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출장시 연구위해 사비털어 책과 소품 구입했다
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에서 청자사업소로 바뀌고 나서 나는 연구실장을 맡아 전체적인 청자생산 작업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형과 조각 등에서는 일부 직원을 채용해 별도로 가르치면서 일을 맡기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유약제작과 청자를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업은 내가 직접 해야만 했다.
당연히 당시 직원들에게 내가 그동안 익힌 기술과 노하우는 근무하는 동안 계속 전수해주었다. 이일은 내가 퇴직할때까지 계속됐다.
이 결과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후배들은 청자사업소에서 근무를 한 후 개인요를 창업해 청자촌에서 함께 강진 청자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때 지난호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시기 강진청자의 역사와 재현과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청자촌을 찾아온 많은 귀빈들을 내가 직접 안내하고 강진 청자의 역사와 재현과정, 현재 생산되는 청자와 과정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유명한 정치인과 기관단체장 등이 잇따라 강진을 찾아와 설명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한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내가 청자에 대해 지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고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타지역의 도자기 제작하는 곳을 찾아가 견학을 하기도 하고 중국이나 일본 등에 도자기로 유명한 마을이나 기관, 업체 등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때 가는 비용은 당연히 공무상 출장이기 때문에 출장비가 지급됐지만 그곳에서 구입해야만 하는 자료나 소품 등은 별도로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비로 구입해야만 했다.
그 외에 별도로 청자를 위한 연구나 재료구입비 등도 지원받지 못했지만 나는 열정 하나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
추진위원회 시절 나는 가마터 감시원으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수당형태로 한달에 8천원정도를 받았고 사업소 시절에도 월급을 받았지만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청자 연구를 위한 책이나 소품 등을 구입하는데에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런 연구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청자에 대한 기술에 대한 발전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중국이나 일본으로 견학을 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가스가마 도입을 위해 일본을 찾은 적이 있었다. 이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윤도현씨가 동행했다. 윤도현씨는 원래 칠량면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약사였다.
그랬던 그가 나와 함께 어울리면서 청자의 매력에 빠지게 됐고 가스가마 도입을 위해 견학을 갔던 것이다. 이후 윤도현씨는 약국운영을 접고 청자촌에서 최초로 도강요라는 개인요를 만드록 청자사업에 뛰어들었다.
청자재현에 성공한 이후 강진에서 생산된 청자는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청자재현 사업을 주도햇던 정채균 군수도 강진 청자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정 군수는 장성출신으로 서예를 아주 잘했던 군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손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정 군수가 직접 서예로 적은 ‘도자부로’라는 글귀를 써서 청자를 생산하기도 했다.
2000년대이후 청자사업소에서는 일본에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때 전시실을 찾아온 한 여성 관객이 있었다. 그날 전시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그 여성이 찾아와 낮에 봤던 청자를 구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돈을 얼마를 달라고 하든 줄테니 팔아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강진 청자는 일본에서도 그 고급스러움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은 일화였다. <정리=오기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