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
전화 한 통
전국적으로 내리는 장맛비다. 멀리 있는 자식놈들이야 다들 잘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안 해서 문제지. 빠릿빠릿하지 못할 것도 없는 젊은이들이니 다 잘하겠지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구순이 낼모레인 장인어른은 못내 걱정스럽다. 비 내리는 창밖을 멀거니 쳐다보며 별의별 상념에 잠기시리라. 혼자라서 더 우울할 텐데. 말 한마디 않아도 목이 메는 숱한 날들이 있었을 텐데.
“니네 상추 아직 남았나?” 고마운 전화다. 장인어른은 상추를 핑계 삼아 막내딸과 사위의 안부를 물으신다. 집 앞 마트에 가면 흔해 빠진 3,000원짜리 상추를 찾으신다. 우산을 펴 들고 비닐하우스로 달려간다. 상추대 위에 손가락을 끼우고 아래로 힘주어 훑는다. 이 장마를 뚫고 호남고속도로를 달려야 할 이유가 생겼다. 보쌈을 맛나게 드신다. 식성이 좋으시니 건강하신 게다. 서둘러 가을상추 씨를 뿌려야겠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다. 12시간 이상 쉬지 않고 뿌리던 장맛비가 잠시 멈췄다. 많이 내렸겠다 싶지만, 수치로 가늠되지 않는다. 피아골 계곡에서 측정된 218mm의 강수량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최대치다. 구례는 산이 높아 계곡이 깊고, 천이 넓으며 큰강 섬진이 있어 홍수로 잠기는 일은 드물겠지만, 산사태는 염려된다. 큰일이 없어야 할 텐데.
빗속의 텃밭이 궁금하다. 고랑은 다른 때보다 깊이 팠고, 물길 따라 잡초도 제거했다. 두둑이 쓸려 내릴 것을 대비해서 북주기를 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맨발에 장화를 신고 고랑 앞에 선다. 도대체 장마를 대비해서 뭔 짓을 한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 고랑 안쪽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고인 물 위로 녹색의 잡초들이 꼿꼿이 섰다. 고인 물은 퍼내야 하는가.
질퍽한 고랑을 걷는다. 몸무게만큼 빠진 장화는 갯벌처럼 물고 늘어진다. 한 발 내딛기가 조심스럽다. 이러다 철퍼덕 넘어지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열매가 궁금해진다. 참외는 아들 줄기에서 순을 친 손자 줄기에 달린다. 아기 주먹보다 큰놈 2개를 확인한다. 이 비 그치면 혹시나 노란색이라도 비치려나. 예닐곱 걸음으로 호박 덩굴을 살핀다. 여기도 저기도 탐스럽게 달린 호박들이 예쁘다. 아니 아직 어려서 더 예쁜가 싶은 생각이 든다. “새끼는 다 예쁘고 귀엽다.”라는 진리를 모르는 바도 아닌데 기꺼이 확인까지 하고팠던 것은 노파심일까? 내 손으로 씨 뿌리고 물주며 키운 생물에 대한 애정인가?
텃밭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줄기는 갑작스럽다. 다시 시작하려나 보다. 고랑에 물이 빠지기도 전에 또 흘러들어 고이겠다. “얘들아! 고인 물만큼이나 사랑도 듬뿍 주마. 힘내라.” 이 비 그치면 너희 호박, 토마토, 참외를 챙겨 호남고속도로를 또 달리고 싶다.
첫댓글 양쪽 통 털어 두분 살아계시니 가신 세분이 그리울때마다 호남고속을 타시구려
노노노 장인 장모님 모두 계시지.
건강하신 장인어른이 최고지.
야꼬 말따로 생각따로 내가 와일치
나이가 나이니까...
그대도 보통 나이는 아니여. 중늙은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