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치’는 염치(廉恥)의 작은 말로 ‘마음이 깨끗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를 말한다.
이 얌치가 없는 사람을 홀하게 일컫는 말이 ‘얌체’이다.
‘하는 짓이 잘고 다랍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로는 ‘착살하다’가 있다. 이‘착살하다’에 얄밉다는 의미를 더하면‘착살맞다’가 되고, ‘착살맞다’보다 큰 말은 ‘칙살맞다’가 된다. 또 ‘얌치(염치) 없이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예사롭다’는 뜻을 한 단어로 말하면 ‘빤빤하다’‘뻔뻔하다’로 표현한다.
이 단어들을 조합하면 ‘뻔뻔하고 착살맞은 얌체’가 된다.
‘뻔뻔하고 착살맞은 얌체’. 모든 나쁜 의미를 한데 모은 이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면 안되지만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꼭 이런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봄이 되면서 도심은 온통 아름다운 꽃들의 미소로 화사하다.
겨우내 온실에서 키운 팬지며 데이지, 베고니아 금잔화 등이 도로 가의 화단에 옮겨져 맘껏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계절을 잊은 회색 빛 도시에 색깔을 만들어 주는 꽃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런데 이렇게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꽃들 뒤에서 남몰래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 꽃을 옮겨 심고 가꾸고 물주며 관리하는 공무원들이다.
시민 모두를 위해 만든 도로 가 화단의 꽃들이 얼굴을 숨긴 일부 얌체들에 의해 시나브로 도둑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꽃이 사라지는 이유는 뻔하다. 누군가 몰래 그 꽃을 가져가는 것이다. 아마 꽃을 가져간 사람들은 그렇게 변명할 것이다. 꽃을 사랑해서, 꽃이 너무 예뻐서 가져갔노라고. 그 꽃을 자신의 집에 갖다 놓고 가꾸고 싶어서라고.
공공의 물건을 취한데 대한 미안함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꽃이 뽑혀진 빈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 앞에 있는 꽃의 모습만 보일 것이다.
참으로 착살맞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화단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빈 자리에 새 꽃을 옮겨심으면서 꽃이 사라진 공간보다 더 큰 쓸쓸함과 상실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화단의 꽃만이 아니다. 5월들어 전국 장애인체전이며 전국 소년체전을 맞아 청주시내 곳곳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꽃탑에서도 요즘 심심찮게 꽃화분이 사라지고 있어서 공무원들이 속을 끓이고 있단다.
전국소년체전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요즘, 화려한 꽃탑이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비어있는 것이 눈에 띈다.
사라진 꽃자리를 메우다 메우다 못해 당국에선 아예 하루 4명씩 당직을 서며 꽃탑을 지키고 있는데 그 인건비가 꽃값보다 더 든다고 한다.
꽃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뻔뻔하고 착살맞은 얌체’라는 욕을 해주고 싶어진다.
며칠 전엔 이런 일도 보았다.
전통있는 문학축제가 열리고 있는 한 도읍을 찾았을 때 일이다.
그 지역 자치단체는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학관을 세우고 문학관 앞으로 아담한 문학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의 조경을 위해 화단을 만들고 잔디를 심었는데 동네 주민 누군가가 그 잔디를 뽑아내고 상추를 심은 것이다.
한창 파릇파릇하게 자란 상추를 보면서 왜 그렇게 화가 나던지. 잔디도 공공의 재산인 것이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버리고 자신이 먹을 채소를 심은 것은 알뜰한 것도 아니요, 땅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 그저 뻔뻔하고 착살맞은 얌체의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얌체의 행위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처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익이나 공공 질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관이나 공무원은 무조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군림하려는 사람들, 집단으로 나서면 원칙도 기준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익명이라는 커튼 뒤에 숨어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비겁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뻔뻔하고 착살맞은
얌체’들이다. 좋은 사회가 되려면 얌체가 사라져야 한다. 대신 얌치와 염치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들이 진짜 시민정신을 지닌 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