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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목공 묘지명은
진주강씨박사공파의 계용(啓庸) 중시조님이하를
계대하는 시발점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진주강씨박사공파의 모든 보책의 우두머리 규범입니다.
이는 통정공께서 살아계실 때의 기록임으로 틀림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박사공파 후손들은
이 묘지명의 기록을 전혀 오해하지 말고
바로 따라야 한다 생각합니다.
1401년 통정공(강회백)께서 양촌 권근선생께 의뢰하신
1400년 돌아가신 부친 공목공(강시)의 묘지명에 기록된
동생(강회중)의 대표적인 품계와 관직명을
<봉익대부(종2품上) 보문각 대제학>이라 하시지 않고
<가선대부(종2품下) 홍주목사>라 하셨습니다.
이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는
1392년(태조1년) 7월 관제를 새로이 제정하였고
고려시대의 자덕대부(資德大夫)에 해당하는데,
바로 조선시대의 품계이며,
<홍주목사>는 조선조에 처음 출사하신 확실한 기록임에도
묘지명 속에 출사년도 무인년(戊寅年 1398년)을 기록하시지 아니하여
결과적으로 누징불취, 고려절신등 매우 심각한 오해를 낳게 한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따라서 가선대부(종2품下) 품계가 목사(牧使 정3품) 품계보다 높으므로
<가선대부 행 홍주목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등 어디에도 홍주목사를 역임하신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최근 다음카페의 <장달수의 한국학카페>를 운영하시는 낙민 장달수 선생님으로부터
환수문화재 중 하나인 조선시대 전국의 읍지<총 74책>의 PDF자료를 보내 주셔서
다음과 같이 통계공의 숨겨졌던 미확인 행력을 확실히 밝힐 수 있게 되어,
낙민선생님의 그 고마움을 여러 현종님들과 함께 전해 올립니다.
고려사에 나타나는 통계공의 고려시대의 관직등 행력은
1390년 12월 사헌부 집의(執義 종3품)
1391년 4월 사헌부 집의에서 좌천됨
1392년 7월 12일 동생 공양왕부마 진원군 회계(淮季)가 회빈문 밖에서 참수된 이후
부친 공목공 께서 유배되시며
7월 14일 군자시 군자윤(軍資尹 종3품)이실 때 외지로 유배되셨는데
이후 직접 유사된 기록은 보이지 아니함(1393년 2월 15일 사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국(태조 등극일)
7월 28일 태조즉위교서로
형님 통정공 회백(淮伯)은 직첩의 회수및
장(杖) 1백대와 먼 외지(진양)로 유배등
우현보/이색/설장수등 56인의 결당모란의 죄라고 하며
3부자(공목공/회백/회중)의 유배를 최종 재확인
위와 같은 개국 초기 7월의 긴박한 시간성을 감안할 때,
고려조에서 통계공의 출사하신 최고(最高) 관직이
보문각 대제학(大提學 종2품 봉익대부 奉翊大夫)이라 함은 이해가 잘 안되는
다음 기회에 또 설명드릴 부분입니다.
아울러 통계공의 조선왕조실록의 조선시대 첫 출사직전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393년 2월 15일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하며 은전(恩典)의 교지를 내림
홍무(洪武)26년(1393) 2월 15일 새벽이전의
이죄(二罪)이하의 죄는 이미 발각된 것이거나
또는 이미 결정(結正)된 것이거나, 결정되지 않은 것이거나
모두 이를 사유(赦宥)해 없애버리게 한다
* 이죄(二罪 : 일죄(一罪)인 사형(死刑)의 다음가는 죄의 유형을 말함)
1397년 5월 29일 전 상의문하부사 강시를 서울에 살라는 명령으로
공목공께서 대궐에 나와 숙배하였다 했고
1398년 3월 9일 ~5월 17일 사이에 궁성감역관(宮城監役官)으로
감옥에 갇히고,태형,유배등 고생하시다 풀리시는데
바로 얼마 안되어 1398년 하반기중 <홍주목사>로 부임하시고
그에 따른 어떤 특별하신 연유가 매우 궁금하오나 알 수 없으며
1400년 다음 부임자가 부임하는 해까지의 기록이
여기 홍주지(洪州誌)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직전년도(1399년 통정공께서 모친상중에 계림부윤으로 기복출사 하심)
모친 진주하씨께서도 돌아가셨고
부친 공목공께서 돌아가시는 해(1400년 11월 26일)까지
<홍주목사>의 관직기간은 3년에 걸쳐 나타나나
양친의 상중(喪中) 기간임에 시묘살이
또는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노환으로 위중하시매
그 당시의 충(忠)보다 효(孝)를 중시하는 시대적 풍조를 따르게 되면
아마도 모친의 시묘나 부친의 간병의 효(孝)를 실천하시고자 하여
중간에 이미 사임하셨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위 공목공 묘지명을 쓰실 때(1401년)에는
바로 1398년 부임후 최근까지 <홍주목사>를 역임하신 사실로서
통정공께서 동생에 대한 특별하신 기억이므로 틀림이 있을 수 없고
시기적으로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아주 최최근의 기록임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과거 우리 강문의 <누징 불취>를 강조하며 <고려절신 보문각대제학>이셨다는
주장(묘갈등 각종 비석의 글)이
바로 이 <공목공 묘지명>의 올바른 해석만으로도
뒤엎어 질 수 있게 되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즉 과거엔 굳이 <홍주목사>가 조선조의 출사였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말씀을 외면하거나 그냥 넘기셨다는 것이죠~!
마치 <홍주목사>라는 관직도 고려조의 관직처럼 오해시키셨다는
결과적 의미로 말입니다.
<1400년대 초기의 조선왕조에 출사한 가족들>
맏아들 강안수(姜安壽 : ? ~ ? )
1401(태종1년) 제용고 주부 : 공목공묘지명
1415. 8. 2 풍저창사 파직 : 조선왕조실록
? 통훈대부 예빈시 소윤 : 족보
사돈(안수의 장인) 홍서(洪恕 : ? ~ 1418) 고려말 대호군, 부친 홍사범 고려의 재상
1400.12.22 우군동지총제
1401. 1. 5 좌명공신 4등 <시호 남성군>
1402. 2.12 전라도 병마절제사 사직 <시호 남양군>
1407. 6.28 명(明)나라 사은사 <시호 강양군>
본 홍주지의 환적읍선생에 첫기록은 지정17년 정유년
즉 1357년에 부임하는 목사 홍의룡과 판관 이유로부터 시작합니다.
부임기간은 대개 1~2년씩이나
어떤 때는 1년에 2사람도 번갈아 부임하기도 한 기록도 보입니다.
강회중(姜淮仲) 무인(戊寅1398)년 이라, 홍주목사로 부임하신 기록이
우측하단 두번째의 기록으로 보이며,
다음으로 건문 경진(庚辰 1400)년 부임하는 민계생(閔繼生)이니,
그 사이 약 2년정도 홍주목사를 역임하셨다 할 수 있으나,
아마도 모친 진주하씨께서 (1399년 기록 없슴) 돌아가셔서 목사 관직에서 파하셨거나
부친 공목공께서 1400년 11월 26일 돌아가시니 그 전 병환중일 때에
그만 두셨을 것으로 사료되어
따라서 최소한 1398년에서 모친의 상(1年喪)을 당하실 때(1399년)까지는
홍주목사를 역임하셨을거라고 추정합니다.
또한 형님(회백)께서도 겹쳐지는 가문의 우환속에 시묘살이로
효(孝)를 실천하시던 중이셨습니다.
1399년 겨울(10월~12월) 己卯冬 起爲正憲 出尹鷄林<공목공묘지명>
모친 상중(1年喪)에 기복출사(起復出仕)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계림윤(鷄林尹)
즉 경주부윤(慶州府尹)
1400년 가을(7월~9월) 庚辰秋 東北面都巡聞問使<공목공묘지명>
(실록 : 졸기 경진년) 정헌대부(正憲大夫)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1402년 7월 22일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겸 경상도도관찰출척사
(慶尙道都觀察黜陟使) 탈정기복(奪情起復)
7월 28일 상중이므로 관직 사양하여 태종께서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허락
1402년 11월 19일 몸이 상하셔 부친상(3年喪)을 마치시지 못하고
향년 46세로 돌아가시니
마침내 통계공께서는 가문의 구심점으로 남게 되셨기에 모든 외로움을 이겨내고
조선왕조에 계속 출사 하셨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한동안 공백기간을 두시다가 조선왕조실록의 본격적인 출사기록은
고려조의 품계(종3품)에 이어서
1407년 10월 3일 사간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 정3품上)
1412년 1월 25일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 정3품)
1415년 10월 18일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정3품)로
중국에 하례차 다녀 오십니다. (이하 생략)
위의 홍주지(洪州誌)의 기록은 아래와 같은 인물이
위 왼쪽으로부터 다섯번째 나오는 홍주목사 우홍강과
판관 이종직의 왕조실록기록과 일치하는 면으로 볼 때
시대적 오류가 없음이 증명되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이상과 같이 뜻밖의 홍주지(洪州誌)의 기록을 발견하고
아주 새로운 흥분을 감출 수 없이 며칠을 보내면서
이는 통계공의 행력 수정에 아주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우리 강문에서 남한보이래 모든 족보와
신도비등 묘갈과 실기 ,유사등으로 전해져 온
고려절신과 <3징불취등 누징불취>라는
믿고 싶었던 허구라는 것을 기회에 또다시 되새겨 보고
이를 반드시 수정하므로써
바른 기록으로 후세에 전(傳)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은 참고로 공청도감영지(공주목읍지는 따로 있슴)와 청영영지(청주 淸州)를 보여 드립니다.
옛날에는 충청도의 지명이
고려시대 양광도/ 조선시대 충공도/충홍도/청공도/청홍도/공충도/공청도/공홍도/
홍충도/홍청도 등 여러번 바뀜니다.
도관찰사(都觀察使)가 상주하여 있는 감영이
조선조 초기에는 충주(忠州)에 있었다 하며
임진왜란이 지난 뒤 17세기 초부터 공주(公州)로 옮겼나 봅니다.
관찰사/중군/도사/ 그리고 목사/부사/군수/판관/현령/현감/찰방등의
관원수와 품계등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충청도의 목사(牧使 정3품)는 4員인데, 충주,청주,홍주의 3목을 말하고 있고
또 1목은 공주를 말하는데,
1員 관찰사겸이라는 것은
감영이 있는 공주목의 목사를 도관찰사가 겸직하는 것을 말합니다
[ 즉 충주,청주,홍주의 3목사도 관찰사를 겸했다는
아래와 같은 저의 도관찰사 해석은 잘못되었슴을 부기합니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엔 충청도관찰사라함은 <3곳의 목사도 관찰사를 겸하며>
<관찰사중에서도 으뜸인> 도관찰사(都觀察使 종2품)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장남 통정공께서 말씀하신
3형제를 지칭하는 자경시(自慶詩 : 스스로 경축하다)에서
具慶堂前白日長(구경당전백일장) : 부모를 모신 집안에 해가 밝으니
<당상에는 양친이 계시는데 장수하시고>
一家三子桂花春(일가삼자계화춘) : 한집안 세 아들 계화는 향기로워
<한 집안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네>
鴻樞觀察俱淸選(홍추관찰구청선) : 홍추와 관찰은 다 높은 벼슬에다
<형은 중추부 아우는 관찰사 모두 청관이고>
季也分茅又晉陽(계야분모우진양) : 또 막내 아우가 진원군에 봉해졌다네
<막내아우 봉읍 받아 진양군이 되었네>
구경(具慶 : 양친이 다 생존하여 계심)
계화향(桂花香 : 과거에 급제함을 이름, 3형제 문과급제 1376회백/1382회중/1389회계)
그리고 홍추(鴻樞 1389 광정대부<정2품> 판밀직사사<종2품>겸 이조판서 통정)와
관찰(觀察 1398 가선대부<종2품下> 홍주목사<정3품> 통계) 및
진원군(駙馬 1390 부마 회계)이 나왔다라는
해석(부한세적 강희설편)과 <진산세고 국역>이 번뜩스치며
"아하! 자경시도 양친 두분께서 살아계실 이 때(1398년) 쓰셨구나" 하고
감탄스레 유추되네요.
통계공께서는 충청도관찰사(당시 명칭 : 도관찰출척사)를 역임하신 기록이
왕조실록과 고문진보지에 나타납니다
1419년 4월 8일 공조참판(工曺參判 종2품)
1419년 12월7일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 都觀察使 종2품) : 왕조실록
1420년 10월하순 가정대부(嘉靖大夫 종2품上)
충청도 도관찰출척사(忠淸道 都觀察黜陟使) : 고문진보지
그런데 아래 공청도감영지 선생안에는
1414년 최초 기록과 1508년 사이의 기록은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불충분하여 조금 아쉽고
통계공의 충청도관찰사 기록이 보이지 아니하지만,
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에도 <관찰사>라 기록되어 있으며,
<왕조실록>과 <고문진보지> 기록만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돌아가실 때(1421년 6월 4일)의 최종관직명은
조선왕조실록에 총제(摠制)라 되어 있으며
총제시의 소속관서명은
사가 서거정(1420 ~ 1488) 선생께서 지으신
손자 청풍군수공(淸風郡守公) 혜(徯 1424년 6월 22일 ~ 1485년 12월 22일 향년 62세)의
비음기(碑陰記)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종2품上) 중군도총제부(中軍都摠制府) 총제(摠制)라는 것인데
현존하는 자료로서는 가장 정확하고 유일한 기록입니다.
여기서도 도총제(都摠制)는 아닙니다.
중/좌/우 3군의 각 도총제 아래 여러 총제중 으뜸이 도총제이므로
통계공의 장파(맏이 쪽) 후손 세백(世白 1748 ~ 1824) 께서 지은 진종성헌(眞宗成憲)에서
통계공을 도총제부군(都摠制府君)이라 하셨는데
이 역시 한 승품(승진) 시켜드린 오류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이에 100년 앞서 통계공을 도총제(都摠制)라 하신 분이 또 계시는데
강문의 외손이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 ~1721)께서 1678년2월에 찬한
수암의 진외증조부 강수곤(姜秀崑 1555 ~ 1620) <첨정 증참판강공 수곤 행장>에
<입아조 회중 도총제(入我 朝 淮仲 都摠制)>라 하셨고
이는 그의 문집 한수재집(寒水齋集 1761간행)에 실려 있으며
<수암께서는 남의 묘도문자를 지으면서 실상보다 지나친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앞으로 행장을 서술하면서 단지 두어 줄로 사실만 기록하고 과장되게 하지 마소서>라는
그의 후손이 전하는 당부의 말씀도 있군요
통계공의 손자,증손,고손,현손 대(代)의 여러 묘갈등에서는
왕조실록과 일치하는 총제와 공조참판등의 실제(實際)가 많이 보입니다.
위의 공청도 선생안 왼쪽에서 서너번째에 있는 강사필(姜士弼)의 기록은
왕조실록의 기록과 같이
<충청도관찰사>가 아닌 <청홍도관찰사>라 되어 있어
충청도의 호칭이 변경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청주(淸州)는 관찰사와 같은 품계의 종2품 병사(兵使)/ 종3품의 우후(虞侯)가 있으며
각 진(鎭)을 총괄하는 군사중심지였나 봅니다.
다음은 2003년 7월 20일자 진주강씨중앙종보 제321호에 실린 내용을 소개합니다.
충청남도 공주시 문화원에서
2003년 6월 16일 <충청감영 공주 400년 '충청도 관찰사전'>을 개최하였는데
종보에 조선시대 8도 관찰사에 대한 각종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연재한 기사입니다.
충청도 관찰사에 대한 변천사등 자세한 설명이 첨가되어 있으며,
<고려말 ~ 조선조 500년동안 충청도 관찰사를 제수받은 선조님>이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도표화되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 도표 2번의 순번에 주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함을 밝혔음에도
1419년 휘(諱)도 없이 성(姓)만 <강>이라 표시한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사연을
당시 이 글을 올리신 前 중앙종회 종무처장
적암(赤岩) 정구(貞求 1947 문량공希孟파) 형님으로부터
문중에서 1983년 8월 출간한
<고려명신 보문각대제학 통계강선생 실기>를 비롯하여
1960년 통계공 <신도비> 신설등 근세의 각종 묘갈의 비석에
두문동72현의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을 강조하며
철저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인정치 않고
조선조에 출사하지 아니하였다는 <누징불취>의 고집스런 사조를 거스르게 되면
문중에 어려운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염려로
차마 휘(諱)를 밝히지 못하고 생략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집스런 고령의 대다수 옛어른들께서 고인(故人)이 되셨기에
그 때와는 쫌 다르다는 것도 동감(同感)이였습니다.
이 글을 감사하게 읽으신 여러분들께서도
이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실제 출사하신 기록에 맞게
위 도표 2번에 강회중(姜淮仲)이라는 휘(諱)를
당당히 써드려야 한다는 것에 동감(同感)하실 거라 믿습니다.
첫댓글 올해가 통계공 선조님께서 서거하신 지 정확히 600주년이 되시는
역사적인 해인데, 이러한 해에 선생님께서 참으로 귀한 자료를
발견하셨습니다.
끝으로 귀한 자료를 발견하신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2021년 2월 18일(목) 통계공 외21대손 박관우 드림..
무심했네여...정말 그렇게 되네요.
600주년이라니 짚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홍주지(洪州誌)~!
뜻밖의 발견이라 이 모두 낙민선생님 덕분입니다.
다시금 그 고마움을 강조해 전하겠습니다.
글 제목도 덕분에 600주년이라 추기해야 하겠습니다.ㅎ
<공목공의 묘지명>과 <홍주지>의 연관성으로 확인되는 중요성을
여러분께 다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였기
이에 <공지>사항으로 해서 목차의 서두로 옮기게 되었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덧붙일 말씀은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도 계속해 보완중입니다
특히 1398년을 중심으로 모친 1399년,부친 1400년,형님 1402년 연이은 상중인데
형님이나 동생이 과연 관직에 머무르실 수 있으셨을까?
통정공의 경우 상제를 마칠 수 있도록 1402년 7월 왕께서 허락하시고
3년상을 다 마치시기 직전 1402년 11월 19일에 돌아가십니다.
병간호와 돌아가신 부,모,형님에 대한 시묘살이등 1407년 재출사 직전까지의
상황을 부연해 설명할 자료를 찾아 보고 있는데 어렵습니다.
이점 참고하시고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코로나19가 마냥 해만준게 아닌것같음을 오늘새삼 느끼는 날입니다, 방콕하면서 저난해한 서적들을
한자한자 년도를확인해가며 파고계시는 명구일가님께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통계공께서 600주년 을 기억하시라고 씨종자 친손주 명구일가와 그리고 정말 흔하지않는 외손 관우님을
짠하고 우리 강문에 선물을 하시네요. 저는오늘정말 흥분의 가슴으로 집안을 대신해서 인사를드립니다.
강신권 현종님의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로써 카페에 방문한지 2주가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신축년 올해가 통계공 선조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60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으로 감개무량한 심정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에게 처음으로 통계공 선조님의 존재를 알려 주셨던 고인이 되신 외삼촌께 존경의
마음 올립니다.
이와 관련해 어린 나이에 외삼촌을 통하여 처음으로 통계공 선조님과 병판공 선조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올해가 통계공 선조님 서거 600주년이요, 내년이 병판공 선조님 탄신
400주년이라니 생각할수록 신기하게 생각됩니다.
현종님께서 카페에 올린 저의 글에 정성이 담기신 댓글을 주셔서 저 또한 정성을 담아서 답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댓글로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며, 특히 저를 "정말 흔하지
않는 외손"이라 평하여 주시니 이 감사한 마음 어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카페를 통하여 올해가 통계공 선조님께서 서거하신 지 600주년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된 것을 대단히 보람있게 생각합니다.
2021년 2월 18일(목) 통계공 외21대손 박관우 드림.
오늘도 선조님에 대해 공부 많이하고 갑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잘 봤습니다...수정할 것은 수정해야지요. 증직에 대한 자료는 언제쯤 나올까요...
그런데 처음뵀는 분도 계시네요.
강을상(姜乙祥) 판관 갑인(甲寅) 1394년
강 축(姜軸) 판관 을해(乙亥) 1395년
아마도 증직에 대한 자료를 기대하시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문각대제학>과 관련하여 잘못 대칭된 군부인(郡夫人 : 정,종1품) 호칭 아닐까요?
종실의 외명부(外命婦 : 宗親妻)에 적용되는 부(府)/군(郡)/현(縣) + 부인(夫人)이고
양반의 외명부는 부부인(府夫人) 또는 정경부인(貞敬夫人)/정부인(貞夫人)으로
통계공의 경우 <관찰사 또는 총제> 즉 종2품에 해당하는 정부인(貞夫人)으로 고쳐써야 할 것 아닌지?
증손자 반성위 공안공 자순(子順)의 문종 부마로 귀(貴)하여 조부 안수(安壽)의 증직은 확인되나
증조부 통계공에 대한 증직은 전해오는 확인된 자료가 너무 없어서 찾아내기가 쫌 그렇네요
통계공의 보문각대제학 운운하는 것에 대하여
제가 올린 <조선조 대제학> 자료를 보시면 136인 명단에 없어요
고려조 절신등 <고려조>의 대제학이라면
실록엔 군자윤(종3품)이 고려조의 최종관직이시니 이해가 안되죠~!
최근에 문산가는 길에 있는 <고려역사선양회>에서 <고려 충신>을 모신 곳에
통계공의 위패가 당초엔 <사헌집의>라 한 것을 발견하고
<보문각대제학>으로 다시 고쳤다는 말씀도 종친어른께 전해 들은 적 있어요
전국읍지 총74책 PDF자료를 최근 입수하였습니다
이 읍지들을 보시면 많은 알려져 있지 아니한 姜姓의 인물이 보입니다
필요하신 분들께선 이글에 댓글로 이메일 알려 주세요 보내드리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자료 잘 읽어 보앗습니다 저역시 어려쓸때 선조님으로 부터 우리집안이 역적으로 몰럿다는 말을드럿는데 으심이 풀럿네요 감사 합니다 대단히 수고 하셧습니다
통정공의 자경시(自慶詩)중
홍추(鴻樞)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드리면
서반관아(西班官衙)중 최고의 부서로서
중추부(中樞府) : 문무당상관(文武堂上官 : 정3품이상)으로서 무임자(無任者)를 대우하는 기관이다.
태조때 중추원으로 하였으며,정종(定宗)때에 삼군부(三軍府)로 고치고,
세조때에는 중추부로 다시 고쳤는데 서추(西樞),홍추(鴻樞)라고도 한다.
여기 소속 관원은 다음과 같다.
영사(領事 = 영의정이 겸임함), 판사(判事 종2), 지사(知事), 동지사(同知事 종2), 첨지사(僉知事 정3),
경력(經歷 종4), 도사(都事 종5~7)
감사 합니다
다 기억 할 수 없으나
많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참으로 수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족보 내막은 강씨가 역적으로 몰려 중간 역대를 모른다 하는 소문의 실마리를 알게 되여 참으로 감사 합니다
위 본문중 중요한 시기가 아래와 같이 착오로 잘못 기록되었습니다
1420년 1월하순 가정대부(嘉靖大夫 종2품上)
충청도 도관찰출척사(忠淸道 都觀察黜陟使) : 고문진보지
본 카페의 <고문진보 후지>의 내용에 댓글로 이미 수정했던 내용인데
제가 그만 깜박하고 있었네요
고문진보 후지의 간행년월에 대하여
<경자년(1420년, 세종2) 1월 하순에>라 했는데 이는 <맹동>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는 글전체 내용으로 보아 <맹동>은 1월이 아닌
그 해 마지막절기 겨울의 시작인 음력10월(사전에서 확인됨)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윗 본문 해당월을 1월이 아닌 10월로 수정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홍주지를 비교검증하여 실록의 홍주목사 제수 사실이 홍주지와 일치하는 지? 여부를 확인해보니 정확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일각에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믿기 어렵다 하였는데
그것은 억지를 부리는 기우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실록사진 12번
김남수 졸기의 홍주목사 경력이 홍주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통계공(강회중)처럼 실록에 기록이 없는 분들도 실록사진 1번 허해(1408.03.14)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러분들이 보입니다
홍주지에 노랗게 색칠한 분들이 실록 종합분 첫장에 있는 분들 입니다
사실을 추적하기 위한 엄청난 노고와 공로에 감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