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 양진당 강시 신도비명 《진양 강씨 공목공파의 인물과 학문》 –남명학연구소저
《양진당 강시》, 《riss.kr》-진주강씨 역사의눈 편저
학술대회 : 2016. 4.29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대강의장
1. 기조강연
진양강씨晉陽姜氏 공목공파恭穆公派의 형성과 전개 · 허권수 교수(경상대학교)
2.- 논문발표
(1)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의 시문학詩文學 연구 · 구지연 교수(선문대학교)
(2)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의 시세계詩世界 강혜종 교수(연세대학교)
(3)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회화와 이에 대한 조선초기 문인들의 제화시題話詩
- 윤호진 교수(경상대학교)
(4) 진주강씨 문중의 연행록燕行錄 전통傳統과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의 중국체험中國體
驗 -허경진 교수(연세대학교)
(5) 목계木溪 강혼姜渾의 생애와 문학 - 심경호 교수(고려대학교)
(6) 심재心齋 강징姜澂의 관각생활館閣生活 연구 - 신두환 교수(안동대학교)
3. 종합토론
※ 좌장 – 최석기(경상대학교)
- 이영숙(경상대학교) - 강동욱(진주교육대학교)
- 문정우(경상대학교) - 강정화(경상대학교)
- 이상필(경상대학교) - 김동석(성균관대학교)
건문建文 3년 경진(정종 2년, 서기 1400년) 겨울에 진양晋陽 강
공姜公 회백淮伯이 그의 아버지 공목공의 행력을 가지고 와서
묘비문을 써주기를 청하며 하는 말이
“우리 아버님은 근검으로 몸을 다스리시고 벼슬하실 때에
는 신중을 기하여 그 명예와 공적이 크게 나타난 분으로 가
히후세에 전할 만한데 진실로 비석에 새겨두지 못하면 내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며 지팡이를 던지고 이마를 조아리
며 울면서 간청하니 나도 인척관계일 뿐더러 공의 부자와 안
지 오래되므로 의리상 사양치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시蓍로 진양에서 이름난 집안이
다. 5대조는 국자박사 계용啓庸이고 그의 아들은 전중내급사
인문引文이다. 다 높은 선비로서 이름이 났다. 박사공이 처
음 일본 통신사 서장관이 되어 현지로 가실 때 아들 급사공
이 따라가셨다. 그 후 원나라가 일본을 칠 때에 급사공이 길
을 잘 안다 하여 다시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험난한
풍랑과 전쟁으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서 벼슬
을 그만 두고 자손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선비文士가 아니었으면 이 같은 험난한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니 너희는 선비로 벼슬을 하지 말라.” 하셨다.
그 때문에 아들 감찰어사 사첨師瞻과 손자 판도정랑 창귀
昌貴가 모두 서리(과거를 거치지 않음) 벼슬을 하셨으니 어사공
은 공의 증조부요, 정랑공은 공의 조부인데 후에 문하시중
진원부원군에 증직되셨으며, 부친은 봉산군으로 문경文敬 시
호諡號를 받은 군보君寶이시다.
부친 문경공은 성품이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셨으며 조
부 진원부원군도 선비의 공부로 선세의 가업을 이어 가도록
과거 보기를 허락하니 또 다시 유학을 일삼아 벼슬이 재상宰
相에 이르러 집안이 흥왕했다. 아! 급사공의 훈계는 일시적
인 곤욕을 징계했던 것으로 동정東征(일본을 침)의 군사(원나라
군사)들이 바다에서 죽어 고기 뱃속에 장사하여 돌아오지 못
한 이가 많은데 이 어찌 선비 탓이라 할 것인가. 진원군이
그 아들을 가르침과 문경공이 집안을 일으킨 것은 다 하늘의
계시로 그의 한을 씻고 경사로 창성케 한 것이리라. 문경공
이 계림김씨 전객령 여진呂珍의 딸을 맞아 지원 기묘년(1339
년) 겨울 12월 22일 공을 낳으셨다. 지정 병술년(1346년) 공
의 나이 8세때 집안 음덕으로 연릉직을 보직 받고 19세 되던
정유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으며 임인년에 대관서승에
제수 되었으며 다시 낭장을 두 번 지내고 감찰규정監察糾正
을 겸직하고 전공좌랑典工佐郞과 광흥창사廣興倉使를 거처 번
거로운 일을 신속하고도 민첩하게 다스려 가는 곳마다 칭송
이 자자했다. 합문인진부사가 되어서는 행동을 예법에 맞도
록 하여 조열대부(朝列大夫, 正四品)의 품계를 더했으며 외직으
로 합천 고을을 다스렸는데 정치 행적이 현저하였다. 전법판
도전리典法判圖典理와 총랑 중현윤위전중과 정삼사 좌윤, 봉
순대부로 군기시 판사를 지냈으며 강릉도 안찰사로 나가니,
이때가 홍무 무오년(1378) 추동이다.
이듬해인 기미년(1379)에 통헌판선공시通憲判繕工寺에 제수
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從二品)에 승진되었으며 또 이듬해에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가 되었을 때 부친(문경공)께서 세상
을 떠나 장례를 마치고 겨우 일 년 만에 다시 좌상시에 기용
되고 임술년에 판도판서로 전직되고 이어서 밀직에 들어가
부사副使가 되었고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에오르셨다.
그 해 겨울에 광정대부 판후덕부사匡靖大夫·判厚德府事로 옮
기어 판전의시사 상호군判典醫寺事上護軍을 겸직하고 계해년
봄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에 배명하고 겨울에 진산군晉
山君에 봉하니 계급은 중대광(重大匡, 從一品)이었다.
경오년 여름에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판도평의사
사사가 되고 겨울에 추충보조공신 대광상의문하찬성사와 동
판도평의사사사 판선공시사 좌우위 상호군의 직첩을 더하니
이것이 공의 관직 경력이다.
대부인(모친)이 여전히 건강하고 공의 형제와 아들이 계속
하여 정승 자리를 이어 받으니 일세에 혁혁한 빛을 발하여
강씨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임신년 공의 나이 54세에 대부인이 별세하니 공이 삼년 시묘
侍墓를 하니 모든 사람이 공의 효성을 아름답게 여기었다.
건문 2년(1400) 경진 11월 26일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
니 공의 나이 62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자 유사를 명하여
호상케 하고 시호諡號를 공목恭穆으로 내렸다. 이듬해 3월 갑
인에 임강현 동쪽 언덕에 예장으로 모시었다.
공은 천성이 삼가고 정성스러웠으며 풍채가 엄중하며 말과
행동을 예법에 따르고 부모에 효도하고 집안을 검소하게 다
스렸으며 안팎으로 벼슬을 지내되 법을 지켜 아첨하지 않으
니 사람마다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부인 하씨河氏는 중대광 진천군 시호 원정공 하집의 따님이
다.
아들은 다섯을 두었는데, 큰아들 회백淮伯은 병진년 진사
에 급제하여 대간을 역임하였으며 판밀직을 지내고 교주와
강릉도 관찰사를 거쳐 정당문학에 승진되어 돌아와서 대사헌
을 겸했는데 언사로 파직되었다. 기묘년 겨울에 다시 기용되
어 정헌대부(正二品)로 계림부윤으로 나갔다가 경진년 가을에
동북면 도순문사를 지냈다. 둘째 아들 회중淮仲은 임술년에
진사에 등과 하여 가선대부 홍주목사를 지냈으며, 셋째 아들
회순淮順은 사재소감을 지냈고, 넷째 아들 회숙淮叔은 제위장
군이며, 다섯째 아들 회계淮季는 기사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중대광 진원군이 되었으나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손자와 증손 남녀가 약간 명 있으니 정당淮伯은 두 번 장
가를 들었는데 첫 배위 정씨鄭氏는 중대광 봉원군 양생良生의
딸로 공보다 먼저 별세하고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으니, 종덕
宗德은 사헌부 감찰, 우덕友德은 감문위산원, 끝은 진덕進德
이며, 맏딸은 정언 김장金張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어리다.
다음 배위 이씨李氏는 중대광 평양부윤 존성存性의 딸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목사(牧使, 淮仲)는 판사 남징南徵의 딸을 아내로 맞아, 큰아
들 안수安壽는 제용고 주부이며, 둘째 부인 최씨崔氏는 지성
주사 영寧의 딸로 아들 둘은 모두 어리고, 소감(少監, 淮順)은
내시 전이소全理昭의 딸을 맞아 딸을 낳았는데 어리고, 장군
(將軍, 淮叔)의 배위 안씨安氏는 찬성사 소沼의 딸인데 아들 딸
둘을 낳았으며, 재취 홍씨洪氏는 자식이없으며, 감찰監察은
전서 이정견李廷堅의 딸을 맞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다 어리
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저 진양 땅에서 강씨姜氏들이 살았는데 대대로 선비가 태
어나 왕정을 드러냈네. 장하도다 박사공(博士公 : 啓庸)이 사신
使臣으로 일본갈 때 아들引文도 따라가니 효자孝子가 아니던
가. 후일 효자引文가 사신使臣으로 일본 갈 때 풍랑과 전쟁으
로 구사일생九死一生 겨우 살아와 자손에게 훈계하길 너희들
은 선비 되지 말라했네. 선비가 아니었던들 어찌 혼魂을 놀
랬으랴. 자손들이 교훈 받아 학문에만 전념하다 3대 후에 다
시 나가 가문에서 드러난 문경공文敬公(군보君寶)은 덕을 쌓
아 경사慶事 났네. 승상丞相자리 이어가서 문벌門閥이 번창했
네. 위대한 공목공恭穆公(시蓍)은 위풍도 당당하고 공평무사
公平無私 행한 업적 나라에 모범되니 그 공덕을 길이길이 후
세에 전하고자 태사太史 글을 받아 묘비에 새기노라. 내 이
말은 아첨이 없어 후세에 전할 만하니 천 백년 지나도 변치
않고 빛나리라.
좌찬성左贊成 양촌陽村 권근權近 지음
양진당養眞堂 진주강공晉州姜公 신도비명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가 쓴 탁본拓本 일부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1853~1937) 선생은 고종시대의 문신
文臣이자, 서화가로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윤두서尹斗緖의 10
대손이다.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 해관海觀, 수간睡
幹, 장위산인獐位山人 등이 있다.
19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에 들어갔고 이조참의
吏曹參議, 대사성, 도승지,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
다.
1895년 을미사변 후 법부·탁지부·내무부 등에 수차 임명받
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근교의 장위산에서 ‘장위산인獐
位山人’이라 부르며 은거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조약 이후 일본정부가 남작男爵 작위를 주
었으나 받지않고, 절의를 지킨 군자君子로서 글씨와 그림에
도 뛰어나, 해서楷書와 행서行書 금석문金石文을 많이 썼으며
죽란도 잘 그렸다.
문중 선인先人이 석촌선생과 교유交遊를 맺고 이분을 통해
공公 서거 후 529년 무진 1928년 석촌선생이, 양촌陽村 권근
權近이 찬한 양진당 신도비문을 썼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
을 금할 수 없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탁본이 소장되어
있음을 김만석金滿析 선생에 의해 발견되어 문중자료로 전하
게 된 것, 또한 공목공 가家의 크나큰 행운이다. 양진당의
신도비가 북한 땅 묘역에 건재할 것임을 확신하며 통일되면
후손들이 찾아보기를 학수고대한다.
첫댓글 본 자료를 다시 중복해 올리는 것은 공목공의 신도비 탁본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건문3년동>이라 되어 있지요
양촌집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 최초의 족보인 1685년 남한보이후
모든 족보는 건문2년동 또는 건문2년 경진동 또는 겨울로
앞선 글에서 제가 수정해야한다고 올린 적이 있습니다
본글내용 앞부분은
건문建文 3년 경진(정종 2년, 서기 1400년) 겨울에는
건문建文 2년 경진(정종 2년, 서기 1400년) 겨울에라 해야
남한보이후 우리 족보와 일치되나
이는 신도비에서 볼 수 있는 <건문3년동>이라 해야 한다는 것이고
공목공 묘지명 안장시점인 <이듬해 3월>도
<이듬해 2월>이라해야 양촌집 원문과 일치해요
다음은 양촌집 원문사진 1/2/3/으로 사진편집해 올립니다
자세히 보시면 해당부분들이 대조되실 겁니다
우측 첫머리부분 <건문3년동>
좌측하단 둘째줄 부분 <명년2월 갑인 예장> 사진을 확대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본글 내용중
목사(牧使, 淮仲)는 판사 남징南徵의 딸을 아내로 맞아, 큰아
들 안수安壽는 제용고 주부이며, 둘째 부인 최씨崔氏는 지성
주사 영寧의 딸로 아들 둘은 모두 어리고,
에서 둘째부인 이하는 원문에 없는 가필(加筆)인 것이
묘지명 원문 아래사진 중간부분에서 확인되며
통정공께서 살아계실 때(1401년 비문 요청)의 시점에는
의령남씨만 계실 적이고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姜淮仲으로 검색하면
의령남씨는 1407년에 돌아가시고 1413년 전주최씨를 다시 취하고
그사이에는 비첩을 두셨다는 개인정보의 글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역사적 사실은 가필은 지양하고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