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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송문의 가을에세이]① 릴케의 가을날 | ||
독일의 대표적인 근대 시인인 동시에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가을날’이라는 시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읽게 된 것은 중학 시절이었다. 감수성이 많은 그 시절에 나는 이 시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릴케의 시는 이렇게 시작되는데, 나는 그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고 하는 말에 어쩐지 느껴지는 잠세어(潛勢語)를 만나게 된다. 우리에게 여름날이 없다면, 그 작열하는 태양이 없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삽시간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만일 해가 없어서 이 세상이 암흑천지라면, 사람의 힘으로 발전을 일으켜서 그 전기 빛으로 이 지구상의 동식물을 생장하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전력이 필요할까? 그렇게 해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을까? 말할 나위도 없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위대한 햇빛,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공짜로 누리는 게 아닌가? 이 감격스런 진리를 릴케는 신앙에의 끝없는 동경으로 기도하는가 하면, 자아와 사물 사이에 차원을 달리하면서 세속적인 욕심이 없는 순수한 바람과 절대고독, 절대융화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을 스미게 하십시오.” 이 시에서 우리는 릴케의 겸허한 자세를 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뇌물을 주고받는 자본가와 정치가, 이윤에 골몰하는 기업가와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노동자, 남북한이, 동과 서가, 날이 새고 눈만 벌어지면 싸움질인 이 세속에서 볼 수 없는 순수한 청량음료를 릴케의 시에서 맛보게 된다. 그가 신에게 간절히 바란 것은 돈도 권세도 명예도 아니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포도주가 맛들게 하여 달라는 소박한 기원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마음씨를 고스란히 가지고 싶었고, 순리대로 가질 수 없다면 훔쳐서라도 갖고 싶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 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시인-선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