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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 윤관(尹瓘)장군
고려시대의 명신. 명장 .본관 파평(坡平) 시호 문숙(文肅)자 동현(同玄)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遺). 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 좌사낭중(佐司郎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추밀원지주사. 어사대부. 이부상서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忠孝館>
그 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예종2년(1107)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험진). 숭년(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공으로 추충좌리평웅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그 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 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병부판사(兵部判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나. 윤관(尹瓘)장군 묘
1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ㅡ1
<文肅公 尹瓘將軍 墓域 全境>
윤관 장군의 묘는 파주의 304번 국도 오른쪽 길 옆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어찌나 묘 주위를 잘 가꾸어 놓았는지 잘못하면 묘가 아니라 능원이나 공원으로 착각할 정도다. 입구에서 보면 저 멀리 홍살문이 갑옷을 입은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고, 문 옆에는 오석(烏石에 힘찬 글씨로 '麗忠祠 文肅公尹瓘將軍墓域'라고 쓴 비석이 있으며, 그 옆 바위에는 장군의 친필과 장군이 7세 때 남긴 호연지기가 물씬 풍기는 뽕나무를 읊은 시가 음각되어 있다.
뽕잎은 누에를 길러 추위를 막게 하고 (葉養天蟲防雪寒)
가지는 굳센 활 만들어 오랑캐를 무찌르리 (枝爲强弓射犬戎)
이름은 비록 초목이라도 참으로 국보로다 (名雖草木眞國寶)
자르거나 꺽지 못하게 아이들을 훈계하리 (莫剪莫折誡兒童)
붉은 홍살문을 통하여 보이는 장군의 묘는 황금빛 잔디를 깔고, 야영하는 軍陣인듯 둥굴고 푸른 뒷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왼편으로 올르는 길은 한적하여 엄숙함을 더한다.
<문숙고 神道碑>
2 . 형기론
홍살문 오른쪽에는 두 기의 무덤이 있는데, 말 무덤과 가마 무덤이 있는데 왼쪽은 '尹侍中轎子塚' 곧, 장군이 타고 다니던 평교자(平轎子)의 묘이며, 오른쪽은 '尹侍中戰馬塚' 곧, 장군이 타고 다니던 애마의 무덤이다. 세상에 수 많은 무덤이 있지만 평교자와 말의 무덤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는데, 이 곳의 두 무덤을 보니 너무 인간적이어서 경이롭고 신비하기까지 하다.
장군 묘는 나지막한 기단 위에 둥그렇게 자리잡았는데, 武人石은 성난 장군의 수염을 보는 듯하다. 묘 뒤 에 둘러 친 곡장에는 기와를 올리어 잘 단장 하였고, 그 곳에서 바라보이는 안산의 확 트인 全景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당임을 실감케한다.
묘 앞에 있는 비석에는 '高麗守太保門下侍中鈴千伯 文肅尹公諱瓘之墓'라고 쓰여 있다.
<左 '尹侍中轎子塚' . 右 '尹侍中戰馬塚'>
파주의 鎭山은 城山이며 광탄의 산세는 파평산 서쪽 낙맥이 연이어 여러 봉우리를 이루어 솟아있고 그 밖에 자운산, 동고산, 한미산이 줄지어 羅星으로 둘러있다. 북으로는 백운산, 표산, 낭산이 산등성이를 마주하고 솟아 있으며, 서쪽에는 우두산, 대산, 월룡산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그 사이로 맑은 물줄기는 여러 물이 합수되어 광탄천을 이루고 문산포로 흘러가니 마치 水太極과 같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홍살문에서 묘지뒤쪽을 바라보면 단아한 탐랑체인 현무봉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균형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좌천을(左天乙) 우태을(右太乙)이 버티고 있다. 좌천을 우태을이란 귀인이나 장군이 앉아 있으면 그 뒤 양쪽에서 호위하고 서있는 장수를 말하는 것으로 좌천을 우태을의 보호를 받는 봉우리에서 중심 맥으로 이어진 용맥(龍脈)에 혈을 맺으면 대개 대혈(大穴)에 속한다고 산서에 전하고 있다.
<墓域 全境>
현무봉에서 혈까지 내려오는 용맥을 살피기 위해서 묘지 뒷산을 오르면 매우 급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현자(之玄字)로 계속 굴곡(屈曲)하면서 마디인 절(節)을 형성하고 있다. 현무봉 정상까지 기세 있게 변하는 절수(節數)를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니 36절룡(節龍)이라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급하게 내려간 용이 마지막에 결인속기(結咽束氣)하여 기를 묶어주고 혈을 맺었다. 결인속기처는 담장 바로 뒤 약간 잘록한 부분이다. 여기서 기를 묶어주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라면 혈의 결지 방법은 결인속기법(結咽束氣法)에 해당된다. 그러나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하수사 등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좌우선룡법(左右旋龍法)과 태식잉육법(胎息孕育法)에도 해당될 것 같다.
<유관장군 墓>
용세는 수백 번 기복한 용절이 艮寅에서 다시 머리를 들어 癸丑에서 박환하여 寅入首로 혈처를 이루어 놓으니 艮坐坤向으로 南西向이다. 맑은 물은 丙午方에서 얻고 破口는 庚兌方으로 흘러 水前 현무로 北으로 빠져나간다.
본신 靑龍은 수려하게 솟아 감쌌으나 약간 中虛함이 흠이 되어 한 때 후손들이 고단함과 향화가 일시 멎었음을 짐작케 한다. 白虎는 가지런히 높이 솟아 穴을 싸고 감아 봉오리들이 金局으로 한 가닥은 花冠을 이루었다.
案山은 玉帶를 놓은 듯 帳을 이루고 한줄기 뻗어 내린 山峰이 둥그렇게 요병위(凹甁位)를 이루어 놓았다.
만궁(彎弓)으로 잘 감아 일품의 격을 이루었으나 한 가지 흠이 안산 줄기가 끝에서 逆頭로 솟아 한때 후손들의 상잔(相殘)이 있음을 엿보게 한다. 형국은 "괘등형 유병안(掛燈形 油甁案) "로 만대영화를 누릴 땅으로 진혈이다. 이러한 자리에 묻힌 분이 문숙공 윤관 장군으로 명당에 명인이라 잘 어울리는 자리다.
<石物들>
3 . 이기론
주산과 현무봉이 탐랑(貪狼) 목성(木星)체이므로 혈은 유두혈(乳頭穴)이 진혈이다. 유두혈이란 혈판이 마치 풍만한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고 혈심은 젖꼭지부분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용맥은 잘록하게 결인속기 한 후 수평으로 길게 늘어져 가는데 위는 가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지다 다시 좁아져 끝을 맺는다. 이를 상세하거(上細下巨) 형태라 하는데 혈은 가장 넓은 부분에 자리한다.
윤관 장군 묘는 혈심(穴心) 보다 약간 위에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넓은 양 선익(蟬翼) 끝이 아니라 그 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혈 앞 순전(脣氈)이나 하수사(下水砂) 등은 너무 많은 인공적인 조장을 했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묘 아래로 길게 뻗은 능선 또한 자연 상태를 알 수 없어 설명하기 곤란하다.
<윤관장군 碑>
청룡 백호는 여러 겹으로 감싸주면서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안산은 작고 귀하게 생긴 반월형(半月形)이다. 주변 사격은 사방(巳方)에 문필봉(文筆峰), 오방(午方)에 옥녀봉(玉女峰), 정방(丁方)에 거문성(巨門星), 유방(酉方)에 천마사(天馬砂), 신방(辛方)에 문필봉(文筆峰)등이 수려하게 있어 보국(保局) 안에 장엄한 기운이 감돌게 한다.
그러나 이곳도 흠은 있다. 명당은 평탄하나 원만하지 않고, 명당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은 혈을 감싸주지 못하고 반배(反背)하였다. 안산은 똑바로 혈과 조응하지 못하고 약간 비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용과 혈은 좋으나 주변 산이나 물이 완벽하게 보호를 못해준다. 이러한 곳은 똑똑한 인물은 나오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가 있어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윤관 장군 생애와 비슷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답사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묘 자리도 살아 생전 그 주인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덕을 쌓지 않으면 절대로 명당에 못 들어간다고 강조한 것 같다.
들판의 물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꼭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 나가는 파구를 정미(丁未) 방향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좌측 용미리 쪽에서 나와 우측 광탄 쪽으로 흐른다. 물은 반드시 산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문인과 무인들의 石物>
파구는 경유(庚酉) 방향이며 좌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여 문고소수(文庫消水)에 해당된다. 문고소수 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총명수재하고 문장이 특출하여 부귀상전(富貴雙全)하는 길향(吉向)이다. 그러나 혈이 아닌 곳에서는 이 향을 놓으면 음탕하지 않으면 바로 패절(敗絶)한다 했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향이기도 하다.
4 . 산송문제山訟問題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시달은 신라 진성왕 때에 태어나 고려 광종때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파평 윤씨는 조선에 相臣 11명, 대제학 1명, 문과급제자 330명을 배출하여 조선사에 끼친 윤씨의 활동과 그 영향은 컸다고 할 수 있다.
파평윤씨가 명문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윤관 장군 묘의 음덕(蔭德)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묘도 시련이 있었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65년)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 당하고 귀양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 하자 이 사실을 안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平葬)을 하였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100년이 흘렀다.
<尹侍中轎子塚>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지를 섰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약100년이 지난 후인 영조(제21대 왕 재위기간 1724-1776) 때 파평 윤씨 후손들은 선조인 윤관 장군 묘를 되찾았다. 그런데 묘 바로 뒤에 심지원 묘가 있어 용맥을 차단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파평 윤씨 못지 않은 청송 심씨 후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문은 다투게 되었다. 윤씨들은 윤관 장군 묘 뒤에다 담을 높이 쌓아 심지원 묘 앞을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청송 심씨들은 담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산송(山訟)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해방후 무려 세번씩이나 심 정승 묘를 굴파하면서 까지 끝내 옮기지 못하였는데 예로부터 그 많은 산송중에 몇 백년을 두고 대를 이어 산송한 것은 沈氏 .尹氏 양성이 가장 대표라하겠다.
<尹侍中戰馬塚'>
5 . 윤관 장군과 전해오는 이야기
윤관 장군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일찍이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 일곱 살 되던 해는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다음 1104년 2월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麗忠祠>
윤관은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 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이같이 기세 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麗忠祠>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윤관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부하인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이를 완전히 패주(敗走)시켰다. 그는 개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고려 文肅公 神道碑>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회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 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고려 文肅公 神道碑>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슬히 눈을 감았다.
윤관은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 받고 있다.
지금도 홍살문 오른쪽에는 두 기의 무덤인 말 무덤과 가마 무덤이 있는데 왼쪽은 '尹侍中轎子塚' 곧, 장군이 타고 다니던 평교자(平轎子)의 묘이며, 오른쪽은 '尹侍中戰馬塚' 곧, 장군이 타고 다니던 애마의 무덤이다.
세상에 수 많은 무덤이 있지만 평교자와 말의 무덤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는데, 이 곳의 두 무덤을 보니 너무 인간적이어서 경이롭고 신비하기까지 하다. (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