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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71)
쟁기를 잡은 사람(제자직의 값).......
본문 : 눅 9:57-62 (신 109)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만난 ...
세 사람과의 대화를 묶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치러야만 하는
제자직의 값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곧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사람 – 어디로 가시든지>....
첫 번째 만난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57절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환영할만 합니다.
저 같으면 두 손을 들고 반가와 할텐데 ...
왠일인지 예수님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5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한 명의 제자라도 더 아쉬운 때에...
예수님은 왜 그를 달가워하지 않으셨을까 ?
본문 57절에는 "어떤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8:19에 보면
"한 서기관"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서기관이었습니다.
서기관이 어떤 사람입니까?
서기관은 지식인이었고 지도자적인 책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체로 평온하고 안락하며
존경받는 삶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일까 ? ..
예, 당시 예수님의 지혜있는 말씀과
설득력있는 가르침......
그리고 때때로 일어나는
놀라운 이적 등을 보고
매료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실제로 당시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이 따를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장 드러나는
예수님의 인기만을 보았을 뿐......
예수님께서 지금 가고 계신 길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려고 가는
길임을 알았을 리 만무합니다.
즉 예수님은 그에게서 잘못된
동기를 보셨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을 누리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은
모험일런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 댓가가 있을 것이며,
그것은 큰 영광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생각을
이미 꿰뚫어 보셨고 그가 주님을 따를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를 따르는 길은 수치와 핍박,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수반됩니다.
그를 따르는 길은 주님 말씀대로
“머리 둘 곳이 없는” 그런 길입니다.
그 길은 결코 안전한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와 전통이
증거하는 사실입니다.
서기관이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안일함에 빠져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로지 영광만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까?
어떤 분은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에는 신
학생이나 목회자들에게 합당한 말씀이
아니겠느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예, 그렇습니다.
분명히 이 말씀은 오늘날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목회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신도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세상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는 목회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마땅히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이요,
자기 부인과 고난이 뒤따르는 길이라 해도 .....
당당히 ‘주님의 제자’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사람 – 어디로 가시든지>....
첫 번째 만난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57절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두 번째 사람 –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이어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59절a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첫 번째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말한 것에 반해....
두 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먼저
“나를 따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영광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을 보세요.
59절b “...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내가 당신을 따르기는 따르겠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가게 해 달라는 조건입니다.
이 두 번째 사람의 경우에도
얼핏보면 그에게 뭐 그리 잘못된 것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온전히 예수님만을 따라다니기 전에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대답에 대하여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60절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의 할 일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가 너무 냉정하고
그 말씀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부친의 장례는 최대의 일입니다.
세상에 제일 중하고
급한 일이 부친의 장례를 지내는 일입니다.
랍비들의 교훈에서도
죽은 친족의 장례는 거룩한 의무이며
사랑의 행동이었고.....
이생과 내생에서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으신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묵상해 보니 ...
그의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언제 죽을지 모를 만큼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
그런 상황이었다면......
임종을 지켜야지.......,
태평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게 급박한 처지였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빨리 장례를 치르고
오라고 권면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들먹거리면서 핑계를 대고 있음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들먹거리고는 있었지만 ......
사실은 그는 꼭 아버지의 건강이나
장례 치를 일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
이러저러한 세상적 관심과 인간적 염려에 사로잡혀 있어서
온전히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그 사람의 아버지가 비록 연로하거나
병약한 상태에 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예수님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
계셨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 속마음을 뻔히 들여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 첫 번째 사람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성급하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면.....
- 두 번째 사람은 너무 망설임이 많아서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러 저런 핑계로 세상에 매여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사람의 표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 – 고 3이니까...)
이러 저런 핑계로 미적거리다가...
주님의 칭찬으로부터 멀어지는 자 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하고 헌신하시는 ...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사람 – 어디로 가시든지>....
첫 번째 만난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57절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두 번째 사람 –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이어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59절a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세 번째 사람 – 내 가족을 작별하게>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는 한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그 사람 역시 예수님께로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61절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즉각적으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점에서는 첫 번째 사람과 비슷하지만.....
조건을 제시하는 점에 있어서는
두 번째 사람과 비슷합니다.
세 번째 사람이 요구한 조건은
엘리아가 엘리사를 부를 때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왕상19:19-21 읽어라>
19절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절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엘리야는 자기를 따르겠다는
엘리사에게 부모와의 작별인사를 허락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자식의 마땅한 도리가 아닙니까? .....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거절하시는 것입니까? .......
세 번째 사람의 경우에도 얼핏보면
그가 뭐 그리 잘못한 것 같이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 또한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먼저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오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는 그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반응이 오히려 너무 심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은
누구에게서나 기본적인 예의에 속하는
일일 것인데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그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로 비유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았으면 열심히 땅을 갈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뒤만 돌아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뒤를 보면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갈아야 할 땅에 서서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뒤는 왜 돌아다보겠습니까?
내가 간 땅이 얼마나 되나,....
내 앞서...
아버지가 가신 땅이 얼마나 되나 .......
그것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갈아야 할 땅.....,
내가 해야 할 일은.....
얼마나 되는지는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 번째 사람은 아마도 어느 정도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오기는 했으나
그 이상 신앙의 성장이나
삶의 변화나 헌신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열심내고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로 늘 내세우곤 한 것이 ...
"먼저 가족들과 작별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에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툭 하면.....
- 내가 집사시절에는 얼마나 일 많이 했는데,....
- 내가 청년부 때는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 우리 아버지가 이 교회 장로로 얼마나 유명했는데,....
- 우리 할머니 권사님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 우리 집안이 이 교회에서 몇 대째 교인인데......
등등 항상 입에 붙어있는 말이 옛날이야기이고,.........
막상 지금 자기는 주님의 일에 관심도 없고 맡은 직분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왕년에...).
사람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돌아다볼 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앞을 향하여
열심히 일함이 없이는.......
뒤를 돌아다보는 것만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맺는 말씀>.....
오늘 본문 속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어서 뭔가 얻으려고만 하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수고와 헌신과
봉사와 희생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쓸데없는 세상사에 마음이 묶여있는
사람입니다(아버지 장례 후에).
셋째는, 과거의 회상과 자랑에만 사로잡혀있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
어떤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합당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까?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고난과 헌신과 섬김과 희생의 삶을
각오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명령(부르심)에 미적거리지 않고
최우선순위(priority)두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지난날의 자만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을 향해 열심히 믿음의 삶을
힘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나라의
쟁기를 잡은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뒤돌아보거나.....
머뭇거리는 사람 한 사람도 없이.....
모두가 앞을 향해 열심히 일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