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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24. - 10. 3.
30년, 그 긴 여행
이 재 학
30년, 그 긴 여행
< 2016년 9월 24일 - 토요일>
여행 이동 경로(로마⇒폼페이⇒쏘렌토⇒나폴리⇒피렌체⇒베네치아⇒밀라노⇒인터라켄⇒파리⇒런던)
30년! 우주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이것은 찰나(刹那)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봐도 짧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내가 공직에 몸담은 지 어언 30년, 이 세월은 내 인생에 있어서 기나긴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맑은 날씨도 있지만 눈보라나 폭풍우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한다. 나의 공직생활도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엎어지면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주고 힘들어 할 때 다독여 준 아내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동안의 내 공직생활을 되돌아보고 남은 공직생활을 좀 더 알차고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충전하고자 동료 사무관 두 사람과 부부동반,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으로 8박 10일간 유럽을 다녀왔다.
인천국제공항의 여행사에서 지정한 장소에 9시 20분경 도착하니 유럽의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4개 국을 패키지로 여행할 일행들이 모여든다. 우리 여섯 명을 포함한 33명의 대식구를 인솔할 사람은 33세의 194㎝ 장신(長身)인 최지원이라는 남자이다. 이탈리아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국제공항에 현지시각으로 9월 23일 18시 30분경 도착했다. 입국수속을 마치니 7시가 훌쩍 넘는다. 이탈리아 공항 직원들의 일처리는 느리기가 한이 없다. 속 터진다. 우리의 숙소는 로마 외곽에 있는 에르지페(Ergife)라는 호텔이다. 우리는 앞으로 여기서 사흘간 묵게 된다.
< 2016년 9월 25일 - 일요일>
이제 9일간의 여정(旅程)이 시작되었다. 시차적응도 되기 전인 첫날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에 출발하는 강행군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로마에서 2시간 30분 가량 걸리는 폼페이(Pompeii)로 향했다. 왕복 6차선의 고속도로는 비교적 한산하다. 고속도로 양 옆 구릉지에는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먼 데는 꽤 높은 산이 길게 펼쳐져 있는데, 알프스 지역과 맞닿은 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야트막한 구릉지와 평야로만 이루어진 독일의 동부지역과는 대조적이다. 산세(山勢)가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이국적(異國的)인 느낌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이 든다. 또한 날씨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 같고 온도도 17℃ 정도여서 관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폼페이 목욕탕 내부
통과하는 마차의 규모를 통제하는 징검다리
야트막한 산 위에 형성된 번영과 쾌락의 도시 폼페이는 서기 79년 8월 제정 로마 시대 때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한순간에 땅 속으로 파묻혔다가 1592년 공사 도중 우연하게 도시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해 1748년부터 발굴되었다 한다. 유적지에는 광장과 주요도로를 중심으로 목욕탕, 극장, 레스토랑, 공중화장실, 법원, 원형극장까지 갖춰진 현대의 도시와 다를 바 없다. 폼페이는 목욕탕 문화가 매우 발달하였다. 목욕탕은 현대의 목욕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퇴폐행위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천장의 구멍을 통해 목욕탕의 조도(照度)를 조절하고, 돔(Dome) 형태의 구조는 수증기가 타고 내려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도로는 모두 크고 작은 돌로 바닥을 만든 포장도로이다. 도로 가운데에는 징검다리를 만들어 일정한 규모의 마차만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징검다리는 그 후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그곳에는 뜨거운 화산재를 덮어써 몸부림치다 화석이 된 개와 어린이, 살아보려고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로 화석이 된 사람의 모습을 전시해 놓아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번영된 모습을 뽐내던 도시의 인간들도 분노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보잘 것 없이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폼페이는 그 당시 인구가 3만 명이나 되는 계획도시였다 하니, 조선 초 우리나라 전체 추정인구가 5백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규모가 큰 도시인지 짐작할만하다. 고대 로마인들이 우리나라 고구려나 신라가 고대국가를 형성하기보다 훨씬 이전 시기에 이런 발달된 도시를 만들었다 하니 가히 놀라울 만하다. 산 아래에는 우리나라 읍 소재지 규모의 마을이 있는데 폼페이를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각종 기념품과 모자, 목걸이, 기타 장신구와 수공예품을 파는 전통시장이 있다. 번성했던 옛날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진시황 병마용갱이 그렇듯이 조상들의 고통을 밑거름 삼아 후손들이 먹고 사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사 복장을 한 덩치 큰 사람이 관광객을 상대로 모델이 되어주고 돈을 받는다. 5달러를 요구한 그에게 1달러로 깎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우리 일행은 선택 관광으로 카프리(Capri) 섬을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졌다. 카프리 섬을 가지 않는 우리 여섯 사람은 소렌토(Sorrento)에서 나폴리(Napoli) 만(灣)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갔다. 가는 길목에는 올리브나무가 줄줄이 서있고 짙푸른 지중해(地中海)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이 뛴다. 학창시절 세계사를 배우며, 지도책을 보며 꿈으로만 그리던 지중해를 직접 나의 두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과 그림 같은 에메랄드 빛 바다가 우리를 반긴다.
흔히 나폴리는 호주의 시드니(Sydney),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와 함께 세계 3대 미항(美港)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나폴리 시내에 도착해보니 내 눈이 의심스럽다. 도시는 온통 오래 된 건물을 잘 보존한 것이 아니라 낡은 건물들 투성이다. 산뜻하게 보이는 집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허름한 집들뿐이다. 조그만 공터에 주유기 세 개만 달랑 놓여있는 주유소(注油所)가 앙증맞고 특이하다. 이탈리아는 원유를 수입하고 전기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전기사용에
옆에 있는 스쿠터와 비교해보면 경차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대한 규제가 심하다는 것이 인솔자의 설명이다. 이탈리아 거리에서는 중형 승용차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의 경차보다 훨씬 더 작은 차들이 거리에 즐비하고 아주 비좁은 공간에 신기할 정도로 주차해 놓았다. 경차는 2인승이 대부분인데 성인 남성 혼자서도 거뜬히 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작다. 차종도 아주 다양하다.
나폴리의 시가지가 허름한 것은 이곳이 마피아(Mafia)가 상당히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UNESCO, 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라 외부 수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2015년 기준 등재된 1,031건 중 2위인 중국보다 3건이 많은 51건이 이탈리에 있다.(우리나라는 12건)
나폴리 자체보다는 바다에서 항구를 보면 아름답기 때문에 미항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게 인솔자의 설명이다. 나폴리 항에는 크고 작은 호화 유람선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생김새와 언어가 제각각인 다양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오르고 내린다. 지구상에 정말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어떤 젊은 연인들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지 몇 번이나 헤어지려던 것을 멈추고 부둥켜안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다. 나폴리의 아름다운 항구와 어울리는 멋진 젊음이다.
< 2016년 9월 26일 - 월요일>
로마에서는 소위 벤츠투어라는 것을 시작했다. 고대 로마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대형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cceo)를 빼놓을 수 없다. 콜로세움은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되었다 한다. 최대 지름 188m, 최소 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의 건물로서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생사를 건 검투사들의 처참한 경기가 수시로 펼쳐졌다 하니, 그 광경을 보며 웃고 즐겼을 인간의 잔혹한 면이 그려진다. 그러나 서기 80년에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5만 명이나 되는 관중을 운집시키는 로마의 막강한 힘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콜로세움도 원형(原形)을 잃고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것을 보니 인간의 부귀영화와 오만함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느끼게 한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건국하여 2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중 하나인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Monte Palatino)에 마을을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본 따 ‘로마’라고 한 데서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는 옛날에 전차경기를 하였다는 길이 1km 남짓한 타원형의 터가 남아 있다.
그 다음 우리가 찾은 곳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lio)이다. 광장에는 우주의 순환을 상징하는 커다란 기하학적 문양(文樣)이 그려져 있고, 광장 왼쪽과 오른쪽에는 카피돌리노 박물관과 콘세르바토리 궁전이 있다. 정면에는 로마 시청사 건물이 있는데 이곳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미켈란젤로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한다. 인근에는 기원전 27년 올림푸스의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가 사비(私費)로 지었다는 판테온(Pantheon) 신전이 있는데 16개의 원통형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이 기둥은 이집트 에스원에서 날라 온 통돌이라 한다.
판테온 신전 근처에는 1736년 완공한 바로크 양식의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가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된 건물 앞에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수 근처에 모였는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근처에는 바닐라, 딸기, 레몬 등 두 가지 과일 맛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젤라또(gelato,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는데, 종업원들이 우리가 한국인인줄 알고 “안녕하세요?”라며 우리말을 건넨다. 우리는 아이들 마냥 즐거워하며 젤라또를 즐겼다. 트레비 분수에는 고대 로마제국 시절 사랑하는 사람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동전을 던졌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분수를 등지고 하나를 던져 넣으면 연인이 로마에 다시 오고, 두 번 던지면 연인과의 사랑이 이루어지며 세 번 던져 넣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다고 한다.(세 번 던지지 않으면 될 텐데.....새 애인이 생겼나?)
스페인 계단에서
트레비 분수를 뒤로 하고 1953년 제작된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로맨틱 코메디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무대였던 스페인 광장의 137 계단을 찾았다. 계단에는 저마다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햅번이 되어보려는 듯한 남녀들로 꽉 차 있다. 영화도 영화이지만 오드리 햅번이 숨을 거두기 일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때 아들에게 했다는 말을 옮겨본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 한 번 어린이의 손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도록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자신이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돼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한다.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라.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만큼이나 아름다운 말이다. 아니, 그녀의 아름다움은 세월의 흐름 속에 늙어갔지만 그녀가 남긴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간직되고 있다.
오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인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을 찾았다. 바티칸 시국은 모두가 알다시피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인 산 피에트로 사원(Basilica di San Pietro)을 비롯해서 바티칸 박물관 등이 있는 곳이다. 르네상스式으로 지은 지 500여 년 되었다는 바티칸 박물관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으로 착각이 들 만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에게 떠밀려 갈 지경이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40대 중반의 이탈리아 현지 가이드 최호철 씨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는 작품을 현대적 시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해준다. 그는 여행기간 내내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중저음의 목소리로 적당히 자기 부모님을 빗대어 가며 열심히 설명해 준다. 그는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라오콘 군상(群像)
피에타(Pieta) 像
바티칸 박물관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인간이 고통 받고 있는 모양을 표현한 라오콘 군상(Gruppo del Laocoonte)과 피에타(Pieta)像이 특별히 눈에 들어온다. 이 피에타상은 1980년대 어떤 정신이상자가 쇠망치로 부순 사건이 있은 후 방탄유리로 막아 놓았다. 박물관 안에는 인간에 의해 신의 세계를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실로 놀라운 작품들이 긴 회랑(回廊)을 따라 천장과 좌우벽을 장식하고 있다. 박물관 내에는 역대 교황의 시신을 밀랍으로 처리하여 모신 곳도 있다.
호텔로 이동하는 도로 옆 높은 곳에는 큰 벽돌 건물 안에 신발장 같은 곽을 만들어 놓고 시신을 넣어 놓은 묘지도 보인다. 이 시신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뼈만 추려 가족묘로 옮긴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화장문화가 아닌 매장문화라고 한다.
< 2016년 9월 27일 - 화요일>
오르비에또
피렌체 두오모 성당
피렌체(Firenze)로 가는 고속도로 양 옆으로 롬바르디아(Lombardia)라는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고 양과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이곳은 4월이면 유채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먼 데 높은 산의 꼭대기에는 ‘오래 된 도시’라는 뜻의 오르비에또(Orvieto)라는 마을이 성(城)처럼 자리잡고 있는데, 이탈리아에는 이런 곳이 아홉 군데나 있으며 이 중에는 3,000년 전에 만들어진 마을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산꼭대기에다 마을을 조성한 것은 전쟁이 많았던 곳이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다. 이 산꼭대기 마을은 식수와 식량을 어떻게 해결하였는지가 몹시 궁금하였다. 그러나 고대 로마제국은 수로(水路)를 만드는 기술이 매우 뛰어나 1km 길이의 수로의 높이가 1mm 정도 차이가 날 정도로 설치하여 원거리까지 물을 끌어다가 이용하였다 한다. 중간에 미켈란젤로 언덕이라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는데 언덕에서는 아름다운 피렌체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피렌체 시내에 도착하니 ‘꽃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피렌체 두오모(Duomo)성당이 우리를 반긴다. 밝은 색상의 벽과 높은 종루, 화려한 조각의 장식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 옆에는 청동과 황동으로 만든 ‘천국의 문’이 있는데 로렌츠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라는 조각가가 1427년부터 27년간 만들었다고 한다. 시뇨리아
천국의 문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는 성서(聖書)에 나오는 골리앗(Goliath)을 이긴 다윗(David)의 동상인 다비드像(미켈란젠로 작품의 복제품)과 코시모(Cosimo) 1세의 동상도 있다. 코시모 1세가 타고 있는 말은 오른쪽 앞다리를 들고
코시모 1세 동상
있었는데 말이 오른쪽 앞 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으면 동상의 주인공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앞의 두 다리를 모두 들어 올리고 있으면 전쟁 중에 사망, 네 다리가 모두 땅에 닿아 있으면 재위 중에 별다른 공(功)이 없다는 걸 뜻한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인 메디치家(Medici)를 빼놓고는 피렌체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는 게 가이드의 부연설명이다. 메디치가는 세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과 피렌체의 통치자를 배출하였으며,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일원까지 되었다. 코시모 1세도 이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이어서 우리는 신곡(神曲)을 쓴 이탈리아의 대표적 시인 단테의 생가(Casa di Dante)를 찾았다. 단테의 생가는 피렌체 시(市)가 단테가 살던 위치에 있는 건물을 사서 기념관으로 복원한 것인데, 기념관 앞의 작은 광장 바닥에는 단테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흉상을 밟으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 흉상을 찾기 위해 단테 기념관 앞의 바닥을 뒤진다.
< 2016년 9월 28일 - 수요일>
우리는 영어로 베니스(Venice)라고 하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로 향했다. 베네치아는 150여 개의 운하와 400여 개의 다리로 지탱되고 있다. 또한 베네치아는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막강한 도시국가였다. 베네치아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인솔자 최지원 씨는 개인적으로 세계에서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도 베네치아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聖 마가)에 있는 노천 카페인 플라워 카페(Caffè Florian)에서 강한 압력으로 추출한 이탈리아식 커피인 에스프레소(espresso)를 마시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운치 있고 행복한 일’이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다. 그는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가서 대학교까지 졸업하여 영어에 능통하고 이탈리아어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스위스와 프랑스에서도 현지 가이드 없이 우리를 인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다소 부정확한 면도 있었지만 그는 유럽史를 휑하니 꿰뚫고 있고, 우리에게 한 가지라도 더 알려주려는 열정을 보인다. 또한 다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인생철학을 가진 요즘 보기 드문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젊은이다. 어쨌든 그의 말에 따라 우리 여섯 사람은 그 운치를 즐겨보려고 한 잔에 12.5유로(韓貨로 약 15,600원)인 그 에스프레소를 사서 마셨다. 그러나 그리 큰 감흥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소(名所)에서 차를 마신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수상택시(Taxi Acquei)가 물살을 가르며 베네치아로 향한다. 물길 옆으로 오래 된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건물의 아래는 물에 잠겨 있거나 물이끼가 끼어 있다. 습기와 가끔씩 높아지는 수위(水位) 때문에 안전상 1층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골목길이라 할 수 있는 좁은 물길에는 곤돌라(Gondola)라고 노를 젓는 작은 나룻배가 관광객을 한 명 내지는 두세 명을 태우고 쉼 없이 다닌다. 유럽의 날씨가 변덕스럽다지만,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네치아의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더 없이 맑기만 하다. 산 마르코 광장에는 비둘기들이 많았는데 바닷가라서 그런지 비둘기 틈에 갈매기도 섞여 있다. 그곳에는 비둘기 먹이를 나눠주는 집시(Gypsy)들이 있는데, ‘그들이 건네는 먹이를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되며, 받으면 집시들은 그 대가로 턱없이 비싼 돈을 요구하고 주지 않으면 그들에게 봉변을 당한다.’고 현지 가이드가 단단히 주의를 준다. 노천카페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는데 찻값과 별도로 연주비를 받는다. 우리가 에스프레소를 마시노라니 우리나라 다른 관광객이 신청했는지 아리랑 음악이 흘러나온다. 광장 주변에는 산 마르코 대사원과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박물관 등이 있다.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전과 감옥(Prigioni)을 잇는 ‘탄식의 다리’도 있다. 재판을 받아 형을 선고받은 죄인들이 감옥으로 가는 이 다리를 건너면서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감옥의 벽은 매우 두꺼운 벽돌과 아주 굵은 이중(二重) 쇠창살로 되어 있어 한 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바람둥이의 대명사인 카사노바(Casanova)는 이 감옥에서 기발한 방법을 이용하여 천장을 뚫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한다. 카사노바가 탈출에 성공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이 플라워 카페였는데, 그곳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한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
감옥 앞 부둣가에는 각종 기념품과 유화(油畫), 인쇄한 그림 등을 파는 노점상이 줄지어 있는데, 집에 걸어 놓을 생각으로 몇 점 샀다. 밀라노로 이동하는 길옆으로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州都)이다. 밀라노는 예로부터 경제의 중심지로, 19세기 후반부터는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 도시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밀라노 패션쇼’로 유명한 밀라노는 패션뿐만 아니라 음식, 오페라,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모든 성악가들이 한 번은 서보고 싶어 하는 유럽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이 있다. 스칼라 극장 앞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이 있다. 밀라노는 이제까지 들러온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 비해 새로운 건물이 많은 편인데,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당한 탓이라 한다. 이탈리아의 아파트는 대개 6층 건물인데 우리의 1층에 해당하는 0층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0층은 바닥이 습하고 차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서이고, 둘째 0층은 마차를 두는 곳, 요즘으로 말하면 주차장으로 쓰이기 때문이며, 셋째 0층을 갖가지 장식으로 꾸며 놓고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응접실로 삼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물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창문이 좁고 창문의 높이가 낮았는데, 신분이 낮을수록 통풍이 잘 안 되는 위층에 살았다고 한다. 시가지는 자동차와 노면전차인 트램(Tram), 인도(人道)가 뒤섞여 매우 혼잡스럽다. 두오모(Duomo)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앞에서
광장에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고딕 건축 양식인 두오모 성당이 있고, 광장 중앙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상도 있는데 말의 네 발이 모두 땅에 닿아 있다. 광장 인근에는 갈레리아(Galleria)라는 아케이드(arcade)가 있는데, 아케이드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나있다. 특이한 것은 남문은 크고 북문은 남문에 비해 작은데, 이것은 이탈리아의 북쪽 끝에 위치한 밀라노의 남쪽문을 통과하면 이탈리아라는 좋은 세상이 펼쳐지고 북쪽문으로 나가면 이탈리아가 끝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갈레리아 안에는 프라다(Prada), 샤넬(Chanel) 등 소위 명품을 파는 가게들로 꽉 차 있다.
< 2016년 9월 29일 - 목요일>
밀라노 외곽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6시 30분에 스위스 인터라켄(Interlaken)을 향해 출발했다. 7시 20분경 버스는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스위스에 진입했다. 산 고타르도(San Gottardo)라는 길이 17km의 터널을 통과했다. 터널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터널과는 달리좌우로 굴곡이 심한 부분도 많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으며, 심지어는 갈림길도 있다. 터널 안에는 터널 내 사고를 대비한 교통 소통 용도의 신호등도 설치돼 있다. 스위스는 노르웨이, 일본과 함께 터널 굴착기술이 매우 발달한 나라이다. 스위스의 어스트펠트와 이탈리아 밀라노를 잇는 세계 최장 터널인 길이 57km의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Gotthard Base Tunnel, GBT)을 지난 6월 1일 개통하였다.
인터라켄은 ‘호수 사이’라는 뜻으로서 툰湖(Thuner-see)와 브리엔츠湖(Brienzer-see) 사이의 해발 568m 평야에 위치한 도시이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로 가는 버스 오른쪽 창가로 호숫가의 그림 같은 집들이 보였다가는 사라진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흐르는 강물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짙푸르다. 인터라켄 동역(東驛)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해발 1,030m에 위치한 그린델반트(Grindelband), 그곳에서 다시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 Scheidegg)까지, 여기서 다시 융프라우요흐까지 열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여정(旅程)이다. 자칫 방심하면 일행을 놓칠 위험이 있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등산열차는 알프스의 고지대를 톱니바퀴식 선로를 따라 올라간다. 등산열차로 높이 올라갈수록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졌지만 인솔자의 말대로 고산증세(高山症勢)가 나타나 어질어질하기 시작한다. 심장이 별로 좋지 않은 나는 속으로 긴장이 많이 된다. 열차 안에서는 승무원이 검표를 하는데 올라갈 때에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하고 우리말로 인사한다. 내려올 때에는 여승무원이 검표하면서 초코릿을 나누어준다. 열차를 타고 올라가노라니 가벼운 차림으로 조그만 배낭을 메고 걸어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꽤 많이 있다. 모두 건강미가 넘쳐 보인다. 열차는 중간에 가끔 서서 설치해 놓은 전망대를 통해 관광객들이 설경을 구경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융프라우峰은 해발 4,158m이지만, 융프라우요흐驛은 해발 3,454m에 위치해 있다. 이 역은 유럽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역이다. 관광객이 접근할 수 있는 최고 높이에 있는 스핑스 전망대(해발 3,571m) 바로 전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는 초당 6.3m 속도로 108m를 21초만에 올라간다. 실내에는 한글판 융프라우 안내책자와 철도기념 여권에 찍을 스탬프도 비치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컵라면도 판매를 하는데 가격이 우리 돈으로 10,000원이다. 컵라면을 가져간 관광객이라 하더라도 뜨거운 물을 사야만 컵라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4,000원 하는 뜨거운 물을 사야만 한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융프라우요흐를 찾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솔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융프라우요흐 방문 예약은 국내의 한 여행사가 도맡아 하고 있는데 2015년에 18만여 명이 찾았다고 한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찾은 사람을 포함하면 20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추측이다. 스핑스 전망대의 테라스 밖으로 나가니 생각보다 바람은 차지 않다. 눈앞과 발아래 그리고 먼 데 만년설이 펼쳐진다. 전망대 안에는 얼음궁전이 동화 속 나라처럼 꾸며져 있고 무빙워크와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나있다. 저녁에 머무를 숙소는 마을 가까이까지 빙하가 내려왔다고 해서 빙하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그린델발트(Grindelwald)에 있으며, 아이거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해발 1,034m의 아름다운 전원 마을이다. 저녁식사를 하는 식당의 21세 된 스위스 아가씨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의 응원 구호였던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우리말로 외치고, 또 자기네 식 구호를 우리들에게 유도하며 분위기를 즐겁게 해준다.
< 2016년 9월 30일 - 금요일>
우리 일행은 프랑스 리옹(Lyon)역까지 가는 떼제베(TGV)를 타기 위해 스위스 서부 레만湖(Lac Léman) 북안(北岸)에 있는 로잔(Lausanne)역을 향해 새벽 5시에 출발했다. 가는 도중 이름 모를 스위스의 시골 마을들이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로잔역에 거의 다다르니 출근차량으로 도로가 막힌다. 우리는 버스로 2시간 30분여를 달려 로잔역에 도착했다. 로잔역 앞 거리는 출근인파와 노면전차 등으로 혼잡하다. 스위스는 기차역 안 화장실도 유료이고, 그것도 프랑貨를 내야한다. 하는 수 없이 역사(驛舍) 맞은편 맥도널드 가게로 갔지만 화장실문은 비밀번호로 잠겨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어 가까스로 생리현상을 해결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게 생리현상이지만 돈을 주고 해결하기에는 아직 내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8시 23분 떼제베는 레일 위를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떼제베는 목초지와 옥수수 밭이 펼쳐지는 들판 사이를 시속 300km의 속도로 달린다. 출발한 지 40여 분이 지났을까 바지춤에 권총을 찬 경찰 두 명이 여권과 승차권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아마도 열차가 스위스에서 프랑스 국경으로 들어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출발 전부터 신경쓰이던 이탈리아 지진과 유럽지역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테러 가능성에 대해 외교통상부 영사콜센터에서 보내는 여행자제 촉구 메시지가 수시로 심기를 건드린다. 프랑스 파리를 향해가는 떼제베 안에서도 파리와 우리나라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일드프랑스(Ile-de-France), 니스, 알프마리팀(Alpes-Maritimes) 지역의 여행자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수시로 온다. ‘죽고 사는 것은 팔자 소관’이라는 게 평소 나의 지론(持論)이지만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한편으로는 국가에서 촉구하는 사항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걱정된 마음으로 인솔자에게 물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떼제베는 3시간여를 달려 우리를 프랑스 파리 리용역에 내려놓는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하다. 점심식사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파리에 대해 내가 받은 첫 느낌은 지저분하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아무 데에서나 담배를 물고 다닌다. ‘흡연자의 천국’이라는 게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심지어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아이 엄마도 담배를 피우며 다닌다. 무단횡단하는 사람도 매우 많다. ‘세계 최고의 문화․예술의 도시, 패션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점심을 먹고 우리가 찾은 곳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이다. 파리 시내에는 크고 작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360여 개나 된다고 한다. 파리가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프랑스 3대 박물관․미술관은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셰․퐁피두 미술관이라 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소장품을 시대별로 전시해 놓았다. 37만여 점이 소장되어 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3대 미술품은 밀러의 비너스, 모나리자, 노예상이라 한다. 루브르 박물관의 3대 미술품은 모두 보았지만 시간이 없어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이곳을 대충 훑어보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특히 보는 위치에 따라 눈동자가 달리 보이고 신비로운 미소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 모나리자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관람객이 워낙 몰려 구경조차 힘들다. 게다가 붐비는 틈새를 이용하여 작업(?)을 하는 소매치기도 신경 쓰여서 더욱 힘들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역할도 없는 노인을 일정 인원 이상 단체 관람객에게 강제적으로 붙이도록 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70세 가까이 돼 보이는 남녀 노인 두 명이 우리를 2개 조로 나누어서 한 명씩 붙었다.
파리 시내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버스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Saint Denis Hotel’에 도착할 무렵 인솔자가 우리 일행들에게 겁을 준다. 이곳은 치안이 극도로 좋지 않아 호텔 측에서 경찰을 불러놓았으니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매치기들에게 가방을 강탈당하기 쉽다고 한다. 차안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결국 호텔 측에서 나온 보안요원의 보호(?) 아래 우리는 각자의 짐을 갖고 불안한 마음으로 호텔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에서는 보안요원이 금속탐지기로 들어오는 사람의 몸을 탐지한다. 일행 중 담배를 피우러 호텔 밖으로 나가려하자 제지하며 로비 안 흡연공간에서 피우라고 한다. 최근 발생한 이슬람 무장세력이나 추종자들의 테러 때문이라면 이해할 수 있고 기꺼이 따를 수 있겠지만 인근의 소매치기 때문이라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곳이 과연 법치국가가 맞는지 의구심마저 든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소매치기가 심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아무튼 일행은 호텔에 8시경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으로 모두들 정해준 방으로 들어가 파리에서의 첫날밤을 허망하게 보내야만 했다. 밀입국한 아프리카나 중동, 동유럽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주민등록 같은 것이 되어 있지 않아 의료혜택 등 법적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 양육 등 생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소매치기를 하기 때문에 막기 어렵다는 인솔자의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다. 아무튼 프랑스 파리에 대한 나의 그동안의 환상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우리가 귀국한 바로 다음 날 미국의 어떤 여배우가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경찰 복장을 한 무장강도에게 승용차 안에서 123억 원에 상당하는 귀중품을 강탈당하였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파리에는 폭발사고 이후 거리에 쓰레기통을 철제나 프라스틱제가 아닌 투명한 비닐봉투로 모두 교체하였다고 한다.
< 2016년 10월 1일 - 토요일>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정말 좋은 날씨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Tour Eiffel)을 보기 위해 나섰다. 가는 길목에 개선문이 있고 개선문의 맞은편에는 일드 프랑스지역이다. 개선문 맞은편으로 곧장 가면 작은 개선문이 또 있다. 다른 나라에 이것보다 더 큰 개선문이 있다면서 인솔자가 어디에 있는지 맞춰보라고 우리에게 퀴즈를 낸다. 내가 바로 맞혀버려 싱거운 일로 끝났지만 평양에 있다. 이 개선문은 김일성 70돌 생일을 맞아 1982년
에펠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세느江과 파리 시가지
4월 14일에 제막하였다. 김일성의 혁명업적과 혁명사적을 선전하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평양으로 들어오는 입구인 김일성경기장의 앞 도로에 세웠다. 높이 324m의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구스타프 에펠의 디자인과 설계로 지어졌다. 그러나 파리의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로 인정받아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하는 조건으로 지어졌다 한다. 심지어는 ‘비곗덩어리’, ‘여자의 일생’ 등을 지은 프랑스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인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이 에펠탑을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던 끝에 파리 시내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은 바로 에펠탑의 안이라는 결론을 얻어 점심을 의도적으로 에펠탑 안의 레스토랑
에펠탑에서 스페인 연인들과 함께
안에서 해결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 에펠탑은 다행스럽게도 박람회를 찾은 발명왕 에디슨이 무선통신을 개발하면서 무선통신 기기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이런 높은 탑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철거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한다. 덕분에 에펠탑은 이제 파리는 물론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임과 동시에 매년 수백만의 관광객을 모으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엘리베이터로 2층 전망대에 올라가니 파리 시내 전역이 다 보인다. 청명한 가을 아침의 파리는 우리에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젯밤 파리에 대해 느꼈던 부정적인 시각이 말끔히 가시고, 파리가 왜 세계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인지 알 것만 같다. 파리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세느江(Seine River), 세느강 위를 떠다니는 유람선과 멀리 보이는 몽마르뜨 언덕,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엥발리드 돔 성당(Église du Dome, 에글리즈 뒤 돔), ‘파리의 연인’이라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촬영지로 알려진 일명, 여성 연예인 ‘김정은 다리’도 보인다.
베르사유 궁전 창문으로 보이는 베르사유 정원
오후에 찾은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은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가 신하인 재무장관 푸케(Nicolas Foucquet)의 보르 비 콩트(Vaux-le-Vicomte) 성을 둘러보고 온 후 성의 어마어마한 화려함에 자존심을 다치게 되었고, 그래서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을 했다 한다. 푸케의 성에 관련된 건축가 르 보(Le Vau),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 실내 장식가 르 블랑(Charles Le Brun), 조경가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참여해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궁전을 지었는데, 원래 습지였던 이 땅의 자연 조건을 완전히 바꾸어서 숲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기 위해 몇 개의 강줄기를 바꾸고, 거대한 펌프를 만들어 세느강의 물을 길어다 부었다고 한다. 또한 궁전의 상판에서 천장의 못 하나까지 모두 장식을 할 정도로 화려하게 궁전을 지었다. 1682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긴 후 루이 14세는 매일같이 수백 명의 귀족들을 모아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이것은 루이 14세가 자기에게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르는 귀족들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일들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귀족들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갖 장식을 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에 명품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루이 14세는 5세에 재위에 올라 사망하는 77세까지 무려 72년간 왕좌를 차지했다. 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장하고, ‘짐(朕)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사치를 누렸다. 베르사유 궁전은 헤라클레스의 방, 루이 14세의 흉상이 있는 달의 여신 디아나(Diane)의 방, 태양의 신 아폴론의 방, 거울의 방, 왕비의 침실 등의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방들의 창문 밖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베르사유 정원이 보인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문 밖에는 에펠탑 모형과 그 밖의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우리말로 호객행위를 한다. 어떤 흑인은 그 뜻을 아는지는 모르지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마이 문나?(‘많이 먹었나?’의 경상도 사투리) 마이 묵었다.(‘많이 먹었다.’의 경상도 사투리)”라는 말을 웃으면서 던진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유럽지역에 정말로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히려 중국인 관광객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일본인 관광객은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제는 유럽보다는 아프리카나 남미를 찾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럽을 와보지 않은 일본인들도 많을 테니까.
중국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 여섯 사람은 파리 야경(夜景)을 선택 관광으로 택한 일행들과 헤어져 세느강 유람선을 타러갔다. 도중에 우리는 인솔자 최지원 씨와 함께 파리의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우리가 타고 내린 지하철 역에는 스크린 도어가 없다. 파리 야경 선택 관광을 포기한 덕에 얻은 색다른 경험이다. 한꺼번에 두 가지를 모두 얻기 어렵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한다.
세느江 유람선 위에서
아내의 애교스런 모습
어둠이 깔리는 세느강이 저녁 노을에 물들어 아름답다. 역광(逆光)으로 찍은 세느강 풍경은 실루엣(silhouette) 같은 느낌을 준다. 세느강을 끼고 양쪽으로 들어선 노틀담 사원, 박물관, 연인의 다리 등이 그림처럼 다가왔다 아늑히 멀어진다. 어둠이 짙어지자 에펠탑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성탄절 트리의 불빛이 반짝이듯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에펠탑은 아침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마치 내가 꿈길 속을 헤매는 것 같다.
< 2016년 10월 2일 - 일요일>
4시 30분에 일어나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유로스타(Euro-Star)를 타기 위해 출발역인 파리 외곽의 북역(Gare du Nord)으로 향했다. 유로스타는 도버해협(Strait of Dover) 해저구간을 채널 터널(Channel Tunnel)로 통과하여 시속 300km 이상의 속도로 달린다. 유로스타는 한꺼번에 18량(輛)이 달리는 매우 긴 열차이며, 떼제베(TGV)에 기초한 초특급열차이다. 북역에서는 프랑스 출국신고와 영국 입국신고를 동시에 진행한다. 8시 13분에 출발한 열차는 프랑스의 이름 모를 평원 위를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유로스타 식당 칸 안에서 차창 밖 경치를 보며 동료와 마시는 맥주는 색다른 경험이요, 그 맛 또한 일품이다. 다른 팀장 두 사람과 함께 담소(談笑)로 이국(異國)의 정취를 마음껏 즐겼다. 1시간 20분여가 지나자 유로스타는 드디어 해저터널로 진입한다. 해저구간을 약 36분간 달린 유로스타는 프랑스보다 1시간 늦은 영국 시간으로 10시 33분에 우리들을 런던의 세인트 팬크러스(St Pancras)역에 내려놓는다.
로제타 스톤
안개와 변덕스런 날씨로 유명한 런던의 날씨도 우리나라의 청명한 가을날씨처럼 아주 좋다.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 British Museum)을 찾았다. 아침 일찍 찾은 덕에 관람객이 그리 많지는 않다. 이 박물관에 있는 1,300만여 소장품 중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에 식민지에서 약탈한 문화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우리가 관람한 곳은 겨우 ‘韓英室’이라 씌어있는 우리나라館과 고대 이집트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기원전 1295년 고대 이집트 제19왕조를 세운 람세스 2세((Ramses II) 관련 유물과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이해할 수 있고 인류 10대 문화재로 손꼽힌다는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인간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사자 형상의 라마스(우리의 해태에 해당), 미이라 등을 둘러보았다. 티그리스 강변의 도시 님루드(Nimrud)에서 나온 독수리 머리에 사람 형상을 한 아시리아인(Assyrian)의 유물도 있다.
대영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그 많은 소장품 중 극히 일부분만 보고 나온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 먼 데 런던의 명물인 타워 브리지(Tower Bridge)가 보이고, 인근에는 군함이 떠있고 템즈강(Thames River)의 물살을 가르며 조그만 배들이 지나다닌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차단된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과 스쳐지나가듯 본 국회의사당의 빅벤(Big Ben),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는 나는 별 감흥(感興)을 받지 못했다.
8박 9일간의 여정(旅程)이 끝나는 순간이다. 이제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으로 가서 인천행 비행기만 타면 된다. 늘 그렇듯이 여행은 준비하는 동안의 설레는 마음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여행기간이 길어지면 피곤함과 지루함이 다가오고, 끝날 무렵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얼마 뒤면 내가 결혼한 지 29주년이 된다. 아내와 30년 가까이 살면서 열흘을 24시간 줄곧 함께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우리가 오랜 친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세상에 다툼 없이 사는 부부가 어디 있으랴? 우리 부부도 살면서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태 참고 견디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그때마다 누구나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싯귀처럼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과 미련을 갖게 된다. 내가 공직의 길을 걸은 것은 수많은 갈림길에서 참으로 잘 선택한 길이다. 30년간의 여행은 길었지만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여행기간 동안 옆을 지켜준 아내가 있었고, 사랑하는 자식들이 있었으며 주변에 좋은 동료와 흥미로운 다양한 업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 공직생활도 종착역을 얼마 앞두고 있지 않다. 세월의 흐름은 나이에 비례해서 빨리 간다는 말이 있듯이 종착역을 얼마 두지 않은 내 공직생활도 무척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곧 나는 공직의 긴 여행을 끝내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리라. 그 여행은 내가 지금까지 걸어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 될지도 모른다. 내 인생이라는 여행의 종착역은 어디쯤일까? 난 내 여행의 종착지에서 과연 후회와 슬픔이 아닌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한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여행을 하다가 길이 아니면 돌아가야 하고 체력이 부치면 쉬었다가 힘을 얻어 다시 가야하리라. 종착역을 앞둔 승객이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앉았던 주변을 살펴보듯이, 나 역시 내 주변을 살펴보고 옷매무새도 고치리라. 새로운 여행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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