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자나불 상주하며 지혜와 자비 전해 앉은뱅이 전설 얽힌 ‘돗자리’ 눈길 김구 선생 기리는 기념관 경내
세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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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전경. 우측에 보이는
석탑이 원나라 라마교 영향을 받은 보물 제799호 오층석탑이며, 왼편에 우뚝 솟은 건물이 삼세불을 함께 모신
대웅보전이다. | ‘춘마곡 추갑사’는 말이 전해 질 정도로 봄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마곡사. 완연한
가을에 찾은 마곡사는 봄 풍경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태화산 일대의 소나무 숲이 이어주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 가다보면 금세 산굽이가 이어져 어느새 사찰에 닿게 된다. 굽이굽이 길에 실려 흔들려
가는 맛이 또 다른 정취를 낳는다.
마곡사는 사계절의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입구에서 내리면 산사의 호젓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마곡사 만의 장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마곡사가 위치한 절묘한 자리 덕분이기도 하다. 마곡사가 있는 곳은 태극형이라 하여 택리지에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힌다. 절을 둘러싸고 계곡물이 휘감아 돌며 천왕문 앞에서 만나 흘러내려가니 좁은 가람구조를 극복하는 탁트인 계곡으로 인해 절로 속이
시원해진다.
마곡사는 정확한 창건연대가 전해지지 않는다. 여러 설이 있지만 신라 말 보조선사 체징 스님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찰 이름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전해온다. 장곡, 마곡, 안곡 또는 삼 골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무염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절을 지을 때
은사인 마곡보철 스님을 존숭하는 뜻에서 이름했다는 설, 또 절을 짓기 전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혹은 절 중창 이후
불자들이 삼을 심은 듯 빼곡히 들어차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 내려온다.
마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폐사된 채 도둑떼들의 소굴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172년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제자 수우 스님과 함께 왕명으로
중창했다. 당시 지눌 스님이 이곳에 있던 도둑떼에게 떠나라 했으나 이들은 오히려 지눌 스님을 헤치려 했고, 스님이 도력으로 호랑이 떼를 끌어
모으니 도둑들이 혼비백산 도망쳤다고 한다.
중창 당시 가람은 지금의 곱절이 되는 크기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 60년 동안 방치됐다. 1651년 각순 스님이 대웅전 등을
중수했다.
비로자나불 자비광명 기도 이어지는 곳
마곡사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바로 가람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개천이다. 이 개울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이 별도라고 할
만한 가람 구조다. 이러한 구조는 북쪽에 위치한 비로자나불을 돋보이게 한다.
보물 제802호인 대광보전 안에 들어서면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법당 서편에 동쪽을 향한 자세로 모셔져 있다. 이런 배치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광 불갑사 대웅전에서처럼 주불인 아미타불이 서방정토를 향해 앉아 있는 방식인데, 이 곳에서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을 향해 앉아 있어
드문 예로 꼽힌다. 물이 흘러가는 곳을 바라보는 비로자나불의 그윽한 모습은 기도객들의 발길을 저절로 이끈다.
비로자나불은 진리와 광명을 상징하는 부처님이지만 특별한 설화로 인해 이 곳에서는 기도가 이어진다. 대광보전 안에는 참나무돗자리가 깔려있는데
여기는 앉은뱅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어떤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비로자나불에게 기도하기를 “참나무로 정성을 다해 자리를 짜 드리겠으니 다리를 낫게 해 주십시오.”라며
100일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하며 참나무 껍질로 정성스레 자리를 짜다보니 마침내 100일이 되었고, 그날 앉은뱅이는 자리짜기를 완성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0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30평의 자리를 짜고 나자 그의 정성에 부처님이 감복했는지 앉은뱅이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많은 이들이 아직도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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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의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대웅보전
기도가 진행되는 대광보전의 뒤로는 지붕 하나가 불쑥 솟아 보이는 전각이 있다. 바로 대웅보전이다.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중층건물로
내부는 통층으로 뚫려있다. 내부는 더욱 독특하다. 가운데의 석가모니불을 위시로 서쪽에는 아미타여래, 동쪽으로 약사여래를 모셔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삼세불이다.
이 대웅보전 안에도 역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는 요소가 있다. 손때 묻은 윤기가 자르르한 싸리나무 기둥 네 개가 그 주인공이다. 두아름
굵기의 기둥으로 팔로 안고 한바퀴를 돌면 3년씩 더 산다는 말이 전해진다.
처음에는 나무 빛깔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반들반들하다. 이 윤기는 바로 사람들이 기둥을 붙들고 돌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물어, 많이 돌았을수록 극락길이 가깝고 아예 돌지도
않았다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이 전해진다. 다른 민간속설도 전해진다. ‘싸리나무 기둥을 잡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싸리나무
기둥은 점점 허리가 잘록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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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내에 위치하고 있는
백범기념관 | 여러 종교 문화요소 곳곳에
마곡사는 기도와 함께 여러 종교의 문화 요소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어 이를 찾아보는 재미를 더한다. 보물 제 799호인 마곡사의
오층석탑은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한데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탑은 우리나라 전통양식과 달리 높은 이중기단 위에 높게 서있고,
지붕돌이 폭이 똑같다. 무엇보다 탑의 맨 윗부분에는 라마교 장식인 둥근 풍마동이 얹혀 있다. 한국과 중국, 인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탑의
네 면에는 사방불이 양각돼있다. 동서남북을 포괄해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상주한다는 메시지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으로 꼽히기도 하는 대광보전 옆의 기이한 굴뚝도 볼거리다. 가톨릭 박해 당시 가톨릭 신자들이 마곡사로 피신해
살았는데 당시 기와를 구워 흙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기거한 곳과 삭발터가 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장교 쓰치다를 황해도에서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은 잠시 마곡사에 숨어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법명이 원종이다.
마곡사에 있는 백범기념관은 김구 선생을 기리고 있다. 벽에는 김구 산생의 사진과 친필휘호가 걸려 있다. 서산 대사의 어록으로 김구 선생이
자주 쓰던 말이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김구 선생은 항상 이 말을 가슴에 담고 후세들에게 이정표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한 앉은뱅이부터 민족의 등불이 된 김구 선생의 이야기처럼 마곡사는 정진에 대한 하나의 울림을
선사한다. 수많은 화마에도 벽돌 한 장, 나무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 지금의 마곡사를 이룬 노력과 함께 현재도 끊임없이 기도를
이어가는 불자들의 모습이 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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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에서 명상길로 가는 초입의
계곡길 |
가는 길
공주에서 공주대교를 넘어 32번 국도를 따라 예산(유구) 방면으로 15.7㎞ 가면 사곡 면소재지인 호계리에 이른다. 호계리를 벗어나는 지점
오른쪽에는 5번 시도로가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8.6㎞ 가면 마곡사에 이른다. 최근에는 고속도로가 뚫려 보다 빠르게 갈 수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마곡사IC와 유구IC가 가깝다.
주변 볼거리
마곡사 주변에는 영은암, 대원암, 은적암, 백련암, 청련암, 부용암, 북가섭암 등 부속암자가 즐비해 솔바람 속의 백범 명상길과 함께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곡사 백범 명상길은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며 산책하던 길로 3개 코스의 명상길을 다듬어 내방객들에 인기를
끌고 있다.
△ 제1코스 ‘백범 명상길’ (3km) : 마곡사(백범식수 자리) - 김구 선생 삭발바위 -
군왕대(기 체험장) -
마곡사 △ 제2코스 ‘명상 산책길’ (5km) : 마곡사 - 천연송림욕장 - 은적암 - 백련암 -
활인봉 -생골마을(약초마을) -
마곡사 △ 제3코스 ‘송림숲길’ (11km) : 마곡사 - 천연송림욕장 - 은적암- 백련암 - 아들바위 - 나발봉(황토숲길) -
전통불교문화원 - 다비식장(죽음 체험장) - 장군샘(옻샘) - 군왕대 - 마곡사
명상길에 있는 군왕대는 마곡사에서 기가 가장 강한 곳으로 군왕이 나올 만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말기 몰래 무덤도 많이 썼는데 이후 유골을
모두 파내고 지금은 돌과 흙으로 채웠다.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세조가 마곡사에 왔을 때 이 군왕대에 올라 “내가 비록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
첫댓글 대웅보전의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의 명칭을세불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명칭이라 생각합니다.세불입니까 아미타불이 과거불이고 약사불이 어떻게 미래불입니까 세불은 이를 두고 이르는 용어이지 집>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논란이 있지요. _()_
이 부처님이 어떻게
과거불은 연등불 혹은 정광불이요 미래불은 미륵불입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제부턴가 이 잘못된 용어가 돌아다니고 있네요.
마곡사에서 김구선생이 늘 호념하여 썼다는 시는 서산대사의 시라고 하기도 하고 이양현의 시라고도 하는데
그 유명한 시가 서사대사의 <청
()()()
위의세불이란 표현은 잘못된 용어이고 아직 이에 적합한 용어가 없는 실정입니다.존불'이라는 _()_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약사여래를 모신 것은 아미타불 서방 정토신행과
중생들의 병고를 치유하는 동방 약사여래를 신행하고자 모신 부처님이기에 '신행
용어가 적합치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곡사 갔다가 신원사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