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남한에선 처음으로 부산에 무료 병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 병원에 일하면서 집 한 칸이 없을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다 못한 병원에서 방 한 칸을 마련해 줬습니다. 생전에 막사이상 등을 받았지만 선생은 상금은 물론 상패마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인류애를 실천한 참다운 의사였습니다.
- 평양서 피난 가지 않고 환자 돌봐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의 사상과 생활을 잘 드러내고 있는 친필 휘호.
복음병원 옥탑방. 장기려 박사가 머물던 방(사진 원안)으로 기념관으로 꾸밀 예정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을 공격해 왔습니다.
서울은 물론 낙동강까지 점령했던 북한군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밀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까지 점령 당했습니다.
“쌔액!”, “쿵~쾅!”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병원 의사들은 깜짝 놀라 모두 피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장기려 박사가 의사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저 밖을 보시오…….”
창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장기려 박사와 동료 의사들은 7 개 수술실에서 49 건의 중요한 수술을 했습니다. 국군과 유엔이 평양에 입성하자 이번에는 국군 장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12월 3일, 중공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 전쟁에 끼어 들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사님, 다친 국군을 도와 줬으니 북한군이 그냥 놔 두지 않을 겁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해 준 게 어찌 죄가 된단 말인가?”
“박사님,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제가 평양역으로 차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장기려는 둘째 아들 기용과 평양역으로 나가 군의관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지 4 시간 후 구급차 한 대가 급하게 섰습니다. 이 자동차를 급히 몰아 집으로 가 봤지만 나머지 가족은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가족을 못 만난 채 평양 종로 앞을 지날 때 둘째 아들 기용이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예요. 어머니!”
기용은 목이 터져라 어머니를 불렀지만 차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피난민 행렬 속에서 차를 세웠다간 큰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용아! 그만 울음을 그쳐라. 곧 만나게 될 게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는 이때 본 아내와 자식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들은 대동강을 못 건너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 부산서도 오직 치료에만 전념
부산으로 내려온 박사는 육군 병원에서 숱한 병사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서 알고 지내던 한상동 목사 등이 찾아와 5000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이 돈으로 1951년 6월 20일, 민간인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비록 천막 병원이었지만 피난지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던 환자가 하루에 200여명씩 찾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선생은 의료보험조합과 청십자병원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환자 한 사람이 원장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습니다.
“원장님, 지금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퇴원해 돈을 벌면 반드시 치료비를 갚겠습니다.”
“사정이 딱하군요. 제가 몰래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도망치세요. 발각되면 나도 사정이 곤란하니…….”
원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 사내에게 교통비로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습니다.
박사는 이처럼 남한 최고의 의사가 되었지만 결코 부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가진 게 너무 많다.’며 늘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며 살았습니다.
1985년 9월, 장기려는 분단 40 년 만에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 있는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산 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그럴 순 없소.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혜택이 돌아올 수 있었겠소. 나를 이번 고향방문단에서 빼 주시오.”
박사라고 어찌 가족이 그립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장기려 박사는 그런 혜택을 받지 않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렇듯 젊은 시절 ‘경성의전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의사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죽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평생 살겠다.’는 첫 결심을 잊지 않고 살았던 참된 의사였습니다.
서재 한 구석에서 빛바랜 장기려 박사 관련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 이름 자체만으로 마음이 숙연해 진다. 돈을 우선으로 하는 시대, 메마른 각박한 시대, 이기적인 시대, 나눔과 희생이 실종된 볼멘소리의 시대에 인생을 역으로 살아간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행복이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1911~1995)가 그런 사람이다.
장 박사는 일생을 무소유, 희생과 사랑, 가난한 자의 대변인으로 살았다. 그는 생전에 박사, 원장, 회장 등의 호칭보다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다. 성산 장기려 선생은 예수를 닮은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던, 범인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 모범이며 스승이다.
묻힐 한 평의 공동묘지도 없이 45년을 절개로 살다
그는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95년, 생을 마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진정한 의미의 봉사자요 의사였다. 사실 장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초라하기까지 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40년 간 병원장으로, 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던 그였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을 맞이할 공동묘지 몇 평조차도 없었다.
돈과 사욕, 명예와 지위를 멀리 한 채 말년에는 고신의료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화려한 도구하나 없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 더구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뭉클케 한 것은 6·25 전쟁 중,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켜 45년을 홀로 지냈다는 점이다. 그는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지인들이 그에게 재혼 할 것을 권유하면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고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며 정중하게 말하곤 했다. 그래도 재차 권유하면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이런 마음자세요 성품이다.
무소유 경제관, 어린시절에 만들어지다
그는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산상수훈과 황금률 같은 가르침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장 박사는 달라는 자에게 거저 주고, 때론 필요한 자를 찾아서 손과 마음을 채워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의 무소유적 버리는 삶은 그를 '위대한 성자'라는 수식어를 달게 해주었다. 그리고 사랑가득 담긴 헌신적인 의료행위는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칭을 훈장처럼 달리게 했다. 장 박사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된 배경에는 성경 중심의 신앙교육이 바탕에 있었다.
장 박사는 젖먹이 시절부터 할머니의 믿음과 기도로 자랐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야곱과 요셉,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성경의 역사적인 인물에 대입시켜 생각했다. 특히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요셉의 이야기'는 그에게 무소유 경제관에 영향을 끼쳤다.
월급 전액을 가나한 사람의 치료비로 대신하기도 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서 고민하는 환자들을 보면 남몰래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항상 병원 행정직원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하였다. 어떤 때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입원비를 낼 엄두가 나질 않는다는 하소연을 듣고 밤에 문을 열어 놓을 테니 살짝 도망치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결국 다음 날, 농부와 약속한 대로 직원들이 퇴근한 틈을 타 병원 뒷문을 열어 두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농부의 손에 따로 마련한 돈을 쥐어 주기도 했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스승으로서의 귀감이다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했던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장 박사를 이광수는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표현했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그는 어떤 의미에서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해에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받은 사람,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동안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드러내지 않고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장기려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본 받을만한 어른이 부족한 이 시대에 진정한 의인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