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8일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아빠의 사정(事情)
나는 아빠보다는 엄마와 가까운 딸이었다. 엄마의 사정을 더 많이 듣고, 엄마의 눈물을 더 많이 보고 자란 나는 엄마 편에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쉬웠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빠는 평소에는 좀처럼 말이 없는 편인데다가 큰 눈에 힘이라도 주고 바라볼 때면 괜히 움찔하게 되었던, 조금은 무섭고 어려웠던 존재였다. 아빠는 사람을 좋아했고 술도 좋아했다. 한잔하고 들어오시는 날은 무슨 말이 그리 많으신지.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어린 나에게 아빠의 그런 모습은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끔 눈물을 보이시는 날도 있었는데 그건 정말 싫었다. 아빠가 왜 그럴까 궁금하기보다 저러지 않으면 좋겠다가 먼저였다. 엄마의 눈물 앞에서는 언제나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 헤아리며 함께 울었는데, 아빠의 눈물은 참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눈물에 가까이 갈수록 아빠를 향한 판단이 쉬웠던 것 같다.
엄마가 빚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다니시던 회사 상황이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월급을 받는 것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엄마도 쉬지 않고 일하며 생활을 이어갔지만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때마침 엄마 주변을 맴돌며 돈을 쉽게 부풀려 주겠다는 지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아빠와 상의 없이 돈을 빌렸다. 조금만 빌리면 금방 갚을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단다. 하지만 웬걸.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던 사람은 사라졌고, 갚아야 할 돈은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때도 눈물 섞인 엄마의 사정을 들으며 나는 같이 울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엄마는 지금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며 엄마의 빚을 갚기 위해 아빠 몰래 어떻게든 엄마를 도왔다. 그러나 엄마의 사정은 돌고 돌아 아빠에게 전해졌고, 아빠는 엄마를 보는 것이 힘들다고 하셨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남편인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 엄마는 빚 때문에, 아빠는 엄마 때문에, 나는 그 사이에서 힘들었다. 그즈음 안부를 묻는 친한 친구에게 집안일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친구가 한 말에 나는 멍했다.
“아빠가 너무 힘드시겠다.”
“응? 아빠?”
엄마가 아닌 아빠가. 아빠가 많이 힘드시겠다는 말이 나에게 이토록 낯선 것이었다니. 그래. 아빠도 많이 놀라고 힘드시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아빠에게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대며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던 엄마가 더 힘들어 보였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무조건 용서하고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았다. 아빠의 이야기는 들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예순다섯, 정년(停年)을 훌쩍 넘긴 아빠는 아직도 생산, 관리 업무를 마다하지 않고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계신다. 회사 사장도 아닌데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다. 아랫사람 윗사람 눈치 보며 일하는 게 힘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면서도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게 어디냐며 고마운 일이라 하신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친정에 다녀오는데 아빠 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일부러 아빠 계시는 시간에 맞춰 간다고 가도 아빠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에나 거나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아이들 보고 싶다고 하더니 이제야 와요? 또 한잔하셨네. 이런 날이라도 좀 일찍 오지.”
엄마의 볼멘소리에 아빠는 얼굴을 붉힌다. 불편함과 긴장감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나 몰라라 하며 나올 수도, 괜찮은 척 방긋 웃는 얼굴로 아빠를 대할 수도 없는 시간. 이번에도 내 마음은 엄마 편이다. 엄마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아니, 보고 싶다면서 이제 오시면 어쩌나. 힘드시다면서 술은 또 왜 드실까. 이러시면서 자주 안 온다고 섭섭해하시면 어쩌라는 건가.’ 그래도 애써 참고 아빠 앞에 앉는다. 잠깐이라도 아빠 이야기를 듣는다. 회사일이 너무 많다. 너무 힘들다. 너무 힘들어서 한잔했다.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 어쩌겠냐.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술에 취한 아빠의 레퍼토리다. ‘오늘도 한잔 아니고 많이 드셨네. 몸 생각도 좀 하시지. 엄마도 그렇게 먹지 말라는데, 병원에서도 먹지 말라는데 왜 저렇게 드실까.’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아빠의 이야기는 흘려보내고 내 생각들로 나를 채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푸념을 쏟아냈다.
“아빠 진짜 왜 그러실까? 힘드시다면서 맨날 술이야.”
“아버지도 힘드셔서 그런 거야. 얼마나 힘드시겠어. 오죽하면 그러시겠어.”
“힘드시면 집에 와서 쉬어야지. 술 마시면 안 힘드냐? 병원에서도 먹지 말라는데 맨날 드신다잖아.”
아빠가 힘드시니까 그럴 수 있다는 남편의 말에 발끈했다. 아빠가 된 남편은 아빠의 사정을 아는 걸까. 남편은 한참 동안 아빠가 회사에서, 집에서 얼마나 힘드실 수 있는지를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빠의 이야기는 흘려보냈는데, 남편이 짐작하며 전하는 아빠의 사정은 가만히 들어 본다. ‘그래. 그럴 수 있는 거구나. 힘든데 술은 왜 마셔가 아니라 힘드니까 술을 마실 수도 있는 거구나.’ 듣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아빠의 사정은 아빠에게 들어야 하는데….
아빠는 오늘도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신다. 엄마랑 둘이 있는 건 적적하니 아들딸, 손주, 며느리, 사위 모두 오면 좋겠다고 하신다. 아들이랑 사위랑 소주 한잔하고 싶다고 하신다. 술기운에라도 아빠 이야기를 술술 하고 싶으신가 보다. 건방진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은 꾹 참고 아빠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아빠의 사정을 알게 되겠지. 아빠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실까. 아빠가 오죽하면 그러실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고 듣고 그렇게 아빠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늦기 전에.
첫댓글 공감 200%예요... 샘 ㅠ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 옆에 가서 아버지 얘길 들으려 거의 노력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많이 후회됐어요. ㅠㅠ
한 가지 사소한 수정 요청 : 세 번째 단락에서 '아빠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에나 거나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 단락의 공간배경이 친정집이라,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써야 맞는 거 같아요.
엄마를 가깝게 느끼고, 빚과 관련해서 어려웠던 일화, 노년의 직업, 친정집 방문 등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돼요, 남편과의 대화가 혜화 샘께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하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좋겠어요. 현재의 글만 봐서는 남편의 말은 왜 '가만히 들어 보게' 되는지, 듣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내용이 구체적으로 뭔지, 발끈했던 내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잘 느껴지지 않아서요. (이성적으로는 이해 돼요 😅)
사위랑 딸이랑 소주 한 잔 하시면서 대화를 시도하신다면 그 이야기도 후속으로 써 주세요!
참, 제목 너무 좋습니다👍
대부분 자식은 엄마편 아닌가요?^^ 아빠보다 엄마랑 더 많이 붙어지내니까요. 저도 그랬던 거 같아요. 오로시 엄마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식 낳고 살아보니 부모가 얼마나 힘든 건지 알겠더라고요. 그래도 아빠를 알고 이해하려면 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아이쿠, 내 이야기는 못 쓰고 혜화 샘 글에다 이러고 있네요 ㅎㅎㅎ
그 시대의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 마음이 뭉클해지네요. 저도 엄마편이었거든요. 아빠가 외롭고 힘드셨겠다 싶어요. 그러면서도 혹시 지금 나도 본이 아니게 아이들 곁에 아빠자리를 작게 하는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비슷비슷한 우리 일상이 잘 녹아있고 어떤 거창한 결론이라기 보다 작은 실천, 가능성으로 마무리 되어서 좋아요.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80대시라 또 다른 세대상이 있는 것 같네요. 아버님 그리 말씀하셔도 일하시는 것이 아직은 좋으신 거 같아 보기 좋아요^^
"오죽하면 그러실까."가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아버지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샘, 오늘 아침에 블로그에 올렸어요.
https://blog.naver.com/noworry21/223127898014
올리면서 다시 꼼꼼히 읽어보니, '아빠'라는 단어, 때로 '엄마'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와서 가능한 뺐어요. 문장상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문장성분상 필요한 주어, 목적어여도 최대한 생략해야 될 거 같아요.
게다가 된소리 ㅃ이 들어가는 단어이다보니, 글로 읽는데도 불편하더라고요.
친구와 대화를 인용하신 부분 앞에 나온 "나는 멍했다"에서 대화를 들은 뒤에, 독자가 멍한 느낌이 들어야 멍한 감정이 잘 전달될 거 같아요.
힘드신데도 술만 드시는 우리네 아빠들.
다시 읽으면서도 저희 아버지가 겹쳐져서 가슴이 아픕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