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 사람이오 (1636)
귀도 레니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는 볼로냐의 음악가 집안 출신이었던
다니엘레 레니(Daniele Reni)와 기네브라 데 포치(Ginevra de Pozzi) 사이에서
태어나 9살이 되던 해에 칼베르트(Denis Calvaert)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다.
얼마 후에 알바니(Francesco Albani)와 도메니치노(Domenishino)가 화실에
합류하게 되고, 레니가 12살이 되었을 무렵에 칼베르트의 제자 3명은
루도비코 카라치(Ludovico Carracci)와 함께
칼베르트 화실과 경쟁 관계였던 진보적인 아카데미를 연다.
그들은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를 추종했던 볼로냐의 화가들을 위해
훌륭하고 성공적인 미술 아카데미의 토대를 마련한다.
1601년이 저물어가던 시기에 레니와 알바니는 로마로 가서
안니발레 카라치가 맡은 파르네세 궁전의 프레스코 장식에 참여한다.
1601년에서 1604년까지 그의 대표적인 후원자는
스폰드라티 추기경(Paolo Emilio Sfondrati, 1560-1618))이었고,
1604-05년에는 알도브란디니 추기경(Pietro Aldobrandini, 1571-1621)으로부터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을 주문받게 된다.
그는 볼로냐와 로마를 오가며 교황 바오로 5세(Pope Paul V, 1605-21년 재임)가
교회를 이끄는 동안 제2의 라파엘로라 불리며 첫째가는 화가로 인정받게 된다.
그는 1607년에서 1614년까지 보르게세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고,
그 후 여러 번 로마와 나폴리에서 초대받았으나
그 외에는 평생 볼로냐에서 활약하며 볼로냐 절충주의 화파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1613년에 로스피리오시의 천장화 <오로라>를 비롯하여
장식 프레스코를 그릴 때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고전주의적 경향을 나타냈으나,
차차 기교의 과시와 세련됨을 뽐내며 독특한 구성과 연극적인 묘사가 많아졌다.
그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물들의 인체, 명쾌한 윤곽, 균형 있는 구도는
사람들을 가톨릭교회로 이끄는 가톨릭종교개혁의 정신과 부합되어
<자, 이 사람이오> 같은 신앙 도상의 새로운 정형을 만들었다.
또한 그의 풍부한 색채감각과 부드러운 분위기는
그를 이탈리아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로 만들었다.
그가 1636년경에 그린 <자, 이 사람이오>는 요한복음 19장 1-5절이 그 배경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빌라도가 다시 나와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1-5)
화가들은 채찍을 맞고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옷을 입고 법정에 서 있는 예수님을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보이며 “자, 이 사람이오.”하는 장면을 소재로 삼았다.
에체 호모(Ecce Homo)로 알려진 이 라틴어를 직역하면 “이 사람을 보라”이다.
레니는 이 제목으로 적어도 10편 이상의 작품을 그렸고,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이 작품은 두상이다.
레니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예수님의 얼굴 형태를 만들면서도
연극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를 탁월하게 연출했다.
총독의 군사들이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마태 27,27-30)
예수님은 옷이 벗겨지고 어깨에는 진홍색 외투를 살짝 걸쳤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쓴 채 피를 흘리고 계신다.
그분은 오른손에 조롱받으실 때 들려진 갈대를 들고 모든 것을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맡기듯이 저 높은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다.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도전에 직면했던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수 있는 감성적인 작품이 필요했고,
이는 감정을 움직이는데 적합한 바로크 미술의 발달을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