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하지 않으면 지나치고 마는 오래된 굴다리를 끼고 광곡 마을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마을 주변의 많은 감나무와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돌담 집들, 소나무도 울창하다.
가을 바람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밟고 대나무 숲길을 걷는다.
백우산(白牛山) 기슭, 광곡(너브실) 마을 원 종가 터에 자리잡은 월봉 서원.
황룡강 주변에 자리한 광주 8경중 하나인 이곳은 조류들의 서식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왜가리와 백로 등이 찾아와 보호조류가 군락을 이룬다. 물안개 서린 황룡강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압권 이었다고 하나 옛 풍광은 사라진지 오래다.
빙월당과 충신당
빙월당은 고봉 기대승(1527~1572)선생을 주벽으로 눌재(訥齋 박상(1474∼1530), 사암(思菴) 박순(1523∼1589),사계(沙溪) 김장생(1548∼1631), 김집(1574∼1656) 등 조선조의 명신과 학자를 배향한 강당이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심설월(氷心雪月)'에서 따온 말이다.
정조가 이런 당호를 하사한 이유는 학자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고결함의 표상이 되어온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 총지(聰智)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총지(설총)는 호가 빙월당(氷月堂)이다. 원효대사와 어머니 요석궁 공주 사이에 태어난 총지는 유학과 문학(文學)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 일찍이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이두 문자를 집대성 했다.
서원 앞 좌우에는 동제인 명성제와 서제인 존성제가 있고, 서원 좌측에는 장판각이 있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구별되는 것은 사단이 부분적인 정이고 칠정이 전체적인 정이라는 차이밖에 없다고 하면서, 사단은 칠정의 범위를 벗어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즉 사단과 칠정을 별개의 대립적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스승 이황은 마침내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했다. 두 사람의 학설 논쟁 이후로 이이와 성혼의 논쟁을 거쳐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리학자에 의해 한국 성리학 이론 논쟁의 중요 쟁점이 됐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을 중심으로 한 학설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1559년부터 퇴계와 고봉이 8년간 서한을 주고받으며 학설 논쟁을 벌였다는 ‘사칠론(四七論)’은 잘 알려져 있는데, 어찌 어린 제자가 대학자인 노 스승과 감히 논쟁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표현은 지나치게 잘못된 논리 비약이다. 스승과 제자 간에 격의 없는 학문토론인 셈이다. 다음 일화를 보면 기대승 선생의 고매한 인품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경명은 평소 존경하던 6살 선배인 고봉을 만나러 임곡면 신룡리 고봉의 집을 찾아갔다. 기대와 달리 소홀히 맞이하는 그의 태도에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한수를 적어 하인에게 건네주고 돌아섰다.
정색한위귀천자백역기(正色寒爲貴天姿白亦奇)
세인간목자균시오상지(世人看自別均是傲霜枝)
국화꽃 빛깔은 노랗고 귀한 것이지만 타고난 모습이 하얀 것 또한 진기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 사람들 보는 것이 이처럼 다르기는 해도 국화꽃을 좋아하는 것은 한결 같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그 꿋꿋한 절개를 숭상하고 사랑함에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을 잘 식별하라는 충고의 은유를 담은 내용이다.
이 글을 전해 받은 고봉은 10리를 뒤쫓아 가 자신의 소홀을 정중히 사과하고 다시 집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고봉 선생의 덕풍과 겸양을 보여주는 일화다.
장판각에는 고봉과 그의 스승인 퇴계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목판으로 새겨 보관하고 있다. 서원과 주변을 둘러본 후 고샅길을 내려오니 고봉 학술원이 있다. 학술원 안에 있는 애일당을 둘러보려고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지 못하고 돌담길을 돌아가니 선생의 아들이 시묘 살이를 했다는 효의 심정(心亭), 칠송정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신룡동 기 씨 집성촌
조선 후기 광주 목 소고룡면 지역으로 천동촌·구룡·신촌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함평군 오산 전역, 장성군 남삼면 통정 일부와 광주군 소고룡면이 임곡면으로 통합됐다. 소고룡면 신촌리·천동리 일부를 합해 광주군 임곡면 신룡리 라 했으며 1995년 광주가 광역시로 승격되고 광산구 임곡동 관할 신룡동이 됐다. 고봉작은 아버지 복재공(服齋公)이 기묘사화 때 화를 입자 고봉의 부친은 광주로 낙향해 은거했다.
행주 기 씨는 주로 경기도 행주에서 세거했으나 조선조 초기에 정무공 판중추부사 기건(奇虔) 손자인 이조참판 기찬(奇襸)의 다섯째 아들인 복제 기준(奇遵)이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자 기찬의 둘째 아들 참판공 기원(奇遠)과 넷째 아들 덕성군 기진(奇進)이 화를 피해 장성 땅으로 내려와 황룡면 아곡리(아치실)에 처음으로 세거하게 됐다. 지금은 광주 신룡동 신촌(새말)에 52 가구 중 50 가구가 기 씨일 정도로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기 씨 마을의 자랑스러운 전통은 역시 후손들의 충의정신이다. 임진왜란 때 고봉선생의 아들 효증과 고흥군 기대유의 아들 기효간이 금강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 정신은 한말 기우만, 기삼연, 기산도 등 의열로 이어졌으며 농락하는 왜군에게 손목을 잡히자 그 자리에서 더러운 손목을 베어내고 황룡강 물에 뛰어들어 순절했던 기대승의 따님(하서 김인후 선생의 손자 김남중의 부인)의 절개 등을 꼽을 수 있다.
마을에는 덕성군 의정부좌찬성 기진을 제향(음력 10.10)하는 오남재가 있으며 또 다른 유적으로는 낙암산 쪽으로 약 300~400m 떨어진 외딴 민가 옆에 세워진 오층석탑이 있다. 고려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며 1981년 9월 해체 복원할 때 1층 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각방형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과 사리병(舍利甁), 그리고 몇 조각의 목편, 죽편 등의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됐다. 사리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돼있다. 오층석탑 앞에는 석조 여래입상이 한 구 서있다.
신룡동 마을 뒤 낭떠러지 위에는 신목으로 떠받드는 수령 200여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수령 200년 추정)가 있다. 이 마을에서는 아직도 정월보름이면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사진=기우경작가
사진/ 1.2.3-고즈녁한 산자락에 자리한 월봉서원. 노랗게 익어가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4.월봉서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가을걷이를 나가는 시골 아낙과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삽살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5.광산구 신룡동 월봉서원이 자리한 백우산. 앞으로 황룡강이 흐르는 배산임수형이다.
6. 신룡동 기씨 집성촌 인근에 있는 5층석탑.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해체복원 과정에서 사리구 등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