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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림병 3
화장을 끝낸 지함과 박지화는
환자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화담은의원처럼
능숙하게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자, 자네들도 요기를 해야지.
그렇게 몸을혹사했다가는
자네들도 원귀가 되고 말겠네."
환자들 수발로 정신이 없었을 텐데,
어느새 화담은
지함과 박지화가 돌아올 시간까지 맞추어
밥을지어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화가 피식 웃음을 터뜨려놓고는
얼른 그 웃음을거두었다.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군요. 이런 경황중에도
웃음이 나오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치 저까지
시체가 되어 불 속에 던져진 기분이었는데…
선생님이손수 밥을 지으셨다니까
웃음이 나지 뭡니까?"
화담도 빙그레 웃으며 밥상을 들이밀었다.
"신기할 것 없네.
죽음이란 태어날 때부터 바로옆에 있는 것,
짧은 생명에 취해 그것을 잊고 살아갈 뿐.
자, 들게나."
병이 옮을 것을 저어하여 익히지 않은 반찬은
올리지 않았다.
찬이라곤 배춧잎 건더기가 몇 개 둥둥떠 있는
짠 소금국뿐이었다.
지함과 박지화는 맛있게 밥을 먹었다.
여행하는동안 거친 반찬에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시장이 더없는반찬 노릇을 해준 까닭이었다.
지함은 정신없이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러고나니 지함의 가슴에
슬그머니 비애감이 스며들었다.
조금 전에는 시체를 불질렀고
지금 옆 방에서는환자들이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맨 첫집에서 시체를 보았을 때 같은
참담한 비애는아니었다.
모든 것이 이렇게 서로 무심하게흘러간다는 것을
체득한 데서 온 비애였다.
그렇다.
세상은 이렇게 저마다 제 운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이미 불타버린 시신들도,
옆방에서 신음하고 있는환자들도,
지함 자신도…
마당 곳곳에 피워올린 모깃불 연기가
온 집을감쌌다.
연기가 너무 지독해서 눈이 다 아릴지경이었다.
벌레들이 다른 병을 옮길까봐
화담이피운 것이었다.
세 사람은 마루 한 켠에 앉아 우두커니 모깃불을
바라보았다.
화담은 가끔 마당에 내려가 모깃불이꺼질세라
뭉게뭉게 연기를 품으며 타고 있는 풀더미를살폈다.
"애석한 일일세.
기의 흐름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못해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가다니…"
"기의 흐름을 모르다니요?"
박지화가 물었다.
"기의 흐름.
올 여름에 염병이 창궐하리라는 것쯤은
봄부터 알 수 있었다네."
"그걸 백성들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러게 답답한 거네.
인간의 육신이
잠시 머물렀다가는 허물이라 할지라도
그 무상함 때문에 더욱귀중하고 간절한 것일진대…"
화담의 탄식을 들으며 지함은 언젠가 화담이 했던말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막 여행을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산천에진달래가 피기 시작할 때였다.
그때 화담은 지난겨울의 수기가 약해서
올 여름엔 질병이 돌 거라고크게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이 또한오묘한 기의 흐름 아닙니까?
어찌 인간이 그것을거스를 수 있단 말씀입니까?
겨울의 수기가 약해 여름에 전염병이 돌고,
그로 인해 수많은 목숨을 잃는 기의 흐름을
하찮은 인간이 어찌 막을 수 있단말씀입니까?"
"좋은 질문을 했네.
나도 요즘에서야 그에 대해깊이 생각하고 있다네.
기의 흐름이 단순히 그저
흐르는 것만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일세.
인간사에서 시간이 한쪽으로 흐르듯
기의 흐름도 그런것일 테지.
발전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
시간도 기도 모두 한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세.
지금 닥친 고통이야 어쩌겠는가? 눈앞에 닥친 죽음은
어느 누구도 어찌 할 수 없다네.
그것이 기이며세상사의 비정함이지."
말을 마친 화담은 두 사람에게 들어가 자라는
손짓을 보냈다.
"선생님께서도 푹 쉬십시오. 저희야 아직 젊으니
이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난 조금 있다 들어가겠네. 혼자 생각할 것이많구만."
하루종일 걸었던데다 밤을 꼬박 새워 일을 한 탓에
두 사람 모두 몹시 지쳐 있었다.
두 사람은 방바닥에머리가 닿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했다.
동창이 훤히밝은 아침이었다.
해가 서켠으로 살짝 비켜섰을 때에야
두 사람은꿈도 없던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화담은 환자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고 있었다.
한여름에 뜨거운 불 앞에 앉아 있는데도
별로 더운기색이 아니었다.
어느 사이 모깃불까지 손을 봤는지
대낮인데도 모깃불이 여전히 숨막히게 타오르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자네들은 괜찮은가? 자네들까지 덜컥 앓아 누우면
다 늙은 노인네 혼자 어찌 할 도리가 없으니
조심들하게나.
끓이지 않은 음식은 절대로 입에 대지 말게."
그러면서 말끝에 화담은 서너번 짧게 혀를 찼다.
"스무 집 뒤주를 다 뒤졌는데도
쌀 한 가마가 채 안되는구만그래.
염병으로 죽지 않았어도 굶어죽을팔자들이었겠네."
"그러면 선생님께선 아예 주무시지도 않으신겁니까?"
"자네들 먼저 죽 한 그릇씩 비우고 나서
환자들에게좀 먹이게나."
놀라서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화담은 죽사발을내밀었다.
"선생님도 잡수셔야지요."
"나는 벌써 한 그릇 비웠네."
화담의 건강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운이 철철 넘쳐나는 듯 했다.
세 사람은 죽을 그릇에 나누어 담아
각자 몇 개씩들고 환자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있어도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철,
방에 군불을지펴서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치밀어 숨이막혔다
게다가 환자들이 내뿜는 숨까지도 덥기만했다.
그런 방에서 언제 전염될지 모르는 염병환자들을
일일이 부축해 음식을 먹인다는 것은
생사를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주검을 본 탓인지
지함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벌써 사라지고없었다.
죽을 먹은 환자들은 조금씩 기력을 되찾았다.
환자들이 입을 떼기 시작하자
화담은 의원부터물었다.
"여보시오, 근처에 의원이 있소?"
"예. 저기 저 집이 의원집 아닌교.
그이도 죽었을낍니더."
"알았소."
화담은 의원집에 가더니
한참만에 이것저것 약재를들고 와서
달이기 시작했다.
지함은 무슨 약이 무슨약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화담은 환자별로 약재를 따로따로 배합해
달여먹였다.
"아니, 선생님. 약도 지을 줄 아시는가 보군요."
지화가 약 짓는 스승의 모습을
처음 본다는 듯이물었다.
"처음이네."
"예? 그러다가 어쩌시려구요."
"어쩌긴. 이 땅의 지리와 물산을 눈여겨보면
이정도야 알 수 있지.
지리에 따라 물산도 다른 법,
지리에 따라 사람의 성정도 다르게 된다네."
"그야 그렇겠지만 병하고야…"
"아니네.
조선에서 생긴 병은 조선에서 나는 약으로다스려야 하네.
당귀는 본래 봉화, 울진, 평창, 삼척,
양양, 정선, 태백에서 잘 나지만
다른 지방에서는나지도 않을 뿐더러
나더라도 약효가 떨어진다네.
무슨 이치인가?
그 땅에 흐르는 기운이 그 약성에
맞게 깃들어야만 되는 까닭일세.
아무 데서나 그기운이 나는 게 아니지.
그 약성을 만드는 기운은 그지방에만 있는 걸세."
"선생님, 그러면 그 지방의 물산을 보면 지리를 알수 있고,
지리를 알면 물산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지함이 끼어 들었다.
"아무렴. 지리를 알면 물산뿐 아니라 인물도 알 수있고,
인물을 보면 그 사람이 난 지리를 알 수 있지.
조선의 백성을 보면 조선의 지리를 알 수 있고,
중국인을 보면 중국의 지리를 알 수 있고,
왜인을보면 왜의 지리를 알 수 있다네."
"그래도 어떻게 약을 지으십니까?
약성이 다 다른법인데…"
"약이란 그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엉키어 맺힌것.
그 약초가 난 땅을 보면 약성을 알 수 있다네.
원래 약성이란 공중에 무한히 널려 있는 법일세.
햇살이 충만한 것과 같다네.
기를 마시면 음식은 먹지않아도 된다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내내 아무것도 잡숫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네만 곧 알게 될 걸세.
하여튼태양에서 빠져나오는 기를 풀은 풀대로,
나무는나무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제게 맞는 것을받아들이네.
그래서 약성이 강한 것을 약초라이름하는 것.
그 약초가 띠는 빛깔을 보고도 약성을알 수 있다네.
붉은빛을 띤 약초, 검은빛을 띤 약초,노란빛을 띤 약초…"
"간지(干支)가 그런 물상(物象)을 이루는것입니까?"
"그렇지. 그것을 보는 것이 의약(醫藥)의기본일세."
"그렇게 알아가지고는 어떻게 조제를 합니까?"
지함이 다시 물었다.
"환자를 살펴야지.
이 지방에 나서 자라온 몸들이니
이 눈으로 다 보인다네.
사람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디가 실하고
어디가 허한지 알 수 있지.
이 지방에나는 약초에 뭐가 있는지 아는가?
당귀, 천궁, 길경,작약, 지황 같은 것이 있네.
내가 그것을 미루어보고, 또 산천을 둘러보았고,
그리고 이 사람들을보았으니
그쯤은 짐작할 수 있고말고."
"선생님께서 보신 우리나라의 지리와 물산은
어떠한것이었는지요?"
"그걸 보자고 나온 것 아닌가?
그러나 내 명이 경각에 달했으니 내가 다 말해줌세."
화담은 팔도를 나누어 그 지방의 지리와 인물을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지함과 박지화에게
이야기했다.
어느 지방의 흙은 모래이고, 어떤 지방은 진흙이고,
또 어떤 지방은 어떠 해서 물산이 다르고,
인물도다르다는 것이었다.
지함은 화담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지나온
경기,충청, 전라, 경상의 지리와 물산을 돌이켜보았다.
어쩌면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땅이건만
그렇게성질이 다를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람 얼굴이 모두제각각이듯이
땅의 얼굴도, 물산의 얼굴도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병도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이치로 다스려야 한다네.
황제내경(皇帝內經)>에보면
역리를 안 후에 의술이 있고
의원은 음양으로써질병을 다스린다
(易知然後醫術 醫者必求於陰陽)고
나와 있지 않던가.
인체란 우주와 다를 바 없는소우주라서
의원은 환자를 천문(天文)보듯 해야 하며,
또 지리를 보듯 해야 하는 것일세."
"사람의 몸을 어떻게 관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천문 지리를 보듯 하여도 달리 볼 게 있을 것입니다."
"오장 육부를 음양 오행의 행성으로 따져 보면 되는것은
자네도 잘 알 것 아닌가?"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장(五腸)을 보면
간이 목성(木星)이요,
심장은 화성(火星)이요,
지라는 토성(土星)이요,
허파는 금성(金星)이요,
콩팥은 수성(水星)입니다.
오부(午腑)로 보면
쓸개는 목이오, 소장은 화요, 위는 토요,
대장은금이오, 방광은 수입니다
그리고 눈은 목이오, 혀는화요, 입술은 토요
코는 금이요, 귀는 수입니다.
힘줄은 목이요, 혈맥은 화요, 살은 토요,
살갗은금이오, 뼈는 수입니다.
이로써 인체의 오행이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체는 밤하늘의 별처럼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네."
"신체에 생긴 질병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선 신체를 감별하는 것에 사주가 있네.
용신(用神)을 세우는데,
용신이란 사람에게 힘과기를 계속주는
하늘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니,
이로써
부모, 형제, 처자의 길흉을 보고 오장육부의 건강을
살필 수 있게 된다네.
그러고 나서 사상(四象)을 보고
오운육기(五運六氣)를 60갑자로 살펴 60종으로 나누어보면
그 허하고 실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것이라네.
사주 용신에는 무려 51만 종이 있으니
그만큼 사람마다 다른 체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세."
"쌍동이는 얼굴도 같고 목소리도 같습니다.
이러한사람들도 다릅니까?"
"다르다네. 일각이 달라도 다른 것이네.
이세상에서 똑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은
상원(上元),중원(中元), 하원(下元)의 세 갑자가 지나는
180년만에 한번 나오게 되는 것이니
그만큼 같은 사람은없는 것이네."
"그렇게 많은 종류의 사람, 그 많은 질병을
어떻게다스립니까?"
"명의(名醫)는 약을 여러 가지 쓰지 않는다네.
명의일수록 단방(單方) 치료를 잘 한다네.
많아야 세가지 약재 정도일세.
명의가 된다는 것은 사주를 한치의 틈도 없이
정확하게 감정하여 병인(病因)을찾아내고,
그 병인을 제거하는 약재를 정확하게 쓰는
눈을 가진다는 것이라네."
"약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약재에도 오행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좋은 약도 어떤 때에는 독이 되니
함부로 쓰지 않도록해야 한다네.
오행이 서로서로 생하는 약이기도하지만
또 서로 극하는 독이기도 한 이치와 같다네.
어떤 병에는 약이 되는 것이 어떤 병에서는 독이 되니
약 한번 잘못쓰면 오히려 중병을 얻게 된다네."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것도 의원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옵니까?"
"바로 그렇다네. 내가 그 말 한마디 듣자고
여기까지 너스레를 떤 것일세.
그것이 사람의 운명을감정하는 까닭일세.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인을찾아내어
가장 알맞은 약재로 처방하여 병을 없애는것,
그것처럼 사람이 가진 마음의 병도 깨끗이치료해야 하네.
자네가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일세.
진단만 하고 처방을 하지 못한다면 의원이 아니지."
"명심하겠습니다."
"허허허. 자넨 명의가 될 걸세."
이야기를 마친 화담은 껄껄 웃으면서 약을 달였다.
지함과 박지화는 화담이 달인 약을 환자들에게
차례로먹였다.
꺼지지 않을 듯 맹렬하게 타오르던 태양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미 입추도 지나 처서가가까워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환자 여섯 명이 모두 살아났다.
그러나누구 하나 살아남았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듯했다.
의식이 들고 이제는 살 수 있다는 믿음을가진 다음
여섯 명은 모두 한결같이 눈물을 흘리며
장탄식을 했다
그들에게는 그 폐허 같은 땅을 딛고
살아나갈 희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질곡의운명을 다시 헤치고 목숨줄을 잇는 것이
얼마나힘겨울 것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난 이가 원망을 하든 고마워하든
화담일행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다.
다음에 살아갈 일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떠날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맨 처음에 지함이 발견한 처녀가
그 중 회복이 가장빨랐다.
화담은 그 처녀에게 앞으로 이리저리
대처하라고 일러주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팔월 보름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염병이 휩쓸고 간 경상도 일대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들판의 곡식은 돌보는 이가 없어도
햇살에 영글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간혹 들판에나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눈에 띄었으나 모두비쩍 말라 있었다.
첫댓글 오늘도 즐독하고 갑니다.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십시오 ~~~ ^^*
많이 더우시죠?..
될수있는한 시원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