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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河南省)
하남성(河南省) 면적은 16만 7000㎢이고,
인구는 약 8950만명 정도이다.
그 동안 전설상의 나라로 알려졌던 중국 고대국가 은나라가 실재했던 나라로 밝혀졌다.
그 도읍지는 현재의 정주였는데,
중국 고대 문명은 정주를 중심으로 한 하남성에서 발전했다.
은이 멸망하고 주가 일어났으며 다시 주가 쇠약해지며 춘추 전국시대가 전개 되었는데,
모두 바로 이 하남성을 무대로 펼쳐진 역사였다. 그래서 혹자는 "중화"의 발상지라고도한다.
또한 예로부터 전국 제일을 자랑하는 밀을 비롯하여 목화, 땅콩, 참깨등의 경제박물도
재배한다. 또한 북경~광주, 연운~란주간의 철도가 정주에서 십자로 교차하며,
지선도 개발되어 있고,평지를 가로지르는 하천도 수운에 이용된다.
현재의 성도 역시 정주이며 근처에는 5岳의 하나인 崇山이 있고 소림사가 있다.
그외 주요 도시로는 역시 古都인 개봉과 낙양을 들 수 있다.
또 하남성에는 노자의 출생지인 녹음과
두보의 고향인 공현이 있어 역사적으로 볼 곳이 많다.
소림사(少林寺) 인도의 선승 달마가 9년 동안 면벽 수도를 했던 곳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림사 권법의 총본산인 곳이다.
달마는 6세기 초 처음으로 중국에 선종을 전했는데,
그가 소림사에 온 해는 527년이다. 소림사는 숭산 산자락에 있다.
소림사 군법은 원래 오랫동안 참선을 함으로써 몸이 약해지는 것을 막고
또한 산속의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본래의 뜻과는 달리 단지 무술에 관심이 있거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든 수련생이 대부분이다.
소림사는 북위시대 496년에 세워졌는데 산문을 들어서면 천왕전터, 대웅전터가 있다.
소림사 정문 앞에는 돌사자가 있다. 오른쪽은 숫사자, 왼쪽은 암사자이다.
소림사는 전란에 소실되고 증축되었지만 이 돌사자만은 당시의 것이 그대로 전래되어
오는 것이다. 소림사는 여느 사찰과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고 소박하게 보인다.
왼쪽 건물에 소림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갖가지 무술 자세가 표현된 승려 모형이 있다.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면 석가상 뒤의 별에 그려진 그림이 무술하는 승려를 표현하고있다.
또한 근처의 운동장에서는 종종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을 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영화촬영 장면도 볼 수 있다.
낙양(洛陽)
하남성의 서쪽에 위치한 낙양은 기원전 770년부터 역대 9왕조가 도읍을 두었던 古都이나
가장 융성했던 때는 장안이 도읍지였던 당나라 때였다.
서안이 정치의 도시였다면 낙양은 예술의 도시였다.
전국시대의 노자, 당나라 때의 두보, 이백, 백낙천 등의 문인들이 낙양을 근거로 활동했었다.
지금은 용문석굴과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를 보기 위한 관광객이 많이
몰려드는 곳이다. 낙양은 북으로는 만리장성, 남으로는 양자강이 있어
황하의 중 하류 지역에 해당하며 중원이라는 중국의 핵심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황하 문명이 일어났는데,
중국의 동서남북 어느쪽에서 보더라도 중심이다.
동북 아시아의 한랭한 기후와 동남아시아의 온난한 기후의 접점 지역으로
하남의 쌀농사, 하북의 밀농사가 성했다. 따라서 옛 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이
모여들었다. 이질적인 민족이 모여들어 서로 공통의 문화 체계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중화 사상이다.
낙양은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길게 발달한 도시 형태로 인해 하루에
유적지를 다 돌아보려면 빠듯하다. 낙양은 근처의 용문석굴로 유명하지만
혹시 이곳에 4월 중순에서 4월 말 사이에 간다면 모란 축제를 볼 수 있다.
모란은 낙양의 상징으로 매년 이때쯤이면 모란 축제가 열려 온 도시가 모란으로 뒤덮힌다.
용문석굴(龍門石窟) 494년 북위의 도읍이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겨지자
대동의 운강석굴에 이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당나라 때까지 약 4백 년 동안 석굴이 만들어졌다.
용문석굴은 돈황과, 대동에 있는 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석굴 중 하나이다.
이 석굴 안에 약 10만 개의 불상이 있다. 그러나 모두 석굴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또 많이 파괴되어 있어서 아쉽다. 그러나 서산의 석굴은 잘 보존되어있어서
용문석굴의 대표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3분의 1은 북위 시대의 것이고 나머지는 당나라 때의 것이다.
이 작업을 처음 시작한 북위의 선비족은 철저히 한족에게 동화되어 한족과의 결혼을
장려하고 언어와 복장도 한족을 따라갔다. 선비족은 북중국을 지배하며 불교를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대동에 도읍지를 정했을 때는 운강석굴을 만들었고
후에 낙양으로 천도한 후 용문석굴을 만들었다. 그 뒤 4백 년간에 걸쳐
수.당 등 6개 왕조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석굴이 만들어졌다.
봉선사에 있는 노사나불상은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당나라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서, 17m 정도에 얼굴은 측천무를 보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양쪽 벽에는15000개 이상의 소불상군종의 병에 대한 한방약처방이 쓰여있는
약방동이 있다고 한다.
백마사(白馬寺) 낙양시에서 동쪽으로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불교 사원으로 유명하다.
후한 2대 황제 명제 때 건립됐는데, 현재 건물은 명 나라 때 복구된 것이다.
이 절에는 내려오는 전설에 어느날 명제가 꿈에 백마를 탄 두 사람을 보았는데,
이들을 귀하게 맞아들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황제는 다음날부터 먼 국경까지 나가
이들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백마를 타고 오는 인도의 두 승려를 만나게 되었다.
황제가 이들을 기쁘게 영접하니 이때부터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절 입구 양쪽에는 두 마리의 백마상이 서 있고,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는 왕주전에 서있다. 그 뒤로는 대불전, 대웅전 등의 건축물이 늘어서있는데,
대불전에는 1.25톤의 무게의 철종이 있고, 대웅전에는 원나라때 조각된 18나한상이 있다.
예전에는 넓은 경내를 모두 공개했지만 지금은 일부분만 공개하고있다.
그래도 모두 돌아보는데 40분 정도 걸린다.
입구 좌우 안쪽에 있는 사당은 인도에서 경전을 가져왔다는 승려의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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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일반개요
중국 화북지구(華北地區) 남부에 있는 省.
면적 16만 7000 km2. 인구 약 8949만(1994).
성도는 정저우[鄭州]. 북쪽은 허베이[河北], 북동쪽은 산둥[山東], 동쪽은 안후이[安徽], 남서쪽은 후베이[湖北], 서쪽은 산시[陝西], 북서쪽은 산시[山西]의 각 성(省)과 접한다.
지형적으로는 서부의 산지, 동부의 평원으로 나누어진다.
즉, 서부산지는 북서부의 타이항[太行]산맥, 서부의 친링계[秦嶺系]의 푸뉴[伏牛]산맥,
남부의 퉁바이[桐柏],다볘[大別] 산맥 등으로 이루어지고,
화북평원은 북부의 황허강[黃河],화이허강[淮河]에 의한 평원과,
남부의 한수이강[漢水]에 의한 난양평원[南陽平原]으로 나누어진다.
수계(水系)로는 그들 하천 외에 하이허강계[海河系]가 있는데,
모두 황천(荒川)으로 예로부터 자주 수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공산정권 성립 후 치수공사를 하여 북서부의 싼먼샤[三門峽]댐·
평원부의 런민성리거[人民勝利渠],왕라오보축홍구[王老波蓄洪區] 등이 완성되었다.
이 평원은 일찍부터 발전한 지역이며, 문자 그대로 ‘중화(中華)’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또한 예로부터 농업도 활발하여 전국 제일을 자랑하는 밀을 비롯하여
목화,땅콩,참깨 등의 경제작물도 재배한다.
서쪽의 산지에서는 임업,과수재배가 이루어진다.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원료를 이용한 공업도 발달하였다.
자오쭤[焦作],하오비[鶴壁] 등의 석탄,
서쪽의 철광을 이용한 철강,기계, 싼먼샤 등의 전력, 화학 부문을 비롯한
중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석탄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우한[武漢]까지 수송되어,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콤비나트를 형성한다.
또한 이들 생산물은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망에 의해 성내(省內) 및 전국 각지로
분산된다. 즉, 베이징[北京]∼광저우[廣州],롄윈[連雲]~란저우[蘭州] 간 철도가
정저우에서 십자로 교차하며, 지선도 개발되어 있고, 평지를 가로지르는 하천도
수운에 이용된다.
허난성은 역사적인 도시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사적,명승지도 매우 많다.
카이펑[開封]의 샹궈사[相國寺], 뤄양[洛陽]의 룽먼석굴불상군[龍門石窟佛像群],
중국 최초의 절이라고 하는 바이마사[白馬寺] 등이 있다.
정주는 하남성의 성도로 황하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화북과 화남을 맺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중국을 열차로 여행하면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곳이다.
정주에서 남서쪽으로 75㎞쯤 떨어진 곳에는 중국의 5악 가운데 하나인
중악(中岳), 즉 숭산(崇山)이 있고,
무술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림사가 산기슭에 있다.
27 기념탑
27 기념탑은 정주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2·7광장의 중앙에 솟아 있는 탑으로
5각기둥 2개의 모양으로 되었있어 쌍둥이 탑(雙塔)이라고 불리워 지기도 한다.
1923년 2월 7일에 철도 노동자가 총파업을 한 기념으로 1971년 9월 29일 세운 것인데,
높이 63m으로 지하부분을 포함한다면 14층까지 있다.
27기념탑은 탑에 올라 시내를 바라볼 수 가 있으며 각 층에는 당시의 상항을
알 수 있는 전시품도 진열되어 있다.
망산풍경구(邙山 景區) 황하유람구
황하유람구는 70년대 개발을 시작하여 80년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규모가 크게
건설이 되었는데, 정주시에서 가장 중요한 유람구일 뿐만아니라 전국에서도 이름이
나있는 유람구역이다. 황하유람구는 정주시에서 서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북쪽으로는 황하, 남쪽으로는 악산(岳山)이 있다.
황하수리시설과 황하전망대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황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주위에 약 3,000점의 석비를 가지고 있는 황하비림(黃河碑林)과 석각미술관,
우왕상(禹王像) 등이 있다.
하남성 박물관 (河南省博物院)
하남성 박물관은 현대화된 역사,예술 박물관으로서 면적이 약 10여만 평방미터이며
건축 면적만 7.8만 평방미터이며, 1998년 5월1일 정식 개방이 되었다.
현재 13만개 이상의 물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중 1급 ,2급의 물품만 5천여개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선사시대 이전의 유물과 상주(商周) 청동기, 역대 도자기, 옥제품등이
매우 특색이 있다. 전시실 내부에는 기본전시실, 전문전시실, 임시전시실 등이 있으며
외국인을 위한 외국어 안내, 컴퓨터 안대등이 설치되어 있다.
개 봉
중국인들은 서안(西安), 낙양(洛陽), 개봉(開封)의 세 도시를 3대 고도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개봉은 전국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오대의 양(梁), 북송(北宋), 금(金)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던 유서깊은 도시로 중국 6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다.
현재 구는 60만명 정도 되는데 북송시대에는 100만명을 넘는 대도시였고
강남의 여러 도시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천하의 요회(要會)』라고 불렀다.
볼 곳으로는 1,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상국사(相國寺), 송(宋)대의 건축을 복원해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송도어가(宋都御街), 송대 황거(皇居)의 어원(御園)
일부였던 용정공원(龍亭公園), 북송시대에 창건된 높이가 55.08m이며 8각형 모양의
13층인 철탑(鐵塔), 개봉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건축물인 번탑(繁塔) 등 있다.
상국사(相國寺) 555년 북제 때 창건되었으며 건국사(建國寺)라 했으나
당나라 때 예종(睿宗)이 상왕의 왕위를 계승한 것을 기념하여 상국사로 이름을 개칭했다.
북송 때 가장 번창했으며 명나라 때 홍수로 인해 훼 되었다가 청나라 때 재건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이 되었고 팔각 유리단 주위에 회랑을 둘러치고 지붕을 유리기와로 깐
건축이며, 은행나무의 고목을 조각해서 금도금칠을 한 높이 7m의 훌륭한
천수관음보살상을 모셔놓고 있다.
철탑 (鐵塔)
송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개봉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식명칭은 개봉사탑(開封寺塔)이라 한다.
북송 1049년에 건립한 13층 팔각형 탑인데, 높이는 55.58m에 이르고 탑의 표면 전체를
갈색의 유리로 씌워 멀리서 보면 갈홍색 빛이 난다.
탑내에는 계단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만들었고 꼭대기에서 개봉시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우왕대(禹王臺) 하(夏)왕조의 시조인 우왕의 사당으로 명나라 때 세워졌다.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의 대음악가 사광(師曠)이 이곳에서 악기를 연주했다고 해서
취대(吹臺)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우왕대 양쪽에는 각각 작은 사당이 있는데,
동쪽 것은 삼현사(三賢祠)로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고 두보(杜甫) 그리고 고적(高適)
세 사람이 취대에 올라가 시를 읊었던 곳이다. 서쪽은 수덕사(水德祠)라고 하는데,
중국 역사상 치수에 뛰어난 공적이 있는 37명의 위패가 걸려 있다.
용정공원(龍亭公園)
개봉의 중심지로 예전에는 송나라와 금나라 때의 황궁자리였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정면의 72단 돌계단에는 운룡이 새겨지고 오조문외에는 송대에 만들어진 한쌍의 사자상이 있다. 번탑(繁塔) 원래의 이름을 홍자탑이라 하기도 하고 천청사탑이라고도 한다.
북송 977년에 세워졌으며 개봉에 현존하는 건축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육각형 3층 탑이며, 높이 31.6m에 탑 벽면에는 약 7000개 벽돌이 세워졌으며
하나하나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다
낙양
하남성의 서쪽, 황하의 남쪽 해안과 낙하의 북쪽해안에 위치한 낙양은
중국 6대 고도의 하나인 유서 깊은 도시로서,
기원전 770년 주(周)나라의 수도가 된 이래로 동주(東周), 동한(東漢), 조위(曹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隨), 당(唐),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 9개 왕조가 도읍을
정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아홉 왕조의 도읍(九朝古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 1세기 이후 불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낙양에는 한(漢),위(魏),당(唐) 등 여러 왕조의
유적과 중국 3개 석굴의 하나인 용문석굴, 백마사등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낙양이 가장 번영했던 것은 장안이 도읍으로 정했던 당나라 때이다.
서안이 정치의 도시였다면 낙양은 예술의 도시로
전국시대의 노자, 당나라의 두보,이백,백낙천 등 많은 문인과 예술인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예술의 꽃을 피웠다.
특히 후한에서 당대까지의 사이에 정치중심지 서안에 비해서
경제,학술,문화의 국제적 중심지로서 번영했으며,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삼국지(三國志)"이야기도 후한말기의 낙양이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 낙양의 지리적 위치가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천연적인 요세이다.
또한 河南省 서부 지역을 지배하려면 반드시 낙양을 점령하여야 하므로
낙양에서는 수 많은 전쟁들이 일어났다.
이 때 낙양사람들은 약탁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보물들을 땅속에 뭍어 두었다.
더욱이 당나라가 멸망한 후부터는 전란이 끊이지 않아 많은 문화 유적들이
소실되거나 없어졌다. 지금은 용문석굴과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 보기 위한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고 있으며, 비단이 싸기 때문에 비단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 중의 하나이다.
439년에 북 (北魏)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그 뒤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 당에 이르는 400년간에 걸쳐
계속 석굴을 만들었다. 용문석굴 안에는 자그마치 10만여 개의 불상이 있는데
석질이 단단하고 암벽에 직접 조각한 것이 특징이며,
불상은 모두 표정이 풍부하며 매우 예술성이 높은 편이다.
돈황, 운강 석굴이 벽화가 뛰어난 반면에 용문석굴은 조각이 훌륭하다.
이하(伊河)의 양안에 있는 용문산(龍門山)과 향산(香山)의 암벽에는 1천 3백 52개의
석굴이 1㎞나 뻗어 있고 그 속에 약 10만개에 이르는 불상이 있다.
이것을 모두 관람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므로 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고양동(古陽洞)과 당나라 초엽의 것으로 보이는 잠계사(潛溪寺)를 보고 나서
북위 때 24년에 걸쳐 인부 80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빈양동(賓陽洞)을 보는 게 좋다.
용문석굴을 소개할 때 반드시 말하게 되는 불상은 봉선사(奉先寺)에 있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며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당나라 시대의 작품이며 높이가 17m남짓하고 얼굴은 축천무후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양쪽벽에 15,000개 이상의 소불상군종의 병에 대한 한방약처방이 쓰여있는
약방동이 유명하다.
백마사(白馬寺)
낙양시에서 동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있으며
중국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불교사원으로 유명하다.
후한 2대 황제인 명제(明帝) 때 설립됐는데,
현재 건물은 명나라 때 복구한 것이다. 절 이름은 후한의 명제가 인도에 파견한
채음과 진경 두 승이 인도 고승 두 사람과 불경을 백마에 싣고 낙양에 돌아온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절 입구 양쪽에는 송나라 때 만들어진 두 마리의 백마상이 서 있으며,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는 왕주전이 서 있고, 그 뒤로 대불전, 대웅전 등의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대불전에는 게 1.25t의 대철종(大鐵鍾)이 있고,
대웅전에는 원(元)대에 조각된 십팔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나한상은 각각 마법의 병기를 들고 있으며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이다.
관림당(關林堂)
낙양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용문석굴로 가는 도중에
삼국지로 유명한 관우(關羽)를 기리는 관림당이 있다.
삼국지의 유비의 명장 관우가 번성에서 오나라 장군 여몽에게 패하여 살해된 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의를 존중하여 희생이 된 관우는 사후 신앙의 대상이 되 최초로 관제묘가 창건되었다.
관림당에는 장대한 관우상 외에 역대 묘지의 비석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이 있고,
건물의 벽면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관우가 사용하였다고 하는
3m 정도 되는 칼도 있다. 삼전의 에는 팔각의 붉은 담으로 둘러싸인 관우의 머리를
묻었다는 무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왕성공원(王城公園)
시내 중앙에 걸쳐서 펼쳐지는 왕성공원은 주나라의 왕성 유적이었는데,
본래 노동인민공원이라고 불렀다. 공원 안에는 은나라 때의 구정 복제품이 있다.
정(鼎)이란 천자의 상징물로서 두 개의 손잡이와 발이 셋 달린 솥을 말하는데,
높이 4m, 길이 9m 정도 되는 철로 만든 대형 솥이다.
그리고 공원 내에는 2개의 한(漢)대의 묘가 있는데,
전실과 후실에는 색채가 뛰어나고 예술성이 높은 해, 달, 별과 신선고사가 그려져 있다.
왕성공원은 또한 모란(牡丹)으로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일명 "모란화성(牡丹花城)"이라고 불릴 정도로 4월 15일∼25일 사이의 11일간은
모란축제가 열려 왕성공 을 중심으로 도시에는 모란꽃이 아름답게 핀다.
낙양박물관(洛陽博物館)
시 중심 부근에 세워진 3층 건물의 낙양박물관은 낙양 주변에서
출토된 약 800점의 유물이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전체 박물관의 전시품은 2,000점이며, 소장품은 약 50,000점 정도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당삼채(唐三彩)로
당나라 때의 독특한 유약 광물이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당삼채는 당나라 때 만들어진 사람이나 낙타, 개, 항아리 등의 도자기를 말하는데,
19세기 말 시내 공사현장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숭산
중국 5대 명악중의 하나로서 소림사와 중악묘(廟)가 있는
태실산(太室山)과 소실산(小室山)의 72개 봉우리가 숭산을 이루고 있다.
신기하게도 숭산에 있는 사찰의 수도 72개라고 하니 우연의 일치도 이렇게
정확할 수는 없다.
주요 유적으로는 북위의 숭악사탑, 한대의 숭산 3궐(태실궐, 소실궐, 개모궐),
원대의 관성대(천문대), 소림사, 중악묘, 숭양서원 등 외에 많은 절, 탑, 석비, 유적이 있다. 전부를 볼려면 2∼3일로는 불가능하지만 보통은 소림사만을 구경하고 돌아가기
문에 1일 관광객들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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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주를 중심으로 5박6일 어떻게 일정 짜면 좋을까요? 위에 있는 내용 넣어서... 여행사 상품엔... 마땅치 않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