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음악은 잘 들어보면 다 아는 음악.....ㅎㅎㅎㅎㅎ락발라드로 변신했을 뿐 원작은 우리나라 것.
달고나
뭘 먹어도 허천 나고 배고픈 시절. 아이들에게 먹는 것처럼 달콤한 행복은 없다. 엉엉 우는 아이에게 입속에 사탕을 넣어주면 금방 울음을 뚝 그친다. 콧물을 질질 흘리며 울다가 바로 방긋 웃는 모습의 묘미는 바로 달콤함에 있다. 그 시절 사탕은 나무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우리가 먹을 것을 만끽할 수있는 날은 일년에 딱 세 번 있었다. 소풍가는 날, 운동회 그리고 어린이 날. 그것도 돈이 있는 집 아이들이나 가능했다.
먹는 게 얼마나 중요했으면 지금도 특별한 대상은 기억을 그대로 하고 있을까. 내가 사이다라고 처음 먹은 것은 봄소풍에서다. 기억하건데 서울사이다라는 것으로 귤껍질과 같은 색깔이었다. 그리고 당시는 콜라를 코라라고 했는데 5학년 때 냉천동 파란 대문집에 경애라는 부잣집 여자 아이네 집에 생일초대를 받고 가 검은 빛 톡 쏘는 맛을 처음으로 즐겼다. 당시 안양에는 역전 앞에 태극당이라는 빵집과 구시장 가는 코너 변에 프린스라는 빵집이 있었는데 위치만 알 뿐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그런 나는 태극당 때문 자전거를 공짜로 배웠다. 자전거가 없으니 타 볼 기회 조차 없던 그 시절이었다. 역전에 가면 자전거를 30원인가를 주고 빌려서 탄다는데 그 돈은 무척 큰돈이었다. 하지만 어느 동네나 같은 또래중에도 선각자는 있기 마련이다. 당시 황우 친구는 여러 모로 돋보이는 존재였다. 냄새나는 동네 짬밥을 질통에 지고 돼지먹이를 하루도 거르지 않던 열 살의 용감한 아이였다.
우리를 뛰쳐나온 돼지를 끌고 가는 친구의 유연한 폼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런 친구는 여름 한 철에는 태극당까지 내려가 께끼(아이스케잌)통을 얻어 메고는 찢어진 우산, 신발에 신문지를 걷으며 동네를 또 누볐다. 그런 친구가 자전거를 딱 타고 혜성 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안양국민학교에 몰려든 친구들, 우린 순번을 기다려 얻어 타곤 했는데 번번이 넘어지기만 했다. 아쉽지만 넘어지면 곧 다음 순번으로 밀려나 또 그 넘어지는 때를 기다렸다. 그래서 겨우 배운 자전거였다.
당시는 용돈이라는 게 없었다. 심부름도 그냥 무료 봉사고 어쩌다가 이발 비를 받고 남는 돈이 생기면 겨우 챙길 수가 있었는데 그것도 맘대로 쓰지를 못했다. 근검 절약에 저축을 강요하던 때라 모조리 저금통으로 직행을 했고 나중에는 강제적으로 통장을 만들고 저금을 해서 검사를 받기도 했다. 국산품 애용을 그때처럼 강조하던 때도 없었다. 하지만 문화니 동아니 하는 연필은 멍이든 게 많고 품질은 영 아니었다.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를 얻어먹으면 족하던 때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그 와중에도 왜 그렇게 군것질을 밝혔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그 당시 평소 눈치 보아 사먹은 것들은 따로 있다. 지금으로 치면 불량식품이라 할 것들이다. 당시는 강당 옆 교감선생님 사택 뒤로 후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담을 치고 막았지만 그때만해도 신익이네 옆집인 그곳은 불량 군것질거리의 집산지였다. 뜨겁게 달궈진 철통 안에 설탕을 집어넣으면 금세 양철통에서 구름이 피어올라 '구름과자'로 불리며 인기가 높았던 솜사탕을 모르는 아이들은 없다. 붉은 물감은 어찌 들인 것인지 보기에도 산뜻했지만 실은 불량하다 할 군것질의 대표주자가 아닐까 싶다.
소라와 번데기는 연탄불 위에 올려 진 큰 양은 솥안에 늘 담겨져 있었다. 꼬챙이 만들듯 만든 봉지속에 담아주던 번데기를 나는 무척 좋아했다. 당시는 설탕으로 만드는 과자들이 많았다. 설탕을 녹여 틀에 부어 군함, 남대문, 칼 등의 모양을 만들어 좌판에 올린다. 빈 분유통에 군함 남대문 칼 등의 제비뽑기를 넣고 물론 꽝을 더 많이 접어 넣는다. 해당하는 제비를 뽑으면 그 상품을 주고 꽝을 뽑으면 오백원짜리 동전만 한 설탕을 준다.
번번이 꽝인 것을 알면서도 도전을 서슴치않은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꽝을 많이 뽑았기에 그 당시는 꽝뽑기라 불렀다.그리고 추억의 달고나. 할아버지는 사과궤짝을 옆으로 눕히고 그 위에 반질반질한 철판을 깔았다. 옆에 연탄불이 들어 있는 화덕이 있고 도구라고는 국자 누름 판 모양쇠가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사과궤짝 앞에 앉아 궤짝 안에서 재료를 준비했다. 국자는 손잡이가 철사로 되어 옆으로 뻗어 있다. 달고나가 눌어붙어 시커먼 국자를 화덕에 놓고 달고나 한 덩어리를 넣는다. 달고나가 녹으면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다 녹아 끓으면 소다를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훼훼 젓는다.
그리고 적당히 부풀어올랐을 때 철판 위에 쏟아 붓고 누름판으로 꾹 눌러 납작한 판을 만든다. 그리고 모양쇠를 놓고 살짝 눌러 자국을 낸다. 한 번 쓴 국자는 물에 담가놓았다. 이 달고나를 모양대로 잘 떼어내면 한 번 더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재주 좋은 애들은 바늘에 침을 묻혀 떼어내기도 했고 어떤 장사꾼은 바늘로 떼면 무효라고도 했다.
이 모양쇠는 토끼, 말, 비행기, 코끼리, 우산, 호리병 등 여러 가지 모양인데 어느 것이나 가느다란 자루 모양이 들어가 있다. 이 모양쇠의 바깥부분을 떼어내면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모양쇠를 살짝 누르기 때문에 가느다란 부분을 살려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가느다란 데를 먼저 따 놓으면 조금만 건드려도 부러지기 때문에 넒은 데를 먼저 따내고 가느다란 데를 나중에 해야 한다. 성공을 하면 달고나 판을 하나 더 주었다. 달고나 판은 아주 미세한 기포가 많아 무척 어려운 게임이었다.
나는 지금도 번데기를 좋아하고 꽁지에 구멍을 내 쪽쪽 빨아 먹는 소라도 좋아한다. 운동회때면 으레 먹었던 아버지가 늘 일본말을 본 따 수르뫼라 부르던 오징어도 마찬가지다. 오징어채에 고추장을 발라 허구 헌 날 반찬통에 들어 있었기에 질릴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그런데 이 군것질들은 우리세대만 좋아했던 것인지 지금의 아이들은 관심이 전혀 없다. 나는 유성장에 가면 지금도 그 부스러기들을 찾는데 번데기를 찾는 사람들은 전부 내 또래의 사람들이다. 한번은 외국친구가 왔기에 골뱅이와 번데기를 맥주 안주로 내놓았더니 질겁을 했다.
어떻게 곤충 애벌레를 먹느냐는 것이었다. 하기는 나도 중국 성도에 갔을때 특별대접으로 정력에 좋다고 내놓은 지네와 풍뎅이를 보고 질겁을 했으니 사는 환경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 이해가 간다. 그것말고도 그 무렵에는 뽀빠이 자야 아폴로 라면땅같은 제품은 비닐 포장 안에 든 값진 과자들도 나오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불량식품을 늘 가까이해서인지 당시는 배도 많이 아프고 기생충도 많았다.
종기도 많이 난 게 다 그런 연유가 아닐까 모르겠다. 그럴 때 이명래 고약이면 그만이었다. 검은 타마구 같은 고약을 불에 녹여 바르던 이명래 고약, 그리고 까스명수. 회충 요충 편충... 당시 학교에서는 무료로 캬라멜 같은 약을 매년 신체검사 때 마다 받아 챙겼다. 나는 라면을 사 동생과 반을 뚝 잘라 그냥 생 것으로 먹기도 했는데 그 고소한 맛은 정녕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이들의 군것질은 그 누구도 못 막는다 싶다. 아이들 몸에는 거지가 산다. 당시 뻔뻔! 외치며 번데기 장수가 나타나면 아이들은 집에서 몰래 신발을 들고 나오거나 헌 우산을 가져와 눈 깜짝할 사이 바꿔 먹고는 시치미를 뚝 뗐다. 나도 엄마 안 신는다 싶은 하얀 신발을 들고나와 딱 한 번 바꿔서 먹었는데 동생 때문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로 팬티바람으로 마당에서 손 들고 벌을 섰는데 그 창피한 과거는 두고두고 내게 큰 느낌으로 남았다. 용감함은 떳떳 할 때 비로소 부쳐지는 훈장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