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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화
[崔道華, 1883~1954]
ㆍ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
‧ 1884년 전북 진안 출생
‧ 원기 7년(1922) 입교
‧ 진안․전주․마령교당 순교 / 만덕산 주무 / 수위단원 역임
‧ 법랍 24년
‧ 정식 법강항마위
‧ 원기 39년(1954) 2월 3일 열반
‧ 원기 73년(1988) 대호법 추서
삼타원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불공을 하며 교화하는데 주력하셨다고 합니다. 교단 창립 유공인들의 입교연원이셨으며 현 서울과 전북 교화에 토대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1편 신성 중>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기 들어와서 세세생생 이 회상을 떠나지 않고 대종사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최대의 정성과 신심을 가지고 스승님들께 배워 나갔다. 그래서 나는 스승이 많이 계신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인도사(引導師)는 삼타원 최도화(崔道華)정사이신데 내 나이 열한 살 때 만덕산으로 대종사님을 뵈오러 가자고 하며 [너의 원(願)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었다.
그 당시 세계전쟁이 일어나서 세상이 혼란하던 때라 [내 생각 같으면 큰 성현이나 위인이 나시어 대포 하나를 크게 만들어 싸우려 할 때 대포를 펑 터뜨려 싸울 수 없게 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바로 그 대포 만들 줄 아는 분이 만덕산에 계신다]고 하시며 [그분이 바로 대종사님이시라고] 해서 우리 어머니 〔안경신정사〕와 할머니〔노덕송옥〕와 작은 아버지하고 몇분이 최도화정사의 인도로 만덕산에 가서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그때 다른 분은 다 내려 가시고 나 혼자만 있는데 저녁에 변소 가기가 걱정이 되었다. 대종사님 모시고 살았지만 팔산 대봉도가 나를 보살피시고 위안 주시느라 애쓰셨다. 그래서 초도사(初導師)가 팔산대봉도이시다.
.본명은 인경. 법호는 삼타원(三陀圓). 법훈은 대호법. 전북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 개금실에서 부친 순화(順化)와 모친 진정만옥(陳正滿玉)의 일곱자매 중 6녀로 출생. 13세에 원 없는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비관하여 28세에 동네 방죽에 투신자살을 기도, 지나가던 여승에 의해 구해져 그로부터 출가하여 한강변 종남산 미타사, 계룡산 동학사에서 나반존자 주력수행을 했다. 이후 태을주(太乙呪) 수련을 하다가 각지 용한 기도터를 찾아다니며 기도하는 한편 비단장수를 하며 절집의 화주 노릇도 했다.
간곡한 기도와 간병으로 진안 좌포 김승지의 폐병에 걸린 아들을 낫게 하여 신임을 얻어 만덕산 산제당과 그 일대의 산전을 관리하게 되면서 임실 개금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최도화는 산등 넘어 미륵사에 내왕하며 화주 노릇을 하게 되고 여기서 정산종사를 만나 생불님으로 받들게 되며,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왕생불님을 만난 법열로 교화, 진안 마령의 전삼삼ㆍ전음광 모자를 이끌어 전주로 이사하게 하여 전주에 회상 창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소태산은 최도화를 길잡이로 하여 서울에 가서 박사시화를 통해 이동진화ㆍ이공주 등의 창립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정산은 최도화에 대해 ‘전북 회상과 서울 회상의 총연원’이라고 했다. 최도화는 거진출진으로서, 공식 직명은 ‘행상 순교(行商巡敎)’로 319명의 입교 연원을 달았다. 타고난 강인한 기질, 담이 차고 한번 하기로 한 일은 기어이 끝을 보고 마는 성격에 주선력과 계획성이 있어 회상 창립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최도화는 미륵불의 출세와 용화회상 건설에 관심이 많았다(《대종경》 전망품16). 소태산을 미륵불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으며 궁색하게 사는 양하운 대사모에게 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아들 조갑종이 전무출신했다.
* 희사금 내고 혼난 조갑종
조갑종이 영산에서 저축조합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마침 총부에서 금강원을 신축한다기에 공사를 거치지 않고 30원을 희사금으로 내놓았다. 대종사가 이 소식을 듣고 꾸짖었다.
『아무리 총부에서 조실을 짓는다 할지라도 공중돈을 결의도 없이 마음대로 처리하면 어떻게 되느냐?』
대종사는 이와같이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간에 공사없이 단독으로 처리한 일을 꾸짖고 경계하였다. 눈앞의 현실적인 이익에만 끌리지 않았다.
교단 초창기, 총부는 어떻게 가난했던지 남자양복 다섯 벌을 준비해놓고, 남자들이 외출이나 출장을 갈 때에는 교대로 입었다. 그 양복 다섯벌은 황정신행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이처럼 가난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총부 살림에는 큰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종사는 정당한 목적과 정당한 방법이 아닌 재물은 결코 취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공명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단독처사라든가 아니면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을 대종사는 단호히 배격했던 것이다.
* 이동진화와 최도화의 인연
비단장수 최 여인은 전라도 곳곳은 물론 서울까지 아니다닌 곳이 없었다.
변산에서 대종사를 만나고 그 1년 뒤인 시창 8년 가을이었다.
어느날 기차를 타고 가다가 구례 화엄사에 불사를 하러 간다는 한 50대의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본시 남원사람으로 청춘에 홀로 되어 오직 부처님에 의지하며 화엄사 화주 일을 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도화는 당래 미륵존불 출현의 소식을 전하였다. 박씨는 환희 경모하는 마음이 우러나 후약을 하고 헤어졌다.
이를 기연으로 최도화는 박씨가 임시 머물고 있다는 경성으로 대종사를 안내하기에 이르렀다. 그 집은 박씨의 동생의 딸네 집(진주현 성성현 부부의 집)이었다. 진주현은 경성의전을 나온 내과 의사였다.
박공명선의 딸네집에서 사흘 밤을 유숙한 뒤 서중안은 당주동에다가 1개월을 계약하고 20여칸 자리 한옥을 빌렸다. 이것이 경성 임시 출장소였다.
4월 4일, 이궁가(李宮家)의 한 종친의 소실로 있는 여인인 이동진화가 박사시화의 인도로 대종사를 찾아왔다. 그녀는 전주 이씨로 본명은 경수였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한 가난한 선비집에서 태어나 5세에 부친을 사별하고 7세 때 진주읍으로 출가한 언니에게 의탁되어 14세까지 양육을 받았다. 이후는 서울 친척집에서 지내다가 18세에 이씨 문중에 출가하였다.
그녀는 이궁가에서 주는 혜택으로 물질적으로는 아쉬울 것 없이 퍽 유족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주위 환경이 뜻에 맞지 아니함을 한탄하여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다. 노상 위장병과 두통으로 고생하였다.
그녀는 처음 대종사를 대하고 머리를 굽히지 않고 그대로 평좌하고 대하였다. 궁가의 지체라 평민들을 대할 때는 언제나 그만큼 당당하게 처신하는 법이었지만 그 우아한 자태는 잃지 않았다.
대종사는 그녀를 한 번 보고 인물이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이 둘이 있는 것이요.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창생을 건지는 일인 것이요." 엄숙하고 정중한 이 말에 그녀는 크게 느낀 바 있었다. 어떤 위압감과 아울러 가슴을 울리는 감동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대종사 말이 그녀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사는 것이 꽃병에 든 꽃나무와 무어가 다른가. 언젠가 시들면 버림받고 말 꽃나무 신세) 그녀의 나이 서른 하나, 날이 갈수록 건강은 약화되어 갔다. 피곤한 나날이었다.
이동진화(경수)는 이 세간 생활을 청산하고 일생을 수도에 전념할 생각을 하였다.
이동진화가 대종사를 만난 보름 뒤에 그녀의 침모로 있는 김보인이 대종사의 제자가 되고 삼매화란 법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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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의 최도화
그는 열렬한 공심가로 진안 출장소의 제반 회무에 진력하여 노력한다함은 우리 일반이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마는최근에 이르러 氏의 열성은 더욱 도수를 가하여 침식을 구망하고 동서 분주하며 공무에 노력하는 그 상태는 보는 자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무한한 감격을 일으키는 동시에 또 한편으론 끝없이 안타까운 생각을 나게 하고 있습니다.본관에서 출장 중인 金幾千 교무가 그 광경을 보고 역시 안타까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물어 가로대,「도화씨, 당신은 매일 그렇게 하고도 된 줄 모르십니까?」「사람이 무엇에나, 낙 붙인 데가 있고 보면 여간 몸이 좀 되다 할지라도 그 낙으로 능히 그 고됨을 잊을 수 있는데 나는 이렇게 일하고도 한 가지의 낙이 있어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어찌 다행히 이 마음이 났던고 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눈이 붉은 내가 어찌 다행히 공사 를 위하여 분투할 마음이 났던고, 나의 마음을 내가 생각하여 보아도 하도 신기하고 하도 고마워요. 그래서 나는 이 낙으로써 일만 가지 고통을 다 이기고 살아 갑니다」하였다.*「주산종사문집」(이리, 교화부, 1980), 55∼56면
ㆍ 사람을 두루 살리시는 대종사님
만덕산(萬德山) 초선지에서 선(禪)을 날 때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게 되었는데 대종사께서 사산(四山)을 부르시어 머리에는 수건을 쓰게 하시고 도포(두루마기)를 벗게 하고는 최도화 할머니를 따라가게 하였다.
사산(四山)은 출가전에 면장을 지내면서 머슴도 거느렸고 기골(氣骨)이 장대(長大)하여 힘이 좋으셨다. 마을의 아는 집을 찾아가서 최도화 할머니가 쌀을 달라하니 주인이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 하였다.그러자 최도화 할머니는 쌀을 많이 얻으려고"내가 옆에 머슴을 데려 왔으니 쌀 한 짝을 주시오" 하였다.
옆에 있던 사산은 자기 더러 머슴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에 분통이 생겼다. 할머니에게는 말을 못하고 조금 올라오다가 사람 하나를 만나서 지고 있던 지게를 달라 하였다. 2되 정도만 주면 살 것을 2말을 퍼주고 바꿔서 지게에다 쌀을 지고 씩씩 거리며 올라오게 되었다.
선실(禪室)에 가까워 오자 대종사께서 집앞에 나와서 크게 사산의 이름을 불렀다. 사산은 조금 위안이 되었다.사산(四山)은 대종사께"최도화 할머니가 저를 머슴이라 합디다." 하니까
대종사 말하기를"그년이 그래!" 하는 말에 분통이 싹 가셨다.
그 뒤에 최도화가"쌀을 많이 얻으려고 내가 머슴이라 하였습니다." 하니까 대종사 말하기를"대체 잘했다." 고 하였다.
*최세진 교무님 제공. /82년 월간교화
ㆍ 교단의 삼대여걸 가운데 한 사람인 삼타원 최도화(三陀圓 崔道華, 1883∼1954) 대호법의 입문은 정산종사와의 인연으로 비롯된다. 최도화와 정산 송규의 만남은 만덕산 미륵사에서 이뤄진다.
부안 변산에 봉래정사를 지은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를 월명암에서 내려와 당신곁에 있도록 했다. 백학명 선사에게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외삼촌과 생질 관계가 아니라 실은 사제지간임을 밝히고 그간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했다. 이에 학명선사는 형 정산 대신 아우 주산 송도성을 당신 제자로 주라고 요구했으나, 대종사는 허락지 않았다.
대종사, 새 회상 공개를 위한 시기가 임박함을 느끼고, 원기 7년(1922년) 9월 정산을 불러 "법연을 모아야 겠다. 어디든 네 발걸음 내키는 곳으로 가보아라. 그러나 전주는 들릴것이 없나니라."
이에 정산종사, 전주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길을 재촉하는데, 중도에서 스님 한 사람을 만나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이 진안 만덕산 미륵사(彌勒寺) 였고, 그 스님이 바로 그 절 주지였던 것이다.
정산종사, 미륵사에서 겨울을 나며, 수행에 정진하던 중 그 절 화주(化主)인 최도화를 만났다. 최도화는 전북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 가야금실에서 부친 최성명(崔成明)과 모친 진정만옥(陣正滿玉)의 일곱남매 가운데 셋째 딸로 출생했다. 아홉 살때 어머니가 읽어준 고대소설 〈소대성전〉을 듣고 세상사에 뜻이 없고 오직 소설의 주인공인 백운도사 같은 도인을 만나 도통하는 꿈 뿐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13세에 조대진과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으나, 삶에 만족을 느끼지 못해 28세에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비구니 스님(정인도)이 목숨을 구해줬다. 이러한 인연으로 여승이 되어 동학사 등지에서 수년을 지냈으나 도통을 이루지 못하자, 전주로 내려와 만덕산 미륵사 화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화주는 인가(人家)에 다니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법연을 맺게 하고, 시주(施主)를 받아 절의 양식을 대는 승려를 말한다.
최도화, 정산종사를 만나고 그 인격에 감동이 되어 '생불님'이라 숭배하게 되었다. 최도화가 이곳 저곳을 다니며, "미륵사에 생불님이 계신다"고 입소문을 내자, 많은 사람들이 미륵사로 불공을 오게 되고, 가난했던 절이 갑자기 부유하게 됐다.
정산종사, 더 이상 머물러 있기가 곤란하다 느끼고, 인편을 통해 대종사에게 그간의 경위를 전해 올리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변산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다.
정산종사, 한 등에 불을 밝혔으니 수없는 등불이 연이어 켜질 것을 내다 보고, 봉래정사로 돌아와 대종사의 교서 초안 작업을 도왔다.
최도화는 주위에 수소문하여 정산종사의 자취를 따라 봉래정사에 당도해서 마침내 주세불인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입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