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두번의 난을 거쳐 3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에건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정통성 문제였습니다.
지존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정통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노태우 부인 김옥숙이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이순자에게 평생을 형님대접을 하다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열린 축하연에서 "우린 국민의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니 그전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여 이순자의 허파를 확 뒤집어 버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계승이 아니라 형제들을 쳐죽이고 애비에게 씻을수 없는 불효를 한 채 왕이 된 이방원을 백성들이 곱게 볼 리 없었고, 이방원에게 이런 정통성의 부재는 평생의 약점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이런 정통성 부재의 약점을 씻고자 이성계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 둘과 사위 그리고 평생 의 벗들을 허망하게 잃은 이성계가 쉽게 이방원을 인정할 리는 만무한 것이겠지요
한편, 모든것을 잃은 상왕 태조는 함경도 함흥으로 은거 하여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정종때 개경으로 환도) 이에 차사를 보내어 환궁시키고 불화를 풀려고 했으나 차사를 활로 쏘아 죽여 보낸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겼다.
분노를 아직 씻지 못한 이성계는 다시 권력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했고, 이성계를 신처럼 여기는 지역인 동북면 (아직까지 개경민심이 대부분 이성계에 있음)에 나가 있던 안면부사 조사의란 자가 이러한 이성계의 마음을 읽고 이성계의 복귀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이성계의 마지막 몸부림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조사의의 난(태조계비 신덕왕후 친척- 왕세자 방석이 제거 되자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은 직접 출동한 이방원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진압되었고, 이성계는 이와 더불어 무학 대사의 죽음 이후 인생의 활기를 잃고 맥없이 지내다 죽으니 그의 나이 74세였습니다. 희대의 영웅 이성계의 말년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아들놈도 잘 낳아야 아들이지~웬수덩어리~
타고난 자질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미 여기에 왕 이라는 압도적 지위에다 명으로부터 왕위까지 승인 받게 된 방원의 정치적 파워는 막강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방원에게 마지막 남은 과제는 토사구팽 즉 사냥이 끝난 후의 사냥개 처리와 길들이기, 그리고 향후의 왕권 강화를 위한 장기포석이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향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공신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등 왕권강화를 위한 박차를 가하였는데, 그 중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중전 민씨 가문의 대몰락이었습니다.
태종의 부인 중전 민씨는 18세에 방원과 결혼하여 시아버지가 왕이 되는 것을 목격했고, 타고난 여장부 기질 로 방원이 왕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중전 민씨는 민무구, 민무질 두 동생을 남편의 심복으로 만들고 1,2차 왕자의 난에는 꾀를 내어 거사를 성공 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등 자신이 직접 후견인이자 참모로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전 민씨는 거사 실패 시에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각오 하고 남편의 왕위 획득에 올인을 한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성공하여 남편은 임금이 되었고 자신은 국모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중전 민씨의 허락된 행복은 즉위식이 열린 하루뿐 이었습니다.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여자를 찾았고, 태종의 다소 과도한 밝힘증과 상당히 과도한 중전 민씨의 투기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싸늘히 냉각되어 갔는데, 중전 민씨에게 이는 향후 밀어닥칠 엄청난 불행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마누라가 왈왈거리면 안됩니다.
英雄好色...영웅은 기질상(에너제틱), 그 파워와 위상으로 여러여인을 취한다..영웅중에는 예술인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