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끄신 하느님, 나의 신앙 여정(1-3)
<진리를 찾아 해매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서점을 찾아갔다. 결혼 후 10 년 가까이 책이라곤 전혀 들여다보지 않고 살다가 모처럼만에 구입한 책이 심령과학서적들이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 ‘사후 세계’, ‘영계 여행’ 같은 것이었다. 꽤 재미있었다. 이런 종류의 책 읽기는 얼마가지 않아 중단 되었는데 그것은 두 사람 즉, 친정아버지와 동서의 충고 때문이었다.
“쯧쯧쯧 ! 어리석은 것.”
한번 읽어보시라고 갖다 드린 책을 펼쳐보시더니 아버지는 나를 나무라셨다. “죽음 이후의 문제는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 알고 있다 해도 설명 할 수 없는 것이다. 참선하는 스님 중에서도 무엇이 보인다고 하고, 영계를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이들이 있는데 수도의 길에서 정도(正道 )를 벗어나는 것으로 심히 경계하는 것이다. 이런 책에 흥미 갖지 말거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
북아현동에 신혼살림을 차린 시동생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갔었다. 무더운 날씨에 집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서늘한 그늘을 찾아 동서와 함께 버스로 두 정거 거리에 있는 그녀의 모교이며 나의 모교이기도 한 학교로 산책을 갔다. 녹음이 우거진 캠퍼스는 마침 방학 중이라 조용하기 짝이 없었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만 어지러이 들렸다. 그 날 나는 개신교 신자인 그녀에게 여러 가지 궁금했던 것을 많이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를 빛나는 얼굴로 말 해 주었다. 그녀의 눈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훨씬 높고 훨씬 깊은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지막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형님, 그런 책 보지 마세요. 이젠 성서를 읽으세요.”
내가 죽음 저 너머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은 심령과학 서적을 읽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했던 복이 저 세상에서는 오빠의 것이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나는 오빠가 거주 했던 아현동 집으로 가서 오빠가 남겨 둔 책들을 싸가지고 왔다. 책들을 싸면서 왜 오빠가 살아 있을 때 오빠의 신앙을 이해 해 보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지나간 학생시절에도 오빠의 권유로 한두 권의 서적을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오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참 좋았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재미가 없었다. 그 때로부터 15년도 더 지난 날, 대 가족 큰 살림살이에 파묻혀 미장원에 비치된 월간 여성잡지를 펼쳐 본 것을 제외하고는 독서와 담을 쌓고 지내던 내가 그 옛 날 팽개쳐 버렸던 책들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이다.
오빠의 책장에는 ‘종교의 근본 문제’, '동서의 피안', ‘억만 인의 신앙’, ‘교부들의 신앙’,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등 다수의 책이 있었다. 한번 책을 잡기 시작하자 잠시도 앉아 볼 틈도 없는 바쁜 나날이었지만 밤을 새다시피 하여 독서에 몰입했다. 그 딱딱하고 두꺼운 책들을 짧은 시일에 다 읽었다. 초보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영혼의 성’ ‘완덕의 길’ ‘갈멜의 산길’ 같은 책도 읽었다. 오빠의 책 외에도 명동에 있는 성바오로 서원에 수시로 가서 책들을 사드렸다. 나만 읽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책을 선물했다. 성서는 4복음서를 소설책 읽듯 읽어 내려갔다.
이러는 동안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자면서도 각성상태가 유지되어 전 날 읽은 책들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어떤 신비한 힘이 나를 사로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혼을 하여 육아와 가사에 파묻혀 사고도 무뎌지고 정서도 메말라 있던 내 마음 속에서 불꽃 하나가 살아나더니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고 감정이 고양되어갔다. 가족들도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성당을 나가지는 못 하고 있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민속신앙에 젖어계신 시부모님께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말씀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빠의 죽음 후 내 안에서 일어난 영혼의 변화를 설명 드릴 재간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맴돌고 있는 일상의 쳇바퀴, 그 원심력보다 더 강한 어떤 힘이 작용하여 나를 밖으로 튕겨나가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주일날,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성당을 찾아 갔다. 미사 중이었는데 수녀님께 인사하고 오늘 처음 온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다.
<신림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다>
불타는 마음으로 보냈던 예비자 시절은 내 신앙생활 통 털어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였다. 성당을 오고 가며 나는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신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골목길을 걸었다. 드디어 79년 6월2일에 신림동 성당(현 서원동 성당)에서 ‘김득권 굴리엘모’ 신부님으로부터 ‘아가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남편도 내가 읽은 책들을 읽어봤으면 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나도 과거에 그랬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박도식 신부님의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는 초보자라도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책을 건네 보았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바오로 서원에서 카세트 테이프로 된 것을 구입하여 어느 날 둘이 있을 때 틀어 놓았다. 남편이 조용히 듣고 있기에 “끌까요?” 하고 넌지시 물어 보니 의외로 “아니, 끄지 마.” 하는 것이었다.
이 때 마음이 열린 남편은 1년 후인 80년 6월 15일에 ‘스테파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수 십 권의 책을 읽은 후에야 성당을 찾았는데 남편은 카세트 테이프 한 번 듣고 결심한 것이었다. 박도식 신부님의 테이프 덕도 보았겠지만, 환경이 다른 집으로 와서 고생하면서도 말없이 살아준 것을 늘 미안 해 하던 남편이 아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리고 시부모님은 아들이 며느리를 따라 성당에 갔으니 그들이 믿는 신과 당신이 섬기는 신이 서로 싸우면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2년 후에 세례를 받으셨다. 그 후로 시어머님은 교리와 성서말씀도 잘 모르셨지만 칠성님을 섬기시던 그 정성으로 새벽마다 성모상에 촛불을 밝히시고 묵주 알을 굴리며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거르지 않으셨다. 시누이 둘도 부모님의 뒤를 이어 가톨릭 신자가 됐고, 하나는 교우 신랑을 만나 결혼 했다. 우리 아이들 세 남매가 성당에 가서 영세하고 주일학교에 다닌 것은 물론이었다.
그때쯤에는 친정에서도 큰오빠 내외와 조카들, 큰 언니와 작은 언니 모두가 동시다발 적으로 성당에 나갔다. 친정 부모님은 가장 늦게 세례를 받으셨다. 작은 오빠가 세상을 뜬 후 3, 4년 안에 있었던 일이었다.
오빠는 18년 동안 병인(病人)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식구들에게 성당에 나가란 말을 하지 않았었다. 한자리에서 정물(靜物)처럼 누워만 있다 간 오빠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틀림없이 오빠는 살아 있던 그 긴 세월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쳤을 것이고, 죽어서는 천상에서 기도로써 우리를 돕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밖에는 우리 집안에 일어난 이 기적 같은 일을 설명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