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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강의/법륜스님 2회
중중첩첩 연기의 세계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일반적으로 유리는 ‘작은 것은 큰 것 안에 들어가고, 큰 것은 작은 것 안에 들어 갈 수 없다. 부분은 전체보다 작고,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또 하나하나가 모여 세계를 이루고, 세계는 하나의 집합이다.’ 는 공간에 관한 진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그런가 하고 각각 서로 다른 차원에서 중중첩첩 연기의 의미를 살피겠습니다.
첫째로, 여기에 반죽한 한 덩어리의 밀가루가 있습니다. 4등분하면 네 덩이의 밀가루가 됩니다. 하나에서 네 개가 나왔어요. 그리고 그 네 덩어리를 합하면 네 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요. 그럼 도대체 ‘하나’란 무엇을 말함입니까?
2만 개의 자동차 부품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부품이 2만 개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부품들을 조립해 놓으면 자동차 한대라 합니다. 이처럼 세계는 서로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아 놓은 부품 2만개의 쌓임은 전체인 자동차 한대라 할 수 있습니다. 한대의 자동차를 분해하면 2만개의 부품이 나오고, 그 부품 2만개를 합하면 한대의 자동차가 됩니다. 부품 하나하나는 성질이나 모양이 다 다른데 이 2만 개의 다른 부품이 합쳐져서 성질이나 모양이 같은 한대의 자동차를 이루어요. 다시 같은 한대의 자동차를 분해하면 성질이나 모양이 다른 자동차의 부품이 2만개가 나옵니다. 그래서 제법의 실상은 같다고 할 수도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또 예를 들어, 현대에서 나온 차 두 대가 있는데, 한대를 스님이 타고, 다른 한대는 거사님이 탔다고 합시다. 그런데 오늘 10개의 부품을 뽑아 서로 교체했어요. 그리고 내일 또 부품 10개를 교체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2000일을 보내면 자동차의 부품 이만개가 다 교체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어느 것을 스님 차라하고 어느 것을 거사님의 차라 할 수 있을 까요? 그리고 바뀌었다면 언제부터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첫날부터 바뀌었느냐?”
“아니요”
“둘째 날 부터냐?"
"아니요”
“천 일째부터냐?”
“예, 과반수가 넘을 때부터입니다.” 그러면
“999일에서 1000일에는 겨우 부품 10개 밖에 바뀌지 않았는데, 그 부품 10개 바뀐다고 차가 바뀌는 것입니까?”
“아니요”
이렇게 자세하게 따져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것에 얼마나 큰 모순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법의 실상은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가 없고, 제법의 실상은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할 수가 없어요. 내 것이 있고 네 것이 있고, a와b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게 되면 거기에는 이런 모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일중일체다중일, 2만개의 자동차부품이 한대의 자동차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대의 자동차에 이만개의 부품이 있고 각각의 부품들이 한대의 자동차이기도 한 것 이지요.
많은 수의 쿼크가 모여서 한 개의 원자가 되고, 많은 원자들이 모여서 한 개의 분자가 됩니다. 분자를 기준으로 볼 때는 원자는 분자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원자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원자는 쿼크의 집합이죠. 즉 원자는 분자의 기본요소이기도 하고 쿼크들의 집합이기도합니다. 그러면 원자는 집합체인 전체로 보아야 할 것인가 분자의 기본요소인 개체로 보아야 할 것인가. 전체라고도 개체라고도 할 수 있고, 전체도 개체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어요.
둘째로, 우리 몸은 1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어요. 생명체인 이 세포들이 연관 되어서 하나의 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몸의 10조분의 1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세포 하나가 몸 전체의 정보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학자들이 밝혀냈어요.
세포 하나하나에 핵이 있고, 핵마다 유전자가 들어 있는데, 그 유전자가 우리몸 전체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a라는 여자와 b라는 남자가 각각 난자와 정자를 내어서 수정난을 만들었는데, 그 속의 핵을 빼버리고 나의 세포 속에 있는 핵을 집어 놓고, 다시 a라는 여자의 자궁 속에 집어넣어서 키워서 아이를 낳으면 나와 똑같은 인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몸 전체의 한 부분, 10조분의 1인 하나의 세포 속에 내 몸 전체가 다 들어 있는 것이죠.
셋째로, 가는 띠끌이 수없이 모여 이 세계와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띠끌 하나 속에 이 세계가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드는 비유가 제석천의 그물망입니다. 저제석천에 가면 궁전을 덮는 그물이 있는데, 그 그물은 팔만사천개의 (무수히 많다는 뜻임.) 구슬을 엮어서 서로 꿰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물 전체를 보려면 궁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봐야 다 볼 수가 잇는데, 사실은 그 그물 하나만 들여다봐도 그 구슬 하나 속에 팔만사천개의 모든 구슬이 다 비친다고 해요. 그래서 한 개의 구슬로 전체를 다 볼 수 있다 해서 하나 속에 전체가 다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 세계는 연관 되어있다는 것이죠.
옛날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나 지금은 실제의 세계가 이렇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넓은 우주가 지금부터 백억 또는 150 억 년 전에 어느 순간에 한 점에서 나와서 폭발해서는 지금 팽창 중이라 합니다. 또 무한한 이 우주가 수축하게 되면 한 점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하지요. 없는 것에서 무한한 것이 나오고 무한한 것들이 다시없는 것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 오늘 날 과학이 밝힌 실제의 세계입니다.
넷째로, 제 앞에 있는 이 스님과 저는 지금 마주 보고 있어요. 스님이 뒤로 한발 물러나고 제가 한발 물러가면 우리는 점점 멀어집니다. 점점 서로 뒤로 가면 영원히 멀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점점 뒤로 물러가면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점점 가까워 져서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두 사람이 여기 서서 한사람은 이리로 가고 한 사람은 저리로 가면 두 사람 사이에 최단거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두 사람이 자꾸자꾸 뒤로 가서 하나가 북극점에 서고 하나가 남극점에 섰다면 두 사람 사이의 최단거리는 무수히 그을 수가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그래요. 실제의 평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면에 가깝다는 근사치만 존재하지요 여기 한 점이 있고 저기 한 점이 있으면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하나 밖에 그을 수 없는 게 공리인데, 실제로는 이게 성립하지 않는 겁니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비유크리트 기하학입니다. 실제로는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일중일체다중일, 이것은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일즉일체다즉일,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이고,
일미진중함시방, 하나의 작은 띠끌 안에 시방의 세계가 포함되어 있는데 ,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의 모든 띠끌도 다 이와 같다.
이것을 중중첩첩의 연기의 세계라 합니다.
찰나가 곧 한량없는 긴 시간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난격별성
위의 네 문장은 시간이 공(空)함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짧은 시간을 무수히 모아놓은 것이 긴 시간이고, 긴 시간을 수없이 나누면 짧은 시간이 됩니다. 그런데 위 문장을 풀이하면 한량없는 긴 세월, 즉 영겁의 긴 시간이 곧 일념이다. 또한 그 일념, 찰나가 곧 한량없는 긴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예전 같으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하겠지만, 오늘날의 과학의 발달은 이 뜻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성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옛 속담도 있지요. 나무꾼이 산에 가서 신선들이 바둑 두고 있는 걸 잠시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도끼 자루가 썩어서 도끼가 ‘툭’하고 떨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퍼뜩 정신이 듭니다. 그래 집에 돌아갔는데, 자기 집인데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죠. 놀라서 당신이 누군데 내 집에 있냐고 물은 겁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 사람이 왜 남의 집에 와서 지기집이라고 우기냐고 큰 소리쳐요. 그래 시비를 가리다 보니 그 실고 있던 친구가 자기 손자였죠. 잠시, 한나절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기 인간계에서 백년의 시간이 가버린 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오늘의 과학은 공간도 시간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 빛보다는 느리다 해도 빛의 속도에 가까운 로켓트를 타고 우주를 여행한다면, 그 안의 모든 기능 -시계와 우리의 삶 등- 전체가 느릴 겁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실제 그 사람이 늙은 것이나 느낀 것은 3년 밖에 안 지났다 해도, 지구에서는 이미 15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거지요. 아인쉬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제시된 것이지요.
‘시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말 입니다.
지상에서 제일 가까운 천상인 사왕천에 가면 그 곳의 하루는 인간계의 50 년입니다. 또 더 높은 천상에서는 어떠냐? 인간계의 100년에 해당되고 , 또 그 위의 천상계는 인간계의 300년에 해당 됩니다. 그러면 거기 하루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 것이냐? 아닙니다. 거기 사람들의 하루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똑 같은 하루예요. 그런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천상에서우리 인간계를 내려다보면,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인 거죠. 우리는 50년을 살았고 70년, 90년을 살았다 하고, 즉 젊어서 죽었다느니 오래 살았느니 하지만 그 세계에서 보면 하루살이와 같겠죠. 하루살이가 오후 5시에 죽느냐 오후 9시에 죽었냐 하는 정도여서 인간 수명의 길고 짧음이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지구에서의 하루나 한 해의 길이가 수성과 금성, 목성, 토성에서의 그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위 1년 2년 10년 100년이란 시간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긴 세월입니다. 그런데 우주에서 생성되고 사라지는 별들의 수명은 100억년 정도가 되는데, 이런 수명을 가진 별들의 생성 소멸도 밤하늘의 폭죽놀이 같아서 , 펑하고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또 생기고 하는, 그런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별이 한번 생겼다 사라지는 그 찰나, 그것도 수억 등분한 그 시간 속에 생존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시간인 1년이나 거기 비해 아주 짧은 순간인 1초는 매우 짧은 시간이냐? 아닙니다. 20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긴 시간이지요.
원자를 한번 봅시다. 원자에는 핵이 있어요. 핵 속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고 , 이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를 도는 중간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핵 속에 양전기를 띤 양성자가 여러 개 있으면, 서로 밀어 내는 힘으로 붕괴되어 결합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핵이 꽉 결합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 이 이유를 일본의 유가와 히데끼 교수가 가설을 세워서 밝혔어요. ‘중간자’라는 것이 있어서, 중성자에서 이것이 튀어 나오면 중성자가 양성자가 되고 이것이 양성자에 가서 붙으면 양성자가 중성자가 되는 겁니다. 미리 양성자 중성자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성자에서 중성자 , 중성자에서 양성자가 되고, 이렇게 계속 바뀌는데 얼마나 짧은 시간 동안 바뀌느냐? 10-24sec랍니다. 10의24승 분의 1초 동안에 바뀐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 비하면 1초는 거의 영겁에 해당하는 긴긴 세월입니다.
그래서 무량원겁이 곧 찰나요, 찰나가 곧 무량 원겁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관념에 잡혀 있어요. 깨달음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한량없는 긴 시간이 곧 찰나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다시 말해 한량없는 긴 세월, 영겁의 긴 시간이 곧 일념이고, 그 일념-찰나가 곧 한량없는 긴 시간이라는 것을 저번 시간에 자세히 설명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뒤를 이어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구세와 십세가 서로 의지하고 있으나, 구별되어 복잡하거나 혼란스럽지 않구나’ 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지요.
‘구세(九世)’가 무슨 뜻인가? 이 세계가 한 번 이루어져서 머물다가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성주괴공한다 하는데, 이 세계가 한 번 생겨나서 사라질 때까지를 1대겁이라 합니다. 그런데 겁에는 이름이 있어요. 우주 공간에는 세계가 수없이 많이 있고, 또 그것이 이루어졌다 사라지기를 수없이 하니까 한 세계를 말할 때 공간적으로는 무슨 세계인지- 그 지역명을 말해야 됩니다. 또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데, 그 때마다 겁의 이름이 있어요.
지금 머무는 우리의 세계는 사바 세계인데 어느 겁에 속하느냐? 현겁에 속합니다.
이 사바 세계는 한 세계가 있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긴 것인데, 현겁인 이 세계가 이루어지기 전 과거의 세계를 장엄겁이라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머물게 될 시간을 성숙겁이라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현겁의 사바 세계에 출현한 부처님’이라 하는 겁니다. 시간적으로는 현겁이고 공간적으로는 사바세계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분이라는 말입니다.
화엄경」을 읽으면 각 세계마다 부처님 명호가 무엇이며 세계의 이름, 겁의 이름이 뭔가 하는 것이 반드시 나옵니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 겁이 있는데, 과거 겁을 과거세, 현재 겁을 현세, 미래 겁을 미래세, 그리고 합하여 삼세라 말합니다. 그런데 과거 겁에도 현재 겁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미래 겁에도 과거․현재․미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합해서 구세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구세를 포함하는 1세를 합하여 십 세라 말합니다.
이 구 세와 십 세가 호상즉하다, 서로가 의지해 있다는 말이에요. 찰나에 무량겁이 들어 있고 무량겁이 곧 찰나가 돼요.
그러면 시간 개념에 혼돈이 오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다. 잉불잡란격별성이라. 복잡하고 혼란스럽지 않고 따로따로 떨어져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차원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죠? 수학에서 공간 안의 점을 인정하는 데 필요한 독립 좌표의 수가 몇 개인가에 따라 1차원이다, 2차원이다, 3차원이다, 4차원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어떤 사물에 대해 생각의 수준을 말하기도 합니다. 1차원은 직선이죠. 2차원은 가로 세로가 있는 평면입니다. 3차원은 가로 세로 높이가 있는 공간이고, 4차원은 거기다 시간축이 있는 시공간을 말해요. X, Y, Z, T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2차원하고 3차원을 비교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법당은 평면입니다. 이 평면에서 목욕탕과 법당과 다방을 같이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삼등분을 해서 저쪽 편에는 목욕탕을 하고, 가운데는 다방을 하고, 이쪽에는 법당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전체를 다 목욕탕으로 하고, 전체를 다 다방으로, 전체를 다 법당을 할 수는 없죠. 그러면 뒤섞여서 법당이 물바다가 되고 다방이 물바다가 되고 목욕탕에 의자들이 놓이고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집니다. 그런데 3차원은 평면이 아니고 높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1, 2, 3층을 지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1층은 목욕탕을 하고, 2층은 다방을 하고, 3층은 법당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위아래가 다 투명한 유리로 된 건물이라 할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어떠냐? 전체가 물이 출렁이는 목욕탕인데, 또 전체에 사람들이 차 마시면서 앉아 있고, 또 사람들이 앉아서 스님법문을 듣고 있어요.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2차원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3차원에서 보면 층층이 별개의 세계이죠.
그러면 4차원에서는 어떠냐? 우리가 여기 빌딩을 짓고 머무는데, 이 빌딩이 지금처럼 이 장소에 서있고, 또 같은 장소에 소나무가 서 있고, 또 호수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3차원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4차원에서는 이런 일이 성립됩니다.
왜냐? 시간축이 있어서 그 축에 따라 다 따로 있는 것이지만 우리같이 3차원의 눈을 가지고 볼 때 그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구세와 십 세가 서로 연관되면 혼란스럽고 복잡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각각 따로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 속에 부분이 있고 부분 속에 전체가 있으면 뒤죽박죽이 될 것 같고, 찰나 속에 원겁이, 원겁이 찰나 속에 있으면 뒤죽박죽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세와 십 세가 서로 관계되면 혼란하고 복잡할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관념에 사로잡혀서 사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평면밖에 보지 못하는 2차원의 관념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층층이 다른 공간들이 공존하는 3차원에서 가능한 이 현상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공간을 평면적으로 삼등분해서 법당, 목욕탕, 다방이라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전체가 다방이고 전체가 목욕탕이고 전체가 법당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죠. 2차원 세계에서는 그건 도저히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것이지만, 3차원 세계에서는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관념을 뛰어넘을 때 즉 ‘백척간두진일보’할 때 거기에 자유의 세계, 열반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입니다. 결국 처음 여섯 구절에서 말한 총제적인 존재의 실상을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 밝힘으로써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의 벽을 깨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도 우리의 관념이 절대화한 것이니, 실상은 공함을 알라는 것이지요.
초발심이 곧 정각(正覺)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초발심시변정각. 처음 마음을 발할 때 곧 정각을 이룬다. 처음 발심한 그것이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곧 부처의 경지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여러분들이 자식에게 느끼는 마음이 있지요? 내 자식이라면 밥 먹는 밥상에 올라와서 그릇을 엎고 옆에서 똥을 싸도 귀엽기만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그 마음이 모든 사람을 대할 때도 똑같다면 바로 보살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서 어떤 병원에서 팔십이 된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은 살다가 다 죽기 마련이지’ 하고 담담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내 어머니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면 도인입니다.
마음에 일어난 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 되고 모든 시간대에 같이 적용 된다면 우리의 일어나는 마음이 곧 부처 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생각이 일관성이 없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죠.
“어머니가 죽어서 울었어요. ” “왜 울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슬프잖아요? ” “사람이 죽으면 슬퍼요?”
“아, 죽으니까 슬프죠.” “사람이 죽으면 항상 슬픕니까?”
“조금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슬픈 일이죠.”
“지난번에 김일성이 죽었다 할 때는 어땠어요?”
“기뻤죠.” “사람이 죽었는데 기뻐요?”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초발심이란 출발이고 정각은 끝이라 해서, 초발심시변정각이란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은 콩을 거두기 위해 콩 하나를 땅에 심습니다. 이 때 그 콩을 ‘씨앗’이라 하고 후에 열매를 맺으면 이것을 ‘열매’라 불러요. 그러니까 씨앗은 시작이고 열매는 끝이라 할 수 있겠지요. 즉 같은 콩을 한 사람은 ‘씨앗’이라고 하고 , 한사람은 ‘열매’라 합니다. 경계를 그으면 씨앗이 되고 열매가 되고 시작이 되고 끝이 되지만, 경계가 없으면 그건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고 시작도 끝도 아닙니다.
이를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지요. 시작이니 끝이니 하는 것은 다 분별에서 나온 말입니다. 분별하지 않으면 시작이니 끝이니 창조니 종말이니 하는 것이 따로 없어요. 분별이 끊어진 세계에서 본 경계를 이야기한 것이지요.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相共和
생사와 열반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생사와 열반의 세계는 정반대인데, 이것이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확대하자면 분별이 끊어지면,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며, 진속• 사바세계와 정토세계가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명연무분별
理事冥然無分別
이와 사의 경계가 사라져서 분별이 없다. 법계라 하면 일체의 존재가 각자 그 역할을 지켜 서로 엇가리거나 뒤섞임 없이 잡다한 가운데에서도 질서 정연하게 조화를 유지하면서 연기하고 있는 우주만법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지요. 그래서 법계란 사실 하나여서 여러 개가 있을 수 없지만, 화엄경에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네 가지로 분류했어요.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理事無애法界), 사사무애법계 (事事無애法界)인데, 이렇게 넷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을 사법계관이라 합니다.
그럼 사법계란 뭐냐? 차별 현상계에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언뜻 보기에 같아 보이는 구더기 한 마리 한 마리도 자세히 보면 그 생긴 모양이 다 다르고, 강가에 있는 모래가 수없이 많지만 가서 비교해 보면 그 크기와 모양, 성분이 다 다르고, 밭에서 나는 고추도 그 빛깔과 모양이 다 다릅니다. 바다에 일어나는 수많은 파도가 있지만 그 파도 모양과 일어났다 사라지는 수명도 전부 달라요. 그래서 만법(萬法)이라 하는데, 이런 세계를 사법계라 합니다.
그런데 파도 하나하나를 볼 때는 각 파도가 수없이 생기고 사라지지만, 바다 전체를 보면 물이 그냥 출렁거릴 뿐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또 아이들 눈에는 물이 얼음이 되었을 때, 얼음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물이 얼음으로 그 모양을 변했을 뿐이지. 거기에는 따로 얼음이 생긴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 삼라만상은 근원으로 돌아가 보면 다 한 가지 모양이에요. 그래서 만상(萬相)은 일상(一相)이고, 만법은 일 법이라고 하지요. 이 하나의 세계를 이(理)의 세계라 하는 겁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결국 이치는 하나다. 그러니까 사의 세계가 허상인 속제(俗제)라면 , 이의 세계는 실상인 진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런 세계를 이법계라 합니다.
그런데 허상은 실상을 떠나 나타나는 게 아니지요. 고요한 바다에서 파도가 일고 파도가 가라앉으면 고요한 바다가 된다.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진제(이 理)와 속제(사 事)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무의 근원을 따지면 나무뿌리에서 나뭇잎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하나의 줄기에서 수많은 나뭇잎이 나와요. 그러나 사실은 나뭇잎 때문에 뿌리와 가지가 생성 되는 것이라서 잎이 뿌리를 만든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엄밀히 말해서 둘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이사가 무애하다. 이와 사가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차별 현상계를 ‘색(色)'이라 하고 그 본질을 ‘공(空)’이라 말하는데, 이 공과 색이 둘이 아닌 세계를 즉 색즉시공의 세계를 이사무애법계라 합니다.
그러면 사사무애법계란 뭐냐? 차별현상계 사이에서 걸림 없이 오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질에서 현상이 드러나고 현상에서 본질로 가는데 걸림이 없는 것을 이사무애라 하고, 차별현상계에서 걸림 없이 오가는 것을 사사무애 또는 화작(化作)이라 합니다. 비유하면, 파도치는 바다에 배타고 놀러 나갔다가 큰 파도와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사법계에 있는 사람의 모습니라면, 방파제를 단단하게 치고 그 안에서 배타고 노는 것이 이법계에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사법계에 있는 사람은 넓은 바다에 나가서 바람과 파도를 이용해서 배를 타요. 파도를 떠나지 않고 그 위에서 노는 겁니다. 사사무애법계는 어떠냐? 파도를 타고 즐기다가 어쩌다 물에 빠져요. 그러면 실수를 했느냐? 아닙니다. 물에 빠진 김에 물밑에 내려가서 진주조개를 주워옵니다. 빠져 죽지 않아요. 사사무애법계에 있는 사람은 물에 안 빠져야 된다는 관념마저도 없습니다. 물속에 빠지면 빠진 대로 물위에 있으면 위에 있는 대로 언제나 좋은 일이 있어요. 이사가 명연하여 분별이 없다는 것은 이런 세계를 말합니다.
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이라 십불이란 부처님 열분이란 뜻이 아니라 시방세계 두루에 계신 모든 부처님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위의 저 세계는 어떤 경계냐?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현보살등 대인이 노니는 경계라는 말입니다.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盤相共和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현대인경)
초발심이 곧 정각이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세계, 이와 사의 경계가 사라져 구분 없는 세계인 이사 무애 법계가 곧 모든 부처님의 과 보살의 경지라는 뜻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지혜와 방편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義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능인이란 (能仁) ‘부처님’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대웅’이 부처님을 이야기하듯이 능인도 같은 뜻이지요. ‘해인삼매’란 해인정(海印定)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든 선정을 말해요. 해인삼매중이라 하면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비치듯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고요한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의 해인삼매 가운데 번출여의가 부사의 하다는 건, 부처님의 지혜에서 뜻대로 중생을 위한 온갖 방편이 나오는데, 우리머리로는 부사의하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지요. 부처님의 지혜와 방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 위에서 우리나라 전체를 훤하게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라 한다면, 이 지혜로운 분에게 사천만 국민이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서울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묻는다면 마음껏 일러 줄 수가 있겠지요. “당신은 동쪽으로 가고, 당신은 동북쪽으로 가시오. 그리고 당신은 서쪽으로, 또는 남쪽으로 가시오.” 묻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르고 바른 방향을 일러 줄 수가 있어요.
마치 다가 오는 온갖 것을 거울이비추어 주듯이, 억만 가지가 오면 그 억 만 가지를 다 비추는 거지요. 무한한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부처님도 중생의 근기 따라 무한한 설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 거울은 자신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밝아서 그냥 물건을 비추듯이 중생의 근기가 부처님의 광명에 그냥 비추어지기 때문이지요.
서울 가는 길은 만 명이 물으면 각자 다 다르게 가는 방향을 가르쳐 주고, 억 만 명이 물어도 마찬가지지만, 그 방향을 외우고 있다가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냥 묻는 대로 대답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를 내려 비추는 깨달음의 상태를 부처의 지혜, 능인해인삼매중이라 합니다. 이 지혜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일러 주는데, 이것이 방편이고 자비입니다. 중생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그 마음에서 방편이 자유자재로 나오는데, 그것이 부사의하다. 도저히 중생의 사량 분별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백 이나 천 가지 정도의 처방을 외워서 만이나 십만 가지의 병을 치료하려는 의사를 우리는 돌팔이 의사라 하지요. 그는 고치는 병보다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십만 가지의 병에 십만 가지의 처방을 가지고 치료를 하는 의사를 명의라 하는데, 그는 이런 병에는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하고, 저런 병에는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하는 지를 다 외워서 환자를 치료합니다. 그런데 신의는 어떠냐? 처방을 외워서 치료하는 의사가 아닙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대응해요.
환자가 ‘배가 아프다’하면 정해진 무슨 약을 먹이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상태를 봐서 물 한 그릇 먹어라, 아주까리 먹어라, 설사제 먹어라 하고 그때 그때의 상황 따라 다른 처방을 줘요. 어떤 병에는 어떤 처방이라고 외워서 치료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돌팔이 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명의 에게는 고치기 쉬운 병과 어려운 병이 있어요. 그러나 신의는 뭐든지 다 치료할 수 있으니까 치료하기 쉽고 어려운 병이 없습니다.
병 따라 처방이 다 다르듯이 부처님의 지혜안에는 중생을 교화하는데 어렵고 쉬운 구별이 없어요. 살인자나 수많은 보시행을 한 사람이나 성불로 이끄는데 드는 힘은 같습니다. 모든 것을 훤히 보고 있는 사람에게 수원에 있는 사람이 질문하나, 부산이나 동해에 있는 사람이 질문하나 서울 가는 방향 일러 주는 데는 힘이 안 들겠지요.
그런데 두 종류의 인연 없는 중생만은 부처님도 구제 못한다고 했어요. 어떤 중생이 구제 못할 인연인가? 자동차 운전을 못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 보면, 운전 못 배우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어요. '아이고, 못하겠다, 자신 없다.’ 면서 아예 운전석에 안 앉는 사람과 경운기 운전하면서 자전거 운전하면서 나는 안 배워도 운전 할 수 있다고 배우려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아이 . 난 몰라. 나는 못해.’ 하면서 물러서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증상만을 가진 사람은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정반대 같은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안 듣겠다.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가문 땅에 단비가 내려 다 자기 그릇 만큼 받아 가는데, 그릇을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은 비가 아무리 와도 그 귀한 물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릇을 거꾸로 든 퇴굴심과 증상만을 가진 중생만 빼고는, 누구나 성불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죽이려 했던 데바닷다도,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도, 용녀까지도 성불하는 이야기가 법화경에 나옵니다.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보배의 비가 허공에 가득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데, 중생은 자기의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는다. 법화경의 약초유품(藥草喩品)에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구름이 가득하게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어 일시에 비가 내리지만, 작은 뿌리 작은 줄기에 작은 가지 작은 잎새며, 중간 뿌리 중간 줄기에 중간 잎새며, 큰 뿌리 큰 줄기에 큰 가지 큰 잎새며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은 각각 차별 있게 그것을 받아 간다.
부처님의 자비 광명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태양이 지구의 모든 것들을 일체의 차별 없이 두루 주어져요. 그러니까 교회에 다닌다 해서 천상에 못가 , 교회에 다닌다 해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안 비치는 게 아니라 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신 보살님이 계셨어요.
“아아, 스님 . 저는 기도는 하지만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딸애가 고3인데 교회에 다니거든요 ”
그래서 제가 말씀 드렸지요.
“보살님, 부처님은 자기 말 잘 들으면 봐 주고 안 들으면 안 봐주는 중생이 아니에요. 교회 다닌다 해서 부처님의 자비 광명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자비광명의 비를 받지 못하게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는 것,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고.
어떤 종교를 가지더라도 마음의 문을 연 사람들은 지혜와 자비의 광명이 비칠 것이고, 절에 아무리 다녀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그 빛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절에 다니면 어떤 면이 유리한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는 것이지요. 마음의 문이 열려야 광명이 비치게 됩니다.
그러나 눈은 자기 스스로 떠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이 밝은 줄 압니다. 눈을 감고 날마다 어둡다고 아무리 고함지르고 도움 청해 봐야 소용이 없어요. 자기 업식의 안경만 내려놓으면 일체의 괴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왜냐? 본래 세상은 괴로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의 비가 허공 가득히 내리지만 중생은 그릇 따라 이익을 얻어 가는구나 .
지금 이 시간에도 그래요. 같은 법문을 해도 듣는 사람의 근기 따라 가져 가는 것이 다 달라요. 이 순간에 한 소식 크게 깨닫는 사람이 있나 하면, 마음의 문을 꽉 닫고 마냥 조는 사람, 또 자기 생각만큼 힌트를 얻어 가는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無緣善巧着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이다리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시고행자환본제 - 이런 까닭으로 수행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본래의 자리란 때 묻지 않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파식망상필부득 - 망상을 쉬지 않고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번뇌망상인 사량분별을 끊지 않고는, 이 업식의 안경을 벗지 않고서는 법의 성품인 존재의 참 성품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다. 는 말입니다.
무연선교착여의 - 아무런 조건 없는 착한 방편으로 뜻대로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귀가수분득자량 - 중생이 집으로 돌아갈 때 자기 분수 따라 양식을 얻어 간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처님의 자비의 빗물은 온 중생에게 차별 없이 내리지만 중생은 그 받는 그릇의 모양이나 크기 따라 달리 받아간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집착이나 어떤 조건을 붙여 중생 교화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아무런 차별 없이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중생은 자기 근기 따라 얻는다는 말이지요.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 ‘다라니’라 하면 ‘진실한 말’ 이란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은 쓰고 또 써도 끝이 없는 무궁무진한 보배로써, 이것으로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 사실은 보배 궁전과 같다.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 - 궁극에는 중도를 행하여 실상을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구래부동명위불 - 깨닫고 보니 본래부터 오고 감이 없으니 그 이름을 부처라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깨달아서 새롭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부처였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법화경에서는 어릴 때 길 잃고 집을 나가 거지로 살다가 오랜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 왔으나 자기를 거지 출신으로 잘 못 알고 사는 아들에게 자기 아들임을 깨우치게 한다는 어느 장자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장자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이 어릴 때 집을 나가서는 길을 잃어버려 돌아오지를 않아요. 부모가 그 아들을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찾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어 그 아들은 거지로 몇 십 년을 살았는데 살다 보니 자기 고향도 잊어버리고, 자기 집과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매일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서 겨우 먹고 살았지요.
이렇게 떠돌다가 어느 날 자기 아버지 집이 있는 그 동네로 가게 됩니다. 대궐 같은 집이었는데, 그 집 대문간에 서서 밥을 얻어먹으려고 하니까 그 집 마루에 어떤 노인이 앉아 있어요. 거지도 만만한 집이어야 밥도 얻어먹으러 들어가는데, 이렇게 집이 너무 크고 웅장하면 보통 얼어서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들어갈까 말까 입구에서 망설이며 서성이고 있는데, 평상에 앉아 대문간을 바라보던 노인이 보니까 아 그 거지가 꿈에도 그리던 자기 아들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내 아들아!” 하고 쫒아 나갔더니 이 아들은 자기를 잡으러 오는 줄 알고 겁을 먹고는 부리나케 도망가요.
그래서 노인이 하인을 시켜 그 아들을 붙들도록 합니다. 그랬더니 이 거지가 너무 놀라서 기절했어요. 그래서 이 장자가 생각하기를 ‘아, 이래서는 아이를 죽이겠구나.’ 싶어서 그냥 내버려 두고 돌아갑니다. 그랬더니 한참 기절해 있다가 다시 일어난 아들은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없어져서 살았다 싶어 얼른 도망갔어요. 그래서 장자는 하인에게 거지 옷으로 갈아입히고는 자기 아들인 그 거지를 찾아가게 하지요. 그리고는 “야, 이 사람아, 저기 가면 좋은 집이 있는데, 그 집에 가서 일하면 딴 데 가서 일하는 것보다 두 배의 돈을 주니까 가자.” 고 일하도록 부추긴 것이지요. 그래서 주로 외양간에서 똥 치우는 일을 시켰는데 수고비를 두 배로 주니까 열심히 일했어요.
하루는 이 아버지도 일부러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그 아들이 사는 모습을 봤는데, 아들이 그 거친 일을 아주 열심히 하면서 머슴방에서 재미있게 산단 말입니다. 옛날에 떠돌이 할 때와 비교하면 참 잘 사는 게 되겠지요. ‘이게 천국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걸 본 장자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냥 놔뒀어요. 그래 한참 세월이 흘러 십년이 지나서는 집안 청소하는 일을 시키고, 그 다음에는 하인 중에서도 조금 높은 직급의 일을 맡겼어요. 창고를 관리하는 일이었지요. 곳간의 곡식을 밖에 내주고 또 받아오고 돈도 헤아리는 일을 맡긴 겁니다. 이 집에 한 이삼십년 살아 보니까 이제 그런 것도 할 줄 알게 된 거지요. 그러나 이렇게 그 집의 전 재산을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자기 재산인줄 몰라요. 여전히 그 집의 종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장자가 죽게 됩니다. 그제 서야 장자는 모든 사람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이오. 이 모든 재산이 이 사람 거요.” 이렇게 말하고는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머슴, 이 거지가 바로 우리 중생입니다. 본래가 다 부처이고 부처의 아들딸인데도 우리는 부처된다는 소리만 들어도 놀라요. 거지노릇하면서 얻어먹는 그 몇 줌의 양식, 그 몇 푼의 품삯에 팔려서는 그것을 뺏길까봐 겁을 내는 겁니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라고 하면 ‘이거, 내 재산 내놓으라는 것 아니냐. 마누라 버리고 스님 되라는 소리 아닌가, 내 자식 뺏어가는 것 아닌가.’ 이런 걱정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불의 길로, 자기 본래의 자리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빌어서 그 품삯 몇 푼 받는 데만 관심이 있어요. 전 재산을 가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공부를 조금해서 이 전 재산을 관리하는 데까지 왔지만, 여전히 자기가 부처인 줄은 모릅니다. 그래 부처님이 ‘자 이제부터 네가 부처다. 바로 너희가 나의 진실한 아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합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일체중생이 다 본래 부처인 것을 알리기 위해 오셨고 , 우리는 이 업식의 미망에 싸여서 거지인 양 살고 있지만 이것만 떨쳐 버리면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중생이 본래 부처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법화경’에서는 ‘보물을 간직하고도 알지 못하는 거지’ 에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지가 오랜만에 부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부자 친구가 가득하게 차려 준 음식상을 받고 싫컷 먹고 마시고는 마침내 취해서 잠이 들어요. 그런데 부자 친구가 볼 일이 있어 나가야 되는데, 이 거지 친구는 인사불성이 되어서 깨어도 깨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자 친구는 나가면서 거지친구가 평생 먹고 살아도 남을 보석을 넣어줍니다. 혹시 술 먹고 잃어버릴까 싶어 주머니 안섶에다 넣고 꿰매주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이것도 모르고 그 후에도 계속 거지로 살아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자 친구를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요. 여전히 거지 모습인 자기 친구를 보자 부자친구는 자기가 준 보석이면 충분히 잘 먹고 살았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놀랍니다. 그런데 거지 친구는 자기가 귀한 보석을 가진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부자친구는 잠 잘 때 넣고 꿰매어준 그 보석이야기를 하지요.
우리 중생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모두는 그 보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 능력을 놔두고 업식에 끄달리며 살아요. 자기 업식을 주인으로 삼고 자기로 삼아 거기 묻혀 사는 겁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려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일대사 인연 때문임을 알아야합니다.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어 청정케 하려고 오신 것이지요.
그런데 중생에게 ‘네가 부처다’ 하면 놀라서 납득을 못하니까, 다시 중생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오욕락을 누리며 살다가 그것을 버리고 수행하여 해탈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랬더니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왕자니까, 또는 태어날 때부터 일곱 발이나 걸었다던데, 나는 못 걸었지 않느냐.’ 고 생각하면서 ‘나는 안돼’ 하고 또 물러나요. 그래서 부처님은 팔만 사천 법문을 하셔서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 진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진리의 세계를 ‘나와는 상관없다. 스님들이나 할 이야기이고, 늙어서나 할 이야기이다. 나같이 죄 많은 중생이 뭐가 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앙굴리말라도 , 500명의 유녀를 데리고 있던 기생의 우두머리 연화색녀도, 천하바보인 주리반특도, 똥꾼 니이다이도 다 부처님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진여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안 된다’ 는 생각. 나는 다 아니까 할 필요가 없다 는 생각. 이 두 생각을 버리고 정신 차려 진실로 내 업식의 안경을 벗어 던지고 진여의 세계를 바라본다면, 누구나 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어요.
오늘부터 우리가 힘 써야 할 것은 이 업식의 안경을 벗는 일입니다.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를 끼고서 ‘이건 너무 크다거나 너무 작다’ 해서 자기에게 보이는 대로 끼고서, 나중에 안경을 벗고 실제 크기와 다시 맞춰보면 크거나 작아서 못 쓰는 물건이 되겠지요. 그것처럼 자기 업식의 안경을 낀 채 그 안경에 맞추어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에게 자기식대로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가 집에서는 말 잘 듣고 해서 쓸 만하다. 했는데, 밖에 나가면 ‘형편없는 놈’ 소리를 듣고, 남편이 집에서는 잘해서 훌륭한가 했는데, 밖에서는 집밖에 모르는 ‘쫌팽이’ 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요. 지금 제일 급한 것은 나 밖의 존재, 즉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고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색깔 있는 내 업식의 안경, 이것을 벗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제법의 실상을 보고 이치에 따라 고칠 걸 고쳐야 되는 것이지요.
시비분별은 자기 업식의 안경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임을 인정해야 됩니다.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있어서 시비분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법의 모습이 그렇게 내 눈에 비친 것이지요. 그 때문에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허상임을 알아야합니다. 제상이 비상인 줄을, 즉 한 생각 일으켜서 모양 지은 것인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말고 (無住), 모양 짓지 말며 (無相), 더 나아 가서는 무념이 되어야 합니다. (無念) 번뇌망상 즉 우리의 업식에 의해 일으키는 한 생각을 쉬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제법이 본래로 여여하여 그대로 진여의 실상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인연 따라 이리저리 일어나는 화작(化作)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냐? 업식을 녹이는 것입니다. 업식에 의해 일어나는 자기주장, 즉 아집을 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아집을 버리려면 먼저 엎드려 절을 해야만 됩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가 잘났다는 이것을 먼저 굽히고 놓아야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진실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렵고 또 안심입명의 경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분별을 놓아 버리면 사람아 바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자동차 운전하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말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도 재물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집을 놓으면 화가 나지 않고 미움이 생기지 않고 번뇌가 사라져서 마음이 편해집니다.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사라지는 것은 괴로움과 속박의 굴레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걱정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벗기가 싫다는 다른 표현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럼 왜 이 업식의 안경을 벗기 삻을까?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는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는 업식의 안경을 안 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당신들이 안경을 끼고 있지, 나는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망상을 피우는 겁니다. 전도몽상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수행자는 자기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내가 본 모습은 내 업식의 안경을 통해 본모습이니까 안경 벗고 세상 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탁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이구, 내 안경에 또 이렇게 비치네. 이건 절대 실제 모습이 아니야.’ 하고 마음 돌이켜야 합니다.
시누이와 마음이 안 맞아 화가 나서 ‘으이구, 미운 시누이.’ 하다가도 바로 생각을 돌이키세요. 내 안경에 비친 모습이니까. 내 안경을 벗으면 미움이란 말이 떨어지니까 용서할 것도 참을 것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공부할 때는 관점을 잘 잡아야합니다.
‘미운 짓’ 하는 생각이 팍 올라올 때 ‘미운 짓’ 이란 사실은 없다. 내 안경에 비춰진 모습일 뿐, ‘일체가 유심조소- 즉 마음으로 지어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 초점을 두고 공부해야 단박에 끝내 버리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꿈속에서 헤맵니다. 색안경을 끼고 사물의 빛깔을 바로 보려 하는 것과 같고, 안경을 벗어야 바로 알 수 있는 세계를 안경을 끼고 찾으러 다니는 꼴입니다. 그러나 굳이 안경 벗는 연습을 하러 산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 안 한 사람은 안 한 지금 그대로 하고, 한 사람은 한 상태에서 그냥하면 되지, 결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결혼 안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바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승속이나 남녀, 노소, 귀천과 유무식이 따로 없습니다.
중생에서 부처로
‘수행자는 자기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본 어떤 것도 내 업식의 안경을 통과한 모습이니까 이 안경을 벗고 세상 보는 연습을 해야겠지요. 일체가 ‘마음이 지어 만든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공부를 해야憫熾? 그러니까 ‘법성게’를 공부한 바로 지금, 마음을 내는 겁니다.
기간을 정해 놓고는 ‘수행 하겠다’ 는 결심을 하고, ‘내 눈에 비친 일체의 모습은 내 업식으로 인한 것’ 이라 생각하고 상황에 적용시켜 보는 거지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보는 순간 화가 벌컥 올라와서 ‘으익, 저 남자가...’ 이러다가도 ‘아니야, 내가 보기에 늦은 거지, 남편 친구는 필요할 때 술 마셔줘서 정말 고맙다고 좋아하겠지.’ 이렇게 마음을 돌려요. 그리고는 “한 잔 하신다고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어떤 효과가 나는지를 기다리는 겁니다. 매일 싫은 소리를 해도 마시고 왔었는지라,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듣고 ‘웬 기회인가?’하면서 더 많이 마시고 오겠지요. 그러면 눈치 보느라 많이 못 마셨을 테이니 실컷 마시게 해주고, 속 쓰린 걸 풀어주는 해장국을 끓여 놓고 기다려요. 너무 많이 마시면 속 쓰리니까. 이렇게 며칠만 하면 자기 몸을 생각해서라도 스스로가 술을 삼가게 됩니다.
‘하던 일도 멍석 깔면 안 한다’ 는 속담이 있어요. 내가 싫은 소리 하든 안하든 간에 남편이 술 마시고 밤늦게 귀가 하는 상황은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생각 그 자체를 놓아버리는 겁니다. 내 업식인 줄 알고 그 일체의 생각들을 놓으면 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 마음이 편해지면 가정에서 해야 할 내 역할이 제대로 보입니다. 이렇게 끄달리는 생각들을 놓아 버리고 내 공부에 집중하면 내게도 좋고 가족들도 좋아집니다. 이렇게 내게도 가족에게도 좋아지는 길이 부처님의 길이고, 내게도 가족에게도 나빠지는 길이 어리석은 중생의 길입니다.
이렇게 다부지게 공부하지 않으면 절에 오래 다녀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에 뭔가 변화가 와야 되요. 이렇게 공부하면 사주팔자에도 구애 받지 않고, 죽을 운명이라 해도 명이 길어집니다. 제법을 꿰뚫어 보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될 만한 재앙이란 없습니다. 물놀이하다 파도가 높아 물에 빠지면 이왕 빠진 김에 조개나 줍겠다는 사람에게 어떤 것이 괴로움이 될 수 있겠어요? 남들이 ‘아이구, 저 집 아이가 시험에 떨어져서 어쩌나, 부도가 나서 어쩌지?’ 하고 걱정하지만 공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 상황은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때 배울 것이 아주 많습니다. 땅을 관찰하려면 일부러 허리 굽혀 관찰해야 하는데, 넘어졌으니 그 때를 틈 타 땅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닥친 일에서 바로 배우려고 마음을 내면 공부 안되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백일 동안 연습하면서 공부해 가면 그대로 다 법사가 될 수 있어요.
경을 읽으면 다 깨달아서 부처되라는 이야기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사람들이 서울 가는 방향을 하도 물으니까, 있는 위치에 따라 동쪽이나 서쪽, 북쪽으로 가라 하는 것이지, 다 서울 가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수원에 있으니 북쪽으로 가라 했고, 저 사람은 춘천에 있으니까 서쪽으로 가라 했구나’ 하고 회통될 만큼 뭔가를 체득해야 됩니다. 원효대사는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임을 알고 구역질 하는 동안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거나 죽겠다고 하거나 부도가 나거나 뭔가 잘못되는 그 순간에 빠지지 말고 거기서 보배를 건져야 됩니다.
자동차에 팍 부딪칠 때 ‘아이고, 재수 없어. 조금만 늦게 나왔으면 ...’ 하고 생각되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고, 부딪치는 순간 ‘죽는 거 간단하네, 마누라하고 싸우면 뭐하나. 이렇게 죽는데. 인생, 이렇게 간단한 것을, 싸울 일이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돌아가면 그 자동차 사고는 엄청난 공덕이 됩니다. 자동차가 부서지고, 그 정도 깨달으면 괜찮지요. 한두 달 입원해도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데 문제가 되겠어요? 이렇게 상황에 부딪히는 순간 공부로 전환 되어야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번뇌가 많아서 골치가 아프고 방향을 못 잡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면 혼자서도 무한한 일을 할 수 있어요.
만 명의 사람이 자고 있고 한 사람만 깨어 있을 경우, 잠자고 있는 만 명이 잠꼬대를 하면서 재미있다고 해도 깨어 있는 한 사람은 ‘잠꼬대 하지 말라’ 고 하지, 만 명의 사람이 말한다 해서 거기 끌려 자러 가지는 않습니다.
이 법의 이치를 알면 사바의 중생 속에 아무리 뒤섞여 살아도 물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겁날 게 없어요. 지금 불법이 잘못 되고 있다고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절인연도 아주 좋아지고 있어요.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변화나 과학기술의 발달, 하나의 지구로 되어 가고 있는 경향, 이 모든 것이 다 부처님 법이 시절 인연을 제대로 만나 빛을 볼 시점으로 전환 되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시절에 불법을 만난 것을 정말로 기뻐하고, 부처님 제자 됨이 무한히 자랑스러워야 됩니다.
그런데 왜 그게 안 되느냐? 직접 안 해 보니까 그렇습니다. 법의 이치를 깨닫고 거기에서 기쁨을 맛보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세속적인 생각으로 사니까 세월이 아무리 가도 법을 만난 기쁨 부처님의 제자 됨에 자랑스러움이 없어요. 그러니까 백일만 하면 됩니다. 백일 만에 내 개인 인생은 끝내어서 내 개인을 위해서는 아무런 할 일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 24시간 이 몸과 생각들이 다 중생을 위해서 저절로 쓰여지는 것입니다.
(끝)
첫댓글 아직 깊은뜻은 모르겠으나 일일 노력을 더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