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반야월
작곡가 박시춘 선생 표현대로
‘서양사람 될 뻔하다 만 얼굴’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잘 생기고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었다.
매우 독특한 그만의 창법으로 국민들을 휘어잡은 현인 선생의 창법은
탄탄한 음악적 기초 위에 스스로 창조한 창법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위대한 가수다.
작곡가 손석우
세련된 용모와 창법, 모던한 스타일로
외국 파퓰러송에 가까운 스타일을
처음 대중에게 보여준 가수인 동시에
‘레가드 창법’을 최초로 구사했을 만큼 개척자였다.
즉흥 애드리브를 적절히, 그리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탄탄한 음악성을 가진 우리 가요에 새로운 상(像)을 구현한 분이다.
작사가 유호
나의 제2고보 1년 선배로 학창시절 배구선수였다.
내가 가사를 쓴 ‘신라의 달밤’을 무대에서 부른다고 해
첫 공연을 보러 갔는데,
꽉 들어찬 관객이 ‘재청’을 아홉 번까지 해
공연이 끝나도 나갈 수 없었다.
해방 후는 어디가나 ‘신라의 달밤’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통금시간에도 ‘나, 신라의 달밤이요.’하면
무사통과했다는 일화도 회자될 만큼 ‘현인의 시대’였다.
‘비 내리는 고모령’ 제막식 때 본 것이 마지막이다.
‘신라의 달밤’ 제막식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나 혼자 참석,
쓸쓸한 제막식이 되었다.
가수 오정심
현인 선생은 결점이 없는,
국제무대에도 손색이 없는 가수다.
우리 영감님(작곡가 손목인 선생)하고 의형제를 맺어
몇 십 년간을 우애 좋게 함께 지내왔고
돌아가셔서도 같은 공원 묘를 쓰고 있다.
가수 안다성
송파구로 이사와 10여년 정도 가까이 어울렸는데
고집이 세시고 엘리트인 동시에
매우 서민적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이남과 이북 포로들이 매일 싸움을 벌이자
각각 분리해 수용해야했는데 그 구분하는 방법으로
‘신라의 달밤’을 아는지 모르는지로 판별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질 정도로
유명했던 곡이다.
그때 ’신라의 달밤‘을 모르면 빨갱이라는 말이 나왔다.
가수 현미
본명 ‘김명선’이란 이름이 촌스러워
처음 현인선생께 이름 중 ‘현’씨를 빌리겠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아예 동생 삼자며
아름다울 미, 사랑 애, 구슬 주 중에
이름을 선택하라고 했다.
‘아름다울 미’를 택해 지금 ‘현미’가 되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함께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 무대에 함께 섰다.
분장실에서는 완전히 ‘아버지’,
무대에 나가면 ‘넘치는 카리스마’로 기가 굉장했다.
직업의식이 철두철미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가수 김광진
영어, 일어, 중국어, 불어까지
5개 국어를 구사할 만큼 인텔리셨다.
연예인으로써의 긍지를 끝까지 지키신 분으로
개인적으로도 가장 닮고 싶었던 분이었다.
양아들로 삼아주셨던 것은
내게 큰 영광이다.
정리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Copyrights ⓒ대한가수협회보 ‘The Singers' 창간호, 2008년 4월.
첫댓글 제가 이분들보다 많이 어려도..
저 어렸을때 들었던 노래 정말 지금도 손색이 없는노래 많아요.
이렇게 원로들께서 그렇게 말씀 하시니 새삼 더 멋있게 들리네요.
언젠가는 반드시 한원희님께 드리고 싶었던 이야기 하나.
현인 노래 중 김광수 바이얼린의 깊은 울림이 전반에 흐르는 '세월이 가면', '서울야곡', '하샤바이(Hush a bye)' 등은 반드시 들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송민도 노래 또한 어느 것 하나 빼놓기 어렵지만 특히 '다시 만날 때까지', 이 노래 놓치지 마세요.
제가 어느덧 한원희님 노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요. ^^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몸은 좀 추스려 졌는지요? 또 뵙겠습니다.
이 죽일 눔의 기침과 몸살... 지금 ㅂ^^, 개점휴업 상태입니다.
캬하~어떡합니까 ? 병원에 다녀오셔야 되겠네요. 그날 정말로 피곤해 보이시든데.......
정말 한원희님 말씀 처럼 원로들께서 좋은 말씀 해주시니
더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 드네요..건강 잘 챙기셔요 박선생님.^^
동 시대에 활동하셨던 이 분들이 아직 정정하셔서 현인 선생에 관한 일화들을 보다 생생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요계의 산 증인들, 이러한 분들이 보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저도 함께 기원합니다.
창간호,
부산 송도 해수욕장에서는 해마다 해인 가요제가 열렸고,
또 영도 다리에 있던 현인 선생 노래 동상은 지금은 다리 공사로 철거되고
없어져 안타깝습니다...아 ~~~ 신라 의 달 밤 이여........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던 현인 동상이 길 건너편으로 이전할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이더군요.
그걸 모르고 동상이 옮겨졌을 만한 곳을 찾느라 원로가수 손인호 선생을 모시고 땡볕 쏟아지는 영도다리 주변을 헤맸습니다.
덕분에 손인호 선생으로부터 당시 일화를 들을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위안이었습죠.
현인 선생의 출생지를 놓고 많은 시비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97년도로 생각 됩니다. 부산 구포가 출생지다. 아니다 부산 영도가 출생지다..
각 자치 단체가 서로 현인 선생 박물관, 노래비등을 건립 할려고 올바른 표현으로 싸움질을 좀..
심하게 했었습니다. 그때 영도구청 문화 관광과 소속 직원과 같이 현인 선생 출생지를 찾아
영도구 이리저리 뛰어 다녔던 생각이 납니다. 같이 출생지(생가)를 이리저리 찾아 봤지만 못 찾았습니다.
집터가 확실하지 않았죠..그리고 다른 문제등이 걸려서 그당시 영도구에서는 포기를 했었습니다.
다만,, 영도 다리에 현인 선생 노래 동상을 설치 했었습니다.
지난 2005년, 부산mbc를 통해 '특집 다큐멘터리ㅣ현인 3부작'을 구성,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출생지, 부산에서의 유년시절을 확인해보기 위해 직접 호적등본까지 떼어 확인작업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 부산 영도구 영선동 183번지에서 출생, 이후 외갓집이 있던 구포에서 자라면서 '구포보통학교(지금의 구포초등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영주보통학교로 전학,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상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방송되면서 당시 영도구-북구-서구 간의 현인논쟁이 일단락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특집방송 당시 취재, 정리한 글이 아래 [인물탐구ㅣ'광복 이후 가수 1호' 현인]입니다..요.^^
샘, 다음에 만나면 자세한 애기 하겠습니다.
영선동은 1동과 2동이 있는데, 여기서는 영선2동 183번지 일겁니다..
그곳은 피난민들이 아주 많이 살아서 우리들은 피난쪽방이라고 했습니다.,,청학동 해돋이 마을과
영선동 이쪽이 아직도 열평도 안되는 작은 집들이 무수히 많습니다.번지 없는 집들이 무자게 많습니다.
아무튼 유쾌한 자료이고 소식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