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weet home- 조수미
Lo mucho que te quiero(The more I love you)- Rene & Rene
Whispering hope- Mary Duff & Daniel O’Donnell
- My old Kentucky home- Jennifer Ivester
나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이 힘들어도 참을 수 있는 건 언제든 내가 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엔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나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과 다정한 형제 자매들이 있고, 항상 고단한 나의 몸 편히 뉘일 곳이기 때문이다. 해서리 즐거운 나의 집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따뜻하고 나의 모든 것을 품어주고 사랑해 주는 곳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영국의 비숍(Henry R. Bishop)이 작곡한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 감미로운 멜로디에 더해 뒷날 다른 사람들이 붙인 아름다운 가사로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지만, 막상 비숍 자신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가족의 따스한 삶은 느끼지 못했다는데...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가족간의 사랑이라 하지만 비숍처럼 아예 겪어보지 못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뜻하지 않은 조건으로 가족간의 사랑은 커녕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게 인생이다.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변신』(전영애 역, 민음사, 1998)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온몸으로 가족을 부양하다 어느 날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면서 '즐거운 나의 집'에서 저주스런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어느 세일즈맨의 이야기를 기술한 것인데...이 소설에서 보면 모든 것을 다 줄 듯 이타적인 듯 사랑하는 가족애도 그 이면을 파헤쳐 들어가 보면 호혜(互惠)의 법칙이 정글의 법칙과 다름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의류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는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자신도 갑작스런 일에 당황하지만 가족들의 난감해 하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데...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진 빚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에 그저 직장에 목을 멜 수밖에 없지만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누이만큼은 반드시 음악학교에 보내고 싶어했었던 그였다. 오빠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누이도 벌레로 변신한 오빠를 불쌍히 여기고 음식을 갖다 주는 등 갖은 사랑을 베풀었다.
하지만 긴 병에 효자 없고 도움 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끝없는 사랑을 줄 수만은 없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 마침내 부모님과 누이는 어떻게든 흉측한 벌레를 치워버리려고 획책하고, 이를 안 그레고르는 가족을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삶을 마감하고 남은 가족들은 모처럼의 외출로 그레고르의 사라짐을 자축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나는데...
그렇다. 무한한 사랑으로 다져진 가족애는 그 어떤 물리력으로도 자를 수 없다? 그딴 소리 개나 줘 버리라지. 우리네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음은 각자가 가진 개성에 더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살기 위해 켜켜이 쌓아온 이기심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러하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거기엔 기본적으로 저 깊은 곳에 호혜의 원칙이 작용하는 바, 영원히 나를 위해 가족이 이해해 주고 희생해 주리란 기대는 아예 말아야 할지니, 작금의 가족간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사건들이 이를 시사해 주는 것이리라.
에궁! 나 혼자 아무리 용을 써 본들 변하는 게 무에 있으랴. 깊어가는 이 밤 현실은 그렇지 않으나 나의 맘 속엔 언제나 그리운 '우리집'을 그리며 노래 몇 곡 들어본다. 그러고 봉게 오늘이 카프카 서거 100주년이 되는 날이구만 그랴. 그래, 피를 나눈 가족만큼은 절대 버릴 순 없단 게 아니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카프카는 우리보단 한참 먼저 설파한 듯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