화사(花蛇)'에서 찬미한 꽃뱀의 관능적 생명력은 그의 작품 '맥하(麥夏)'와 함께 살피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黃土 담 넘어 돌개울이 타/ 罪 있을듯 보리 누른 더위ㅡ/ 날카론 왜낫(鎌) 시렁 위에 걸어놓고/ 오매는 몰래 어디로 갔나// 바윗속 山되야지 식 식 어리며/ 피 흘리고 간 두럭길 두럭길에/ 붉은 옷 입은 문둥이가 울어// 땅에 누어서 배암 같은 게집은/ 땀흘려 땀흘려/ 어지러운 나ㅡㄹ 엎드리었다."(서정주의 '맥하(麥夏)' 전문) 이 시에서 문둥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서정주의 '문둥이' 시에서는 문둥이를 천형의 문둥병 환자 또는 관능적 생명력으로 사랑의 욕구를 실현한 여인,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보리가 누렇게 익는 여름철 '맥하(麥夏)' 작품에서는 천형의 문둥병 환자처럼 낙인 찍힌 '애를 밴 처녀'를 '붉은 옷 입은 문둥이'라고 표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 시를 이해하는 데 타당해 보인다. '배암 같은 게집'과 땀흘리는 '어지러운 나'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게집의 배가 불러오면서 게집의 어머니는 몰래 어디로 갔는가? 피 흘리며 자살하였을까? 그래서 이 시는 당대에 관능적 생명력이 현실 사회에서 억압되고 있는 고통을 눈물겹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손은 꽃뱀에 놀라고 꽃뱀에 취했다. 징그러움과 화려함, 이 상반된 것은 도덕적 통제에서 언제나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는 이를 금기시하여 도덕적으로 통제한다. 길손 또한 이 통제를 받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통제를 벗어나려는 욕망은 언제나 꿈틀거린다. 동이 서서히 터온다. 서해랑길은 진봉면 고사리(古沙里) 석소(石所)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고사리(古沙里) 석소(石所)마을 입구에 이르렀다. 석소(石所)는 고사리(古沙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질 좋은 숫돌이 나와, 칼과 창을 가는 숫돌을 5,000편씩 만들어 나라에 바친 역사적인 유적지로 알려진 마을이다. 석소마을 남쪽으로는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가 만경평야를 가로지르고 여명 속에 실루엣으로 깨어나는 가로수 풍경이 예쁘다. 북쪽으로는 어둠 속 만경강(萬頃江)이 여명 속에 서서히 제 모습을 살짝 보여주고, 그 앞에 만경강(萬頃江) 갈대습지가 넓게 형성되어 안개를 피어올리고 있다. 길손은 남쪽의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를 나란히 바라보면서 진봉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진봉면 면소재지 고사리(古沙里) 관기(館基)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관기마을 진봉면사무소 입구는 새만금바람길 시작지점이다. 이곳에서 서해랑길은 지금까지 역방향으로 동행한 새만금바람길과 작별한다. 날이 밝아온다. 흰 색으로 빛나는 그믐달이 외롭게 새벽 하늘에 떠 있다. 저 청승맞은 그믐달이 이번 어둠의 탐방길에서 길손에게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동병상련의 情인가? 새벽 어둠 속에 빛나는 그믐달이나 새벽 어둠 속을 탑방하는 길손이나 청승맞기는 마찬가지다. 만경평야 들녘으로 나갔다. 진봉면 고사리, 상궐리, 정당리 일대와 중앙 맨 뒤쪽 만경읍 몽산리 지역, 맨 오른쪽 뒤 만경읍 만경리 지역 일대에 만경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만경평야는 밝아오는 새벽 빛을 받으며 깨어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고 만경강은 북쪽으로 멀리서 돌아흐르고 만경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 뒤 숲에서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수로 둑방길로 나가 수로를 거슬러 둑방길을 따라간다. 간석지(干潟地)는 밀물 때에는 물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개펄을 뜻한다. 이 간석지가 간척되어 평야가 되고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인공하천 수로가 흐르고 있다. 인공하천 수로 둑방길을 따라 만경읍 몽산리 방향으로 올라간다. 진봉면 상궐리 들녘 연지(蓮池)에 연잎들이 푸르게 자라고 뒤쪽에 정당리(淨塘里) 대덕(大德)마을이 보인다. 관능적 사랑이 불타오르는 만경평야 여름 아침 풍경이다.
만경읍 몽산리 들녘으로 들어왔다. 높이 41m 몽산(夢山)이 솟아 있고, 그 북쪽 아래에 다해미곡처리장 건물, 그 서쪽에 몽산마을이 보인다. 만경읍 몽산리 몽산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수로를 건너 북쪽 만경읍 화포리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뒤돌아보았다. 걸어온 길이 아득하다. 이 지역민들이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 부르는 김제·만경평야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징게맹게 외배미들’은 '김제만경 너른 들’이라는 뜻이다. ‘징게맹게 외배미들’의 들녘이 뭍을 덮고 누런 밀밭이 물결친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심포항을 출발하여 진봉반도 서쪽 모악기맥 숲길, 전선포제방길, 모악기맥과 헤어져 국사봉 자락길, 만경강 언덕길, 진봉방조제길, 인공하천 수로 둑방길, 그 길들이 물결치며 가슴을 덥힌다.
*참고 자료
1.그믐달 - 나도향(羅稻香, 1902~1906)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恨)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2.화사(花蛇) -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石油) 먹은 듯…석유(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9.02km 중 11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13분 중 2시간 53분
심포항 입구 건너편 심포6길에 서해랑길 52코스 시작점 표지판과 서해랑길 51·52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1872년 제작된 김제군 지방도를 살펴보면 심포리 주변은 거의 간석지였고, 어업과 농업을 겸하던 농가가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약 20년 동안 진행된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인해 심포리 앞 갯벌과 바다가 방조제 안쪽의 내수면지가 됨으로써 예전 포구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앞으로 간척 사업이 끝나면 이곳 주민들의 생업도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심포항의 경우 이미 포구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어 보상금을 받은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고향을 떠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제시 서쪽 진봉반도 끝 심포항에서 서해랑길 52코스를 출발하여 만경강을 거슬러 김제시 북동쪽으로 진행한다.
전라북도 중앙부 서쪽에 있는김제시(金堤市)는 동쪽으로 노령산맥(蘆嶺山脈) 주능선을 경계로 완주군, 남쪽으로 동진강(東津江)을 경계로 정읍시·부안군, 북쪽으로 만경강(萬頃江) 및 그 하구를 경계로 익산시·군산시와 이웃하고, 서쪽은 서해와 닿아 있다. 동부에 노령산맥 끝자락인 모악산(母岳山)을 중심으로 구성산(九城山)·국사봉(國師峰)·상두산(象頭山) 등 높이 500~700m 산지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솟아 있고, 황산면 황산(凰山)과 서해 연안에 봉화산(烽火山)·진봉산(進鳳山) 등 100m 안팎의 산지가 솟아 있다. 이들 산지를 제외하면 시 전체가 50m 미만의 야트막한 언덕과 동진강(東津江)·원평천(院坪川)·만경강(萬頃江) 주변에 형성된 광대한 충적 평야 지대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중심이 된다. 능제저수지·대율저수지·백산저수지·석동제·웅제 등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북쪽 만경강과 남쪽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김제만경평야를 안은 김제는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논으로 우리나라 쌀의 40분의 1을 생산한다. 앞으로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면 김제시는 산과 강, 들녘과 바다를 아우르는 곳으로서 단순한 농업 위주가 아니라 관광을 비롯한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는 도시로 도약할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김제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여 생활의 터전을 닦아 온 곳이다. 금산면 일대에서 발견된 남방식 고인돌을 비롯하여 관내 곳곳에서 긴 돌칼이나 유구석부 등이 발견되었고, 벽골제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서 볍씨 자국이 찍힌 민무늬 토기 조각이 발견되어, 청동기시대부터 농경문화가 매우 발달한 우리나라 벼농사 시원지 중 한 곳으로 주목받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개 부족국가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벽비리국(辟卑離國)이 있었고, 백제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이었다. 벽비리나 벽골이라는 지명은 ‘벼의 고을’, ‘볏고을’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는 일찍부터 벼농사의 중심지 구실을 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으로 여겨진다.
김제시는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와 26.7㎞, 서울특별시와 266.7㎞ 떨어져 있다. 고속도로 2개, 국도 4개, 지방도 8개, 시도 47개 노선의 도로망을 갖추었고, 호남선 철도가 지나며 부용역·와룡역·김제역이 개설되어 있다. 관광지로는 모악산도립공원(母岳山道立公園)에 있는 금산사(金山寺)가 유명하다. 사적지로 벽골제(碧骨堤)가 있고, 해양 문화 체험지로 심포항이 있다. 이 밖에 삼불암(三佛庵)·망해사(望海寺)·귀신사(歸信寺)·문수사(文殊寺) 등의 사찰, 김제동헌(金堤東軒), 김제향교(金堤鄕校), 금구향교(金溝鄕校), 만경향교(萬頃鄕校), 용암서원(龍巖書院), 삼현서원(三賢書院), 백석서원(白石書院), 조선 숙종의 교지를 기록한 김제전교비(金堤傳敎碑)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심포항 입구 새만금바람길 이정목 옆 도로 가드레일에 붙어 있다. 그 오른쪽에 서해랑길 51·52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망해사1.7km 방향으로 심포6길 횟집단지 거리를 따라간다.
거리 18.4km, 소요 시간 6~7시간, 난도 보통으로 적혀 있다. 망해사, 만경낙조전망대, 새창이다리 등을 통과한다.
서해랑길 52코스를 출발하며 서해랑길 51·52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52코스 출발지 400m 지점, 51코스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음식점 '전망좋은집' 앞까지 심포6길 횟집단지 거리를 따라왔다.
심포6길 끝에 김제 한글 조형물과 심포항낙조 설명안내판이 조성되어 있다.
갈매기는 만경강 하구에서 날아와 앉아 있고, 바람개비는 만경강을 향하여 팔랑팔랑 돌아간다.
봉화산 봉수대 2.0km, 심포항 출발지 0.4km, 망해사 1.3km 지점이다. 오른쪽에 심포항낙조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진봉반도 서쪽 끝 심포 갯벌은 썰물 때면 10㎞ 정도 드러나는 천혜의 갯벌이었다고 하지만 새만금방조제로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그러한 풍경과 만경강 하구 그리고 그 주변 풍경을 전혀 감상할 수 없다.
전라북도 내륙을 흘러내리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 바다와 마주치는 진봉반도 끝쪽으로 봉화산(85m)이 뾰쪽하게 나와 있다. 이곳의 동진강 하류에 있는 어항이 거전항(巨田港), 만경강 하류에 위치한 어항이 심포항(浦港港)이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던 큰 어항이었으나, 연안 어업의 쇠퇴와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인해 지금은 담수호가 되었다. 심포항은 수천만 평에 이르는 심포 개펄의 배후 항구로 드넓은 개펄에서 채취하는 조개 집산지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심포백합(생합)은 지역 특산물로 인기가 높은 고급 조개이며, 몇 년 전까지 심포 개펄은 체험 학습 장소로 많이 활용되었으며 서해의 풍광과 붉게 물든 심포항 낙조가 장관이다.(설명안내판)
모악기맥 산줄기를 따라 올라간다. 모악기맥은 진봉산을 거쳐 51코스 봉화산에서 꼬리를 내려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계단을 올라 진봉산 정상을 넘어 내려가면 진봉산전망대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가 조성되어 있다.
진봉산은 높이 72m의 낮은 산이나 바닷가에 위치하여 절경을 이룬다. 만경강 하류의 서해에 위치한 망해사는 642년(의자왕 2)에 당나라 승려 중도법사가 중창한 사찰이고 망해사 낙서전(望海寺 樂西殿)은 1589년(선조 22)에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지은 것이라 한다. 망해사는 사찰로서뿐 아니라, 이 지역의 명승지로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망해사를 정점으로 심포항 등 서해 연안에서는 가장 바다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서해의 낙조가 절경이다. 바닷물이 빠질 때면 망해사 아래로 드러나는 갯벌에서 조개를 캐며 갯벌체험을 할 수 있고, 해질 무렵이면 망해대에 올라 낙조와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는 3층으로 되어 있다. 진봉망해대 3층으로 올라가서 새벽의 어둠 속에서 조망한다.
진봉산의 망해대에 오르면 서쪽과 서남쪽은 망망대해요, 동쪽은 우리나라 제일의 곡창 금만경평야가 아스라이 다가온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올망졸망한 낮은 산들이 눈을 가득 채운다. 건너편 심포산 정상에는 고려시대에 축조하여 연기와 횃불로 적의 침입을 알렸던 봉수대가 있다. 심포산 북쪽 바닷가에 심포항이 위치하고 있다. 북쪽은 미녀봉(美女峰), 그 건너편에 국사봉이 있고 그 아래에는 옛날 전선이 주둔하던 수군(水軍) 기지인 전선포(戰船浦)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J' 문자를 'G' 문자와 동일한 높이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곳에서 심포항과 만경강 하구, 새만금방조제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 불빛 반짝이는 곳은 군산시 옥서면 하제 포구일 것이라 가늠한다.
만경강(萬頃江)은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발원하여 김제시를 지나 서해의 새만금으로 흘러드는 하천. 만경강 유역의 수리 시설과 치수사업은 우리나라 8대 오지로 불리는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1923년 동상저수지를 축조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동상저수지 아래에 20m를 높여 대아저수지를 축조하였다. 1925~1930년에는 직강(直江) 공사, 1935년 경천저수지 축조, 1930~1940년 봉동-삼례의 고산천 정비, 1964년 김제시 백구면 등에 제수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이 들어오는 구간을 축소시켰다. 1973년에는 직강 공사로 인하여 만경강 주변의 일부 행정구역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강의 길이는 완주군 동상면 밤티에서 김제시 진봉면 국사봉 옆 강의 하구까지 81.75㎞로 확정하였다. 만경강의 지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천호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화평천은 81.37㎞, 모악산 원안덕에서 발원하는 삼천은 76.5㎞, 완주 슬티에서 발원하는 전주천은 70.5㎞, 만덕산에서 발원하는 소양천은 67㎞ 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경강 건너편 불빛 반짝이는 곳은 군산시 옥구읍 지역일 것이다.
만경강(萬頃江)의 이름은 만경현(萬頃縣)에서 비롯되었다. 본래 만경은 백제의 두내산현(豆內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만경현으로 개칭되어 김제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 임피현(臨陂縣)에 속하였으며, 1914년 김제군에 합병되었다. 만경의 경(頃)은 ‘백만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신창진(新倉津)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하류는 신창진, 상류는 안천(雁川)[지금의 고산천]과 남천(南川)[지금의 삼천과 전주천]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지리전고(地理典故)」에는 만경의 신창진은 근원이 고산의 남천에서 나오는데, 서쪽으로 흘러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고 만경현을 지나 북쪽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다.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신창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사수(泗水)’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하늘에 그믐달이 떠있고, 불빛 반짝이는 곳은 만경읍 일대의 만경평야일 것이라 어림한다.
바로 아래는 진봉면 심포리 명동마을이고 불빛 반짝이는 곳은 광활면 옥포리 일대의 김제평야라고 가늠한다.
深浦里는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심포리의 위치가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바닷가였기 때문에 예부터 포구로 이용되었으므로 깊은개 또는 짚은개라 하였다. 심포(深浦)는 깊은개의 한자 표기이다. 지리적으로 김제시 북서쪽 최북단 진봉반도 끝부분에 자리 잡아 좌우로 만경강(萬頃江)과 동진강(東津江) 하구를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만경강 하구에 있으면서 금강(錦江)·동진강과도 연결되어 있어 예부터 충청도와 전라도로 들어오는 외적을 쉽게 막을 수 있는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봉화산(烽火山)[82m]에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외적들의 움직임을 한양까지 알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봉수대의 확실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봉망해대(進鳳望海臺)에서 조망을 마치고 내려와 다시 올려보았다. 진봉망해대 아래로 내려가면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 추모비' 입구에 이른다.
심포리 일대는 바다와 연결되는 갯벌이 발달하여 오래전부터 간척이 이루어졌고, 일제강점기에도 1924년 진봉방조제와 1926년 화포방조제가 완공되어 진봉지구와 심포지구로 구분되어 관리하였다. 1872년 제작된 김제군 지방도를 살펴보면 심포리 주변은 거의 간석지였고, 어업과 농업을 겸하던 농가가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약 20년 동안 진행된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해 심포리 앞 갯벌과 바다가 방조제 안쪽의 내수면지가 됨으로써 예전 포구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진봉산(進鳳山)에 있는 백제시대의 고찰 망해사(望海寺) 전망대에 오르면 군산과 부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애국지사 남촌 곽경렬 선생 추모비' 입구에 현충시설지정서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힘쓴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고 한다.
애국지사 곽경렬 선생은 1901년(고종 28) 9월 17일 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남상마을에서 곽대수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7월 15세의 어린 나이에 박상진·채기중 등이 항일 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유상렬·한훈 등과 전라도의 친일 부호인 벌교의 서도현 박곡의 양재학 등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오성의 일본헌병분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였다. 선생은 계속 한훈을 따라 부일분자들을 숙청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는데 멀리 금강산으로 들어가 김등평과 유용중 등을 사살하였다. 1916년에는 일본경찰의 추격을 피해' 잡주로 건너갔다가 다시 국내로 들어와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였고, 1918년 친일매국노인 이종국의 밀고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 포위망이 좁혀짐에 따라 다시 은신하였다. 1920년에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에 힘쓰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발각되어 1924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여의 모진 고문 끝에 1926년 3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남촌 곽경렬 선생 추모비' 아래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 심포리 명동마을에 두곡서원이 있다. 직진하여 100m 앞에서 망해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망해사를 들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어 숲길로 진행한다.
두곡서원(杜谷書院)은 성리학자 강원기(康元紀)[1423~1498]의 거처가 있던 곳으로, 배향되어 있는 사람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봉호당 문헌공 강원기, 난계 함부림(咸傳霖) 등이다. 성리학자 강원기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정몽주와 더불어 경전을 읽어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가 경원과 은성 두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충성과 효도의 길을 가르쳐 주는 「이존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집집마다 나누어 주기도 했다. 태조 때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그 후 간청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만경현(지금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정착해서 이곳의 세 가지 폐단을 고쳐주어 주민들의 고충을 풀게 되었다. 그 뒤 지방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두곡서원을 세우고 배향하였다. 그는 후세에 『봉호집(鳳湖集)』이라는 유집을 남겼다.
숲길에서 동쪽 하늘을 올려보면 그믐달이 애처롭게 떠 있고 그 아래 심포리(深浦里) 규동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새만금바람길을 따라 녹색명소전망대 방향으로 이어간다.
그믐달이 새벽 동쪽 하늘에 나침반처럼 떠 있다.
언덕을 내려가 숲길을 따라 도장골 규동마을 방향으로 내려간다.
진봉면 심포리 규동마을과 심창초등학교로 내려가는 갈림목에 녹색명소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 도장골 규동마을과 어둠 속 김제평야를 조망한다.
심포리 규동마을 불빛이 반짝인다. 심창초등학교는 어디쯤일까? 오른쪽 뒤 불빛 반짝이는 곳은 광활면 옥포리일 것이다.
어둠 속이라 만경강과 그 건너편의 군산 지역은 보이지 않는다.
참깨밭을 거쳐 왼쪽 만경강 강변으로 내려가 갈대숲길로 이어간다.
심포리(深浦里)에는 2009년 11월 현재 총 542가구에 1,136명[남자 559명, 여자 577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17가구가 빈집이다. 전체 면적은 13.65㎢로 논 3.44㎢, 밭 0.23㎢, 대지 0.23㎢, 임야 1.22㎢, 제방 4,641㎡이다. 자연마을로 심포·명동·규동·전선포·안하·길곶·거전·심신성·남상·남하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경강 강변에 갈대숲길이 길게 이어진다. 갈대풀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반짝이며 길손의 옷과 신발을 적신다.
갈대숲길이 끝나는 전선포 입구에 누군가 정성껏 돌탑들을 세워 놓았다.
이곳이 예전에 전선(戰船)들이 머물던 포구인 전선포 해안이다. 강변에서 제방으로 올라가 전선포 전망지로 이어간다.
전선포 입구에 전북천리길 중에서 새만금바람길의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전선포(戰船浦)는 지금의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軍港)으로서, 고려 후기에는 왜구와 접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전선포 서쪽에 봉수대가 있어 정박한 전선들과 수시로 연락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만경강 입구에 위치해 있어 전라도를 적군으로부터 지켜내는 요새였으나, 지금은 ‘전선포(戰船浦)’라는 작은 팻말을 세워 둔 것이 전부이다. 진봉반도는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데, 고군산열도와 계화도가 가까이 있어 어선이 닻을 내리는 항구이기도 하다. 진봉반도의 서쪽 끝부터 봉화산[해발고도 85m], 진봉산[해발고도 74.9m], 국사봉[해발고도 61m], 니성산[해발고도 61.9m] 등이 약 5㎞ 길이의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열을 지어 만경강의 하구를 이루고 있다. 전선포마을을 포함하여 이 산들을 등에 지고 있는 마을들 앞으로는 광활한 간척지의 들판이 펼쳐져 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이 간척 사업으로 만든 ‘전선포 제방’으로 인해 일부는 농경지가 되고 일부는 해안이 되어 전선(戰船)이 정박했던 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현재 전선포마을은 10여 가구가 모여 있는 한적한 농어촌 마을로, 바로 근처에 진봉반도를 감싸는 해안도로인 지방도 702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남쪽에는 간척지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는 만경강을 사이로 군산시 대야들이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곳이 전선들이 머물던 포구였던 전선포(戰船浦)이다. 오른쪽 방향은 전선마을, 서해랑길은 고사마을 방향으로 직진한다.
심포리 전선마을은 오른쪽 0.4km, 서해랑길은 전선포 제방길을 따라 고사리 고사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곳은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고군산 열도와 계화도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어선의 닻을 내리는 항구이다. 고려 후기에는 지금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으로서 왜구의 적선과 싸움을 하기 위한 배(戰船)를 배치 시켰던 곳이라고 한다. 왜적이 침입을 했을 때는 서쪽 봉화산 정상 봉화대의 신호에 따라 즉시 군선(軍船)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었기 때문에 전선포(戰船浦)로 불리게 되었다. 황해에 접하고 있는 반도로서 제일 서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고 전북 내륙으로 들어오는 입구이자 금강, 동진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충청도와 전라도로 들어오는 적군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1920년대 일본인들의 간척 사업으로 만든 '전선포' 제방으로 인해 일부는 농경지가 되고 일부는 해안이 되어 전선이 정박했던 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다.
전선포제방길을 따라가며 남쪽의 지방도702호선 '지평선로'를 가늠한다. 오른쪽 불빛 있는 마을이 전선마을일 것이다.
진봉면 심포리에서 진봉면 고사리(古沙里)로 넘어온 것 같다. 전선포 제방길을 따라 고사리 고사(古沙)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하늘에는 그믐달이 처량하게 떠서 창백한 빛을 흘리고 있다.
언덕 위의 국사봉 갈림목에서 서해랑길은 동행한 모악기맥과 헤어져 직진한다.
국사봉과 나성산 정상1.3km 지점은 위쪽으로 올라가고 서해랑길은 왼쪽 국사봉 자락길을 따라 이어간다.
예전의 해안경비초소는 폐허가 되어 버려져 있다. 이 초소를 재정비하여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해안경비초소가 앞에 또 있다. 서해랑길은 국사봉 자락길을 따라간다.
국사봉 자락길에 그윽한 대숲이 이어진다.
국사봉 자락길에서 대숲을 지나 만경강 언덕길로 내려간다.
들길에 줄사철나무 덩굴줄기가 노거수 줄기를 감아올라 자라고 있다. 줄사철 작은 꽃들이 하얗게 피어 반짝인다.
들길에 뽕나무들이 즐비하다. 길바닥에는 검은 오디들이 떨어져 흐트러져 있다.
국사봉 자락길에서 내려와 뽕나무 들길을 따라왔다. 남쪽은 고사리 고사(古沙)마을, 서해랑길은 인향마을 방향으로 직진한다.
진봉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왕봉산(王峰山) 국사봉 밑에 오래된 절이 있었기 때문에 고사(古寺)라 부르다가 그 후 절 ‘사(寺)’자를 모래 ‘사(沙)’자로 바꾸어 고사(古沙)마을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향(仁香)은 고사 동쪽에 있는 마을로 1584년경 형성되었다. 예부터 어진 사람이 많이 나와 마을이 평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의 귀감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진봉면 고사리(古沙里) 석소(石所)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석치는 인향 동쪽에 있는 마을로 1525년경 평산 신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돌고개를 넘어서 나룻배를 타고 옥구를 왕래한 데서, 마을 이름을 돌고개의 한자 표기인 석치(石峙)라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석소(石所)배수갑문교를 건너 진봉방조제를 따라 고사리(古沙里) 석소(石所)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진봉방조제는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지선(支線)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4년 준공되었다고 한다.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가 달리고 중앙에 불빛 반짝이는 곳은 고사리(古沙里) 석치(石峙)마을일 것이다.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古沙里)는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이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소리·석치리·인향리·종야리 일부, 하일도면 남상리 일부, 상서면 하수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고사리라 하고 김제군 진봉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가 되었다. 만경강(萬頃江)이 서해와 만나는 진봉반도(進鳳半島) 북쪽 해안 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시 옥구읍·회현면과 이웃하고 있다. 해안 구릉지에 고사리에서 가장 높은 나성산[60.9m]이 솟아 있고,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서쪽 심포리에 봉화산(烽火山)[82m]과 진봉산(進鳳山)[72m]이 솟아 있다. 해안의 구릉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이며, 멀리 만경읍 능제저수지(菱提貯水池)에서 이어지는 관개 수로를 이용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봉방조제 제방길을 걷다가 깜짝 놀랐다. 새벽의 어둠 속 제방길에 유혈목이 꽃뱀인 듯, 한 마리가 숙면에 취해 있다.
진봉방조제 제방길에 새만금바람길 석소(石所)마을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석소(石所)는 고사리(古沙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질 좋은 숫돌을 나라에 바치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남쪽 만경평야를 가로지르는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의 가로수가 여명 속에 깨어나고 있다.
만경강(萬頃江)이 어둠에 묻혀 있다. 그 앞에 갈대습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새만금간척사업 이전에는 갯벌이었을 것이다.
뒤쪽에 만경강(萬頃江)이 여명 속에 제 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만경강(萬頃江)은 동진강(東津江)과 함께 호남평야의 중앙부를 지나는 강으로 길이는 약 82㎞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에서 발원하여 완주군 화산면 일대에서 발원한 화평천(花坪川), 완주군 소양면 일대에서 발원하여 완주군과 전주시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소양천(所陽川), 전주시를 통과한 전주천(全州川)을 아우르면서 서쪽으로 흐른다. 김제 지역에서 만경강은 동쪽에서는 익산시와의 경계를 따라 흐르고, 서쪽에서는 군산시와의 경계를 따라 흘러 서해로 흘러드는데, 청하면 동지산리에서 관개 수로에 의해 용암천(龍岩川)이 합류한다. 김제 지역으로 흐르는 대표 하천으로는 지방 하천인 원평천, 두월천, 신평천 등이 있다. 김제시에 발달한 해발 고도 10m 이하의 충적 평야는 이들 세 하천의 주변에 분포한다. 현재 이들 하천들은 농업 개발과 관련되어 인공 제방을 쌓고 직강 공사, 저수지와의 연결 등으로 자연 하천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없어지고, 관배수용 인공 하천으로 바뀌었다. 이들 세 하천이 김제시를 흐르는 구간은 총 길이 102.5㎞로 원평천 63.7㎞, 두월천 25㎞, 신평천 13.8㎞이다. 하천이 차지하는 유역 면적은 358.5㎢로 김제시 전체 면적의 약 70%를 차지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봉방조제 제방길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석소(石所)마을이 보인다.
지평선로의 가로수의 수종이 무엇일까? 여명에 깨어나는 가로수 풍경이 예쁘다.
진봉면 면소재지 고사리(古沙里) 관기(館基)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앞쪽의 교회는 고사교회이다.
진봉면 고사리 관기(館基)마을은 진봉면사무소를 비롯한 지서와 단위농업협동조합이 있는 마을로 앞으로 관청의 터가 될 것이라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진봉면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개척한 일본인 다목(多木)이 소작료를 거두기 위해 농장 사무실·창고·정미소 등을 짓고, 거두어들인 소작료로 별장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치안과 안전을 위해 고사마을에 있던 지서를 이곳으로 옮겼다. 광복이 되어 다목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별장이 비게 되어 1952년 면의회 의원들이 상궐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옮겨 오자, 옛 전설이 맞아 떨어졌다고 함방귀씨는 전한다. 한편 마을 주민 김을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이곳 빈터에 쌓아 두어 관터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관기가 되었다고 한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관기(館基)로 적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제는 본래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넓은 평야지대였지만, 일본이 식량 수탈을 목적으로 간척 사업을 실시하여 이곳에 방조제를 쌓아 1,928ha의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이 방조제는 1924년 준공되어 진봉지구와 심포지구로 구분 관리하여 왔으며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심포리, 상궐리 일대 1,075.5ha로서 몽리면적은 957.1ha이였다. 이곳은 진봉면 고사리 지선이다. 갑문은 6개소 11련(連)인데 심포 갑문 1련, 전선포 갑문 1련, 석상 갑문 1련, 석소 갑문 2련, 관기 갑문 4련, 몽산 갑문 1련 등이다. 관기 갑문의 배수로는 구배가 완만한 데다 물길이 길어 배수에 시간이 오래 걸려 상류지역에 침수가 잦았다. 일본은 본국의 부족한 쌀을 보충하기 위해 장기간 걸쳐 산미증산 계획을 세워 이곳에서 생산된 미곡을 수탈해 갔으며,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진봉방조제 설명안내판 앞에서 관기배수갑문을 살폈다. 관기배수갑문은 4련(連)으로, 갑문의 배수로는 구배가 완만한 데다 물길이 길어 배수에 시간이 오래 걸려 상류지역에 침수가 잦았다고 한다.
직진하면 진봉면사무소,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들녘으로 나간다. 진봉면 고사리 지역의 마을에 대하여 알아본다.
고사리(古沙里) 중앙(中央)마을은 관기(館基)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져 있는 마을로 진봉면 전체를 통틀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부(新富)마을은 1920년경 광활간척지를 조성할 때 간척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중국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 대국촌(大國村)이란 마을을 이루었는데, ‘새로 생겨난 부자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종야(宗野)마을은 관기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 500여 년 전 전주 유씨(全州柳氏) 중시조 유승혜(柳承惠)가 5대째 독신으로 살던 중 너른 들판을 낀 마을에서 살아야 자손이 번성한다고 여겨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지대가 높아 ‘높은 들’, ‘마루 들’이라는 뜻을 담아 높을 ‘종(宗)’자와 들 ‘야(野)’자를 써서 종야라 하였다. 옥정(玉井)마을은 종야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갈대가 우거졌던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샘물을 팠더니 구슬처럼 맑고 질 좋은 샘물이 솟았으므로 옥정이라 하였다. 농장(農場)마을은 종야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 한국농촌연구소장이던 장경순이 이스라엘 키부츠와 같은 시범 농촌을 만들고자 동진농지개량조합에 건의하여, 1969년 협업농장을 만들고 40여 채의 집을 지어 농업고등학교 졸업생 40여 가구가 입주하면서 형성되었다. 마을 이름도 협업농장을 줄여 농장(農場)이라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지점이 새만금바람길 1코스 시작지점으로, 서해랑길은 동행한 새만금바람길과 이곳에서 작별한다. 만경낙조전망대까지 7km 거리가 남아 있다.
진봉1길 골목을 따라 나간다. 주택이 일본식 가옥 같은 느낌이 든다. 하늘에 그믐달이 떠있다.
진봉면 고사리 관기마을 입구에서 진봉면 상궐리 일대를 조망한다. 앞쪽은 상궐리 해망마을일 것이라 가늠한다.
중앙 맨 뒤쪽은 만경읍 몽산리 지역이고 맨 오른쪽 뒤는 만경읍 만경리 지역일 것이다. 만경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관기마을에서 수로 둑방길로 나가 수로를 거슬러 둑방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진봉면 면소재지 고사리 관기마을을 다시 뒤돌아보고 둑방길로 나간다.
뒤쪽은 만경강이 멀리서 돌아흐를 것이다. 수로 뒤 숲에서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진봉면 정당리 대덕제수문에서 진봉면 고사리 관기수문 사이를 흐르는 수로를 거슬러 둑방길을 따라간다.
진봉면 고사리에서 상궐리로 넘어왔다. 둑방길에서 상궐리 해망마을을 바라본다.
김제시 진봉면 상궐리(上厥里)는 1914년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고사리 밭[궐전(蕨田)]을 중심으로 위쪽을 상궐(上蕨), 아래쪽을 하궐(下蕨)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만경군 상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궐리라 하고 김제군 진봉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진봉면 상궐리가 되었다. 1872년에 제작된 지방군현도에 따르면 상궐리 대부분이 바다였다.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상궐리 일대에 간척 사업이 진행되어 낮은 구릉을 제외하고는 마을 대부분이 해안가의 낮은 평야 지대로 변모하였다. 자연마을로 상궐·하궐·석교·상수내·하수내·신흥·망해·오산·전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상궐·하궐·풍촌을 제외하고는 모두 1920년대 이후에 진행된 간척 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간사지는 '간석지(干潟地)'의 비표준어이다. 간석지(干潟地)는 밀물 때에는 물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개펄을 뜻한다. 이 간석지가 간척되어 평야가 되고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인공하천 수로가 흐르고 있다. 이 수로는 진봉면 정당리 대덕제수문-진봉면 고사리 관기수문 사이를 흐른다.
인공하천이 진봉면 상궐리에서 고사리 지역으로 흘러간다. 중앙 뒤쪽에 진봉면 면소재지 고사리 관기마을이 보인다.
이 수로는 대덕제수문-관기수문 간선 수로의 지선 수로이다. 뒤쪽에 진봉면 상궐리 해망마을이 있다.
간선 수로 둑방길을 따라 만경읍 몽산리 방향으로 올라간다.
진봉리 상궐리 들녘 뒤쪽으로는 만경읍 만경리와 장산리에 걸쳐 능제저수지가 있을 것이다.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에 있는 농업 관개용 저수지 능제(菱堤)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만경현조에도 능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이다. 능제저수지는 귀[굽이·귀퉁이]가 99곳이나 되는데, 귀가 100곳이 되면 나라에 큰 경사가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능제저수지는 본래 주변 구릉지의 물을 가두는 재래지(在來池)였으나, 1930년 1월 1일 확장 공사를 시작하고 그해 12월 31일 준공되어 운암호의 물을 받아 저장하는 양수저수지(揚水貯水池)가 되었다. 능제저수지의 제당 형식은 휠댐이며, 제당 체적은 85,400㎥이다. 제방의 길이는 976m이고, 제방의 높이는 7m이다. 2016년 현재 능제저수지는 한국농어촌공사 동진지사가 관리하고 있다. 한발 빈도는 10년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사무소에서 익산 방향으로 300여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김제시 만경읍과 성덕면이 경계를 이루고 김제와 군산 방향인 국도 29호선이 인접한 곳이다. 낚시터로도 이름을 얻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봉면 상궐리 들녘 너머는 정당리(淨塘里) 지역으로 대덕마을이 보인다. 이 지역을 만경평야라 이른다.
김제시 진봉면에 속하는 정당리(淨塘里)는 1914년 중심 마을인 정당(淨塘)의 이름을 따서 정당리(淨塘里)라 하였다. 정당은 원래 마을 근처에 큰 연못이 있어 다못 또는 다뭇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깨끗한 연못[淨塘]으로 바뀌었다. 조선 말기 만경군 상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상리·다하리·신희리·효정리·갈전리·가실리·석교리 각 일부, 북면 광덕리·대덕리·화양리·옥산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정당리라 하고 김제군 진봉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궐리 지역의 연지(蓮池)에 연잎들이 푸르게 자라고 뒤쪽에 정당리(淨塘里) 대덕(大德)마을이 자리한다.
진봉면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 방조제가 설치되기 전에는 정당리 지역도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특히 정당리는 지대가 낮아 간척된 뒤에도 연못이나 호수 형태로 남아서 지명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갈전이나 대덕에서 소금을 굽거나 염전이 존재했다는 점도 이 지역 일대가 바닷가였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지금은 진봉평야의 일부가 되어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마을로 정당·효정(孝井)·다상(多上)·다하(多下)·갈전(葛田)·대덕(大德)·소덕(小德) 등이 있다. 대덕은 원래 마을 뒷산인 광덕산에서 따와 광덕이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덕을 베푼 사람들이 많고 잘사는 마을이라 하여 고친 이름이다. 대덕에는 염전이 있었고 갈전에서는 그 소금을 구웠다고 한다. 소덕은 대덕에서 나누어진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대덕 지선 수로 다리를 건너 위쪽의 상궐리 간선 수로 둑방길을 따라 만경읍 몽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만경읍 몽산리 들녘의 만경평야가 펼쳐지고, 높이 41m 몽산(夢山) 왼쪽 뒤에 몽포마을, 몽산 오른쪽에 몽산마을이 자리한다.
김제시 만경읍에 속하는 몽산리(夢山里)는 몽산(夢山)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몽산리(夢山里)라 하였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는 산이 없었는데 어떤 도인이 꿈을 꾸고 깨어나니 산이 생겨서 몽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지형이 소가 누워 꿈을 꾸는 모습이어서 우몽산(牛夢山)이라 부르던 것이 줄어서 몽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말기 만경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몽산리·몽서리·몽동리·장흥리·화양리·옥산리, 군내면 송전리·산본리 일부를 병합하여 김제군 만경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만경면에 속하였고, 동년 3월 2일 만경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가 되었다. 북서쪽은 만경강(萬頃江)과 서해가 만나는 간석지가 있어 예부터 간척이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간척 사업을 벌여 논과 염전을 만들었다. 몽산리에서 가장 바다와 가까운 몽포 북서쪽에 뒷간사지라고 불리는 곳이 염전 자리였다고 한다. 동쪽으로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서쪽으로 진봉면 정당리, 북쪽으로 만경읍 소토리와 이웃하고 있다. 자연마을로 몽산·몽포·봉회·화양·장등·송전·옥산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낮은 산봉들은 왼쪽부터 장등산과 오른쪽 사직산이라 가늠한다. 장등마을, 봉회마을, 옥산마을이 펼쳐 있으며 만경농공단지가 있다고 지도를 통해 확인한다. 몽산리 마을 뒤쪽에 만경읍 읍소재지 만경리가 있을 것이다.
왼쪽 지역은 만경읍 몽산리 들녘이지만 오른쪽에 펼쳐지는 들녘은 진봉면 상궐리와 정당리 들녘, 이 들녘이 만경평야이다.
진봉면 고사리에서 상궐리로 넘어와 상궐리 수로 둑방길을 따라 계속 이어왔다.
진봉면 상궐리 간선 수로가 흐른다. 건너편 언덕 뒤쪽은 만경강이 흐르고 드넓은 습지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진봉면 상궐리 간선 수로 둑방길을 따라간다. 만경읍 몽산리 들녘이 펼쳐지고, 오른쪽 뒤에 높이 41.0m 몽산(夢山)이 있다.
몽산의 산줄기는 호남정맥 초당골[막은댐]을 지나 모악산기맥 분기점에서 전라남도 광양시의 백운산까지 뻗어가는 호남정맥에서 분기되어 북쪽으로 달리는 모악기맥이 뿌리이다. 모악기맥은 만경강(萬頃江)과 동진강(東津江)을 가르며 엄재, 국사봉, 화율봉, 장근재, 모악산, 유각치, 묘고산에 닿는다. 묘고산에서 서쪽으로 구성산(九城山) 줄기를 갈라놓고 북쪽으로 달리며 매봉산, 천잠산에 이르면 방향을 서쪽으로 꺾는다. 그리고 모악기맥은 승반산(升盤山), 두악산(斗岳山)을 지나 북쪽으로 몽산을 갈라놓고 망해사가 있는 진봉산(進鳳山), 국사봉을 지나 봉화산(烽火山)에서 맥을 다한다. 몽산의 물줄기는 만경강에 합류하여 새만금으로 들어간다. 몽산은 높이 41.0m이며, 평야지대 가운데 낮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산을 둘러싸며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남쪽에 몽산마을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경읍 몽산리 몽산과 장등산 일대에 펼쳐진 들녘은 만경평야이다.
만경읍 몽산리 들녘에 밀밭이 드넓다. 왼쪽에 폐곡물창고가 있으며, 몽산 왼쪽 아래에 다해미곡처리장 건물이 보인다.
오른쪽 진봉면 상궐리 수로 둑방길을 따라왔다. 드넓은 만경평야가 멀리 김제평야로 이어지고 앞에는 밀밭이 물결친다. 김제만경평야를 이 지역민들은 ‘징게맹게 외배미들’(김제만경 너른 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만경읍 몽산리 몽산마을 입구에서 수로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북쪽 만경읍 화포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바로 앞 수로 다리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 오른쪽에 폐곡물창고, 맨 뒤쪽에 몽산, 그 앞쪽에 만경읍 몽산리 몽산마을이 있다.
위와 같은 곳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오른쪽 지선(支線) 수로의 둑방길을 따라왔다. 왼쪽에 밀밭이 물결치고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이정목 방향의 둑방길로 나가 수로 다리를 건너 만경읍 몽산리에서 화포리로 넘어간다.
첫댓글 새벽의 그믐달,
꽃뱀과의 조우~~
참 이채롭습니다.^^
꿈마니님
고운 댓글 감사합니다
새벽 어둠 속 탐방의 색다른 정취를 느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