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 세 번째 주간 수요예배 / 3월 26일 수요일.
+ 제 목 : ”내가 십자가 오른편 강도입니다.“
+ 본 문 : 누가복음 23장 39절 - 43절 (신약 1271쪽)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2025년 고난주일은 4월 13일이고, 부활주일은 4월 20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부활주일 전날까지 40일 동안의 사순절기는,
3월 5일부터 시작이 됐습니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순절기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내가 십자가 오른편 강도입니다!” 라는 설교제목으로 나누겠습니다.
+ 옆에 분들과 인사합시다. / “0 0 0 을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예수님 십자가에 옆에 달린 한 강도와의 대화입니다.
우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에게 말을 건넵니다.
42절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대답하십니다.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던 날,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해골" 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달고, 다른 두 죄수들도 십자가 형틀에 달았습니다.
한 죄수는 예수님의 오른쪽에, 다른 한 죄수는 예수님의 왼쪽에 달았습니다.
“해골” 은 아람어, “골고다” 의 번역입니다. 라틴어 “갈보리” 는 한국어번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찬송가에 나오는 “갈보리” 는 “골고다” 를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34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눅 23:34b)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비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함 받은 자라면, 저나 구원하지“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로마 병정들도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라.” 고 말하였습니다.(눅 23:36)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이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눅 23:38)
이것은 로마 말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예수님을 모독하며 말하였습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그러자 다른 한 죄수가,
그를 꾸짖으며 말합니다.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십자가형이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눅 23:40-41)
그러고 나서 동료 죄수를 꾸짖던 그 죄수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가당치 않은 요청입니다. 이 죄수의 요청이 너무나 염치없는 요구가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 죄인의 요청을 놓고, 우리가 전혀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죄수는 보통 도둑이 아니고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의 큰 도둑, 흉악범인데,
그가 주님을 향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참 염치없는 행악자입니다. 정말 그 주제에, 어찌 감히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뉘우쳐도 모자라겠거늘, 어찌 낙원을 엿본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더 놀랄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행악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그리스어 본문에 보면 “아멘! 약속하지. 자네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걸세.”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의 2절 가사에 보면,
“너는 기억하고 있나 구원받은 강도를, 저가 회개하였을 때 낙원 허락받았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라는 아르헨티나의 시인이 지은,
“누가복음 23장 - LUKE XXIII” 이라는 제목의 스페인어로 씌어있는 시입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그 도둑은 이방인이었을까? 히브리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평범한 사내였을까? 이젠 세월에 잠겨 잊힌 그의 이름을,
누구도 더는 기억해내지 못하리라. 유태인이 십자가에 못 박은,
한낱 도둑일 뿐인 그도, 자비라는 것에 관해서는 좀 알고 있었을까?
그가 강도라는 것 외에, 그가 살아온 세월에 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둑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자기 곁에서 죽어 가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생각나서,
예수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장차 온 인류를 심판하실 예수에게서 믿기 어려운 대답이 흘러나온다.
예수께서는 지금 그 끔찍한 십자가에 달려 그 도둑에게 낙원을 보증하신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숨을 거둘 때가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이 죽은 그 날의 역사는 그 첫 금요일 오후의 기억을 망각 속에 묻어두지 않았다
아, 벗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 친구, 그가 그토록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던가!
어린아이 같은 그 솔직함이라니! 그 천진함, 그 솔직함이 치욕스런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 도둑으로 낙원을 요구하게 했고, 끝내 낙원 약속을 얻어내게 했는가!
이 도둑이 죄를 짓도록 내몰고 기회를 보아 살인까지 하도록
수없이 그를 내몬 것도 바로 이것이었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 도둑을 “천진난만한” 사람이라고, 어린애 같은,
솔직한 심정의 소유자라고, 그렇기 때문에 염치불구하고 예수에게 매달려 낙원을,
약속 받아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워도 아르헨티나의,
그 시인이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그 죄수 도둑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 관한,
시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그 도둑을 다시 보도록 이끄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가 오늘 본문의 행악자에게 관심을 가졌던 두 번째 계기는 서양교회 역사에,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이 도둑이 "회개한 도둑"(Penitent Thief),
혹은 "십자가 위의 도둑" "선한 도둑" 이라고 하여 가톨릭에서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 있고, 3월 25일이 그를 기리는 날입니다. 성 디스마스(St. Dismas),
그의 이름이 "디스마스" 였다고 합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이집트의 콥트교회가,
이 사람을 주목하는 이유들을 종합해 보니까, 다섯 가지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첫 번째 이유는, 기독교 역사에서 어느 누가,
우리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오늘 본문의 행악자 외에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또 있습니까?
이 행악자 한 사람 뿐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의 낙원 입국을 허용하고 약속하고 보증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의하든 안 하든 낙원 입국 첫 번째 비자를 받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교회가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두 번째 이유는, 회개한 이 행악자가,
우리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우리 예수님 얼굴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
우리 예수님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에게,
가까이 갔던 것보다 더 가까이에서 우리 주님을 위로하고 지켜 보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모독하며 “네가 메시아, 구세주라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어디 너 자신이나 먼저 구원해봐라. 그리고 우리도 한 번 구원해보라.“(눅 23:39)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할 때, 회개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모욕하는 그를 꾸짖습니다.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로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눅 23:41a)
이 말에 이 행악자의 참회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분은 잘못한 일이 없다."(눅 23:41b).
회개한 이 죄인은, 이렇게 이런 말로 우리 예수님을 위로해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위로해 드린 적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변호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죄하고 싶은 오늘 본문의 행악자는 예수님을 위로했고,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교회가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네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고,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확인합니다. 두 사람이 그만큼 영적으로 교감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 도둑에게 주목하는 다섯 번째 이유는, 행악자가 보여준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의 행악자는 하나님 나라까지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간절히 애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낙원의 주인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기억해 주실 것을 요청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눅 23:43)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십자가 형틀 위에서 들려 온 행악자와 예수님의 대화는,
가장 아름다운 대화입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롬 3:10)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의로운 사람일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될 때,
나에게 있던, 나는 의롭다고 하는 자기의가 깨어질 때,
“나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 이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할 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울려올 때,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착각이 사라질 때,
나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떳떳하다고 하는 어리석은 착각이 사라질 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오만을 뉘우칠 때,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강도를 용납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사순절에도 오늘 본문의 예수님 곁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 행악자를 기억하면서, “나도 십자가에 매달린 행악자입니다.” 고백하며,
마음을 정화시키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마무리기도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