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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월)
건너편 상단 침대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려 나도 일어났다. 헤드랜턴을 켜서 시계를 보자 새벽 1시 05분이었다. 커튼을 약간 젖혀 김이 스린 유리창을 커튼으로 닦고 창 너머 밖을 보았다. 비가 창을 때리고 있었다. 상단의 침대를 점거한 남자 분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건너편 침대의 남편 분은 작년 여름에 중국의 어딘가에 3,000M 급의 고산을 트렉킹하면서 고산 증세에 시달렸다 한다. 내가 주치의로부터 처방을 받아 비아그라를 준비하였다는 말을 듣고 내 소개로 의사를 만나 역시 비아그라를 처방 받아 왔다. 어제 메실라우 산장에서의 만찬에서 양주를 내놓은 분이다. 그의 부인도 일어났다. 우리 셋은 각자 가져온 비아그라를 한 알씩 먹었다. 작은 알이다. 나는 어제의 산행에서 아무런 고소 증세를 느끼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처음에 비아그라를 복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먹어서 나쁠 것이 없다 생각하고 건너편의 부부와 함께 어울리는 것도 좋겠다 싶어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소등을 하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기상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눈을 감았다. 남자는 새벽에 방광이 차면 딱딱해지는 현상이 있다. 이는 아직도 내가 경험하는 것으로 남자이면 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만큼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이다. 나는 지금의 상태가 약한 정도이기는 하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아니면 약효로 나타나는 현상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기실 지금의 나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고산 증세 없이 등정하는 것이다.
이 혼란은 처음 느낀 그 때 뿐이었고 02시에 기상하면서 나는 이를 이미 잊고 있었다. 바쁘게 짐을 꾸리면서 나는 두 가지 문제로 한 동안 당황하였다. 하나는 바지 속에 입은 등산용 내의이다. 항상 경험하지만 여간한 강추위가 아니면 불필요하였다. 이를 그대로 입고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벗었다. 몸이 가볍고 시원하다. 나는 한국에서 요대를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를 가지고 갔다. 비가 멎으면 입고 있는 우의를 벗어야 하고 산행 중에 몸이 더워져서 땀이 나면 입고 있는 윈드자켓 또는 다운자켓(우모복)을 벗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수통과 간식도 챙겨 가야 한다. 이 물건들을 큰 요대에 넣어 가기에는 요대가 좀 작았다. 그렇다고 어제 아침부터 포터가 지고 온 배낭을 비우고 오늘 등정에 필요한 물건만을 넣기에는 배낭이 너무 컸다. 15L 정도의 작은 배낭을 가져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건너편 침대의 부인도 나처럼 다운자켓을 챙겨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남편은 우모복을 가져 갈 필요가 없다고 부인에게 우겼다. 부인이 당황하자 남편 분이 화장실에 간 사이 부피가 있는 그러나 중량이 그리 나가지 않는 우리 셋의 우모복 세 벌을 내 배낭에 넣어 부인이 매고 가기로 하였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배낭을 꾸렸다.
밖은 칠흑 같이 어두웠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비가 멎어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보였다. 윈드자켓 겸용으로 입었던 상의 우의를 얼른 방에 도로 놓고 나왔다. 로프를 잡고 계속 걸어야 하기 때문에 스틱은 오히려 불편하다 하여 또 다시 방으로 가서 스틱을 두고 나왔다. 머리에 간단한 방한모를 쓰고, 윈드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어제의 산행 기점에서 처럼 카메라?기록지?볼펜?비스켓?초콜릿을 넣은 작은 요대를 허리에 차고, 500CC 생수병을 가슴에 품었다. 방한모는 이중의 천으로 만든 것으로 양 날개가 달려 이를 펴면 귀와 옆얼굴을 덮고 접으면 머리 위에 고정되는 것이다.
김정호 회장님의 재촉에 바삐 로비를 나서면서 나는 간식으로 비스켓을 한 봉지 얼른 먹었다. 그리고 초콜릿을 움찔 움찔 씹었다. 바람의 기세가 약해져 있었다. 바지를 뚫고 피부에 닿는 냉기가 약간은 차갑다고 느껴 조금 전에 내의를 벗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산행을 시작하여 몸이 더워지면 냉기가 가실 것임을 믿고 헤드랜튼의 불빛을 쫓아 정상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때가 본래 예정한 대로 02시 50분이었다.
숲 속으로 들어간 길은 처음부터 급경사의 계단이었다. 길옆으로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은 잠깐 잠깐 평지가 나타났으나 금방 다시 급사면의 계단이 나타났다. 한참 계단 길을 오르자 몸이 더워졌다. 윈드자켓을 벗어 허리에 찼다. 어둠을 뚫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이따금 구름이 가리는 하늘에는 별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북두칠성을 찾아 그 국자의 끝의 별에서 가늠하여 북극성을 확인하고 산행의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층 거리가 가까워져서인지 비가 멎은 직후의 대기 때문인지 별들이 모두가 밝고 그리고 맑게 반짝였다. 40여년 전 최전방 철책선을 경계하던 시절이다. 매일 밤하늘에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리가 돌아가는 별들의 운행을 쳐다보며 밤을 지새던 나의 청춘시대가 생각났다. 어린 딸에게 농담을 한 기억도 났다. “하늘에 별이 몇 개? 동에 빽빽, 서에 빽빽, 남에 빽빽, 북에 빽빽, 그리고 복판에 스물 스물, 전부 합쳐 840개” 하자 딸이 엉터리라고 항의하였다.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작년에 백두산을 같이 등정한 그 여성 동지가 암봉(巖峯) 너머 멀리서 반짝이는 큼직한 별을 가리키며 그것을 자기별이라 하였다. 마침 나도 그것을 내 별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라(?) 이렇게 되면 우리 둘이 어떤 사이가 되는 것인가 농담을 하였다.
아래 속세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의 심연 속에서 취락(聚落)의 불빛이 여기 저기 산재하였다. 고개를 약간 쳐들자 희미하게 빛이 스린 하늘과 어둠이 짙게 깔린 땅이 서로 닿는 경계선이 엄청난 원을 그리며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얼마나 높은 데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급사면의 계단길을 벗어나자 이제는 가파른 암장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밧줄에 의지하여 전적으로 앞에 보이는 암장을 올라가야 하였다. 6.5KM 지점이다. 시계를 보니 03시 45분이었다. 산행을 시작하여 여기까지 불과 0.5KM를 올라오는 데 약 1시간이 소요되었다.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어두워서 암장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로프 줄을 잡고 조심조심 오른 쪽으로 측진하여 낭떠러지를 벗어났다. 낭떠러지를 벗어나도 나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산행 가이드는 5분 내지 1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우리를 쉬게 하였다. 04시 05분경에 7KM 지점을 가리키는 표지목이 보였고 이로부터 3분을 올라가자 사얏사얏 체크포인터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관리인은 흉패에서 일행의 이름과 번호를 장부와 대조하여 확인하고 산행의 계속을 허락하였다. 해발 3,800M 지점이었다.
사얏사얏 체크포인터를 지나면서 길은 약간 완만해졌다. 간간이 이어지던 수목이 사얏사얏 체크포이터를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을 넘어선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가파른 암반이 나타났다.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암반은 물에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전혀 미끄럽지가 않았다. 04시 20분에 7.5KM 지점을 지나자 시야가 넓어졌다. 광활한 암반지대가 나타났다. 경사도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시선이 닿는 주변이 평평한 암반인 때문에 진행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없었다. 밧줄이 높은 곳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붙잡으려 하였지만 팽팽하여 당길 수가 없었다. 이 밧줄이 없다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밧줄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거의 일렬로 암반의 사면을 전진하였다. 작년에 방영된 KBS TV에서 보던 광경이 생각나서 이 밧줄이 키나발루의 정상 로우스 봉으로 가는 방향으로 계속 이어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둠이 한층 가시었다. 05시 01분경 8KM 지점을 통과하자 좌우에 키나발루 남봉과 당나귀 귀봉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처럼 눈에 잡혔다. 탁 트인 암반 사면의 위로부터 바람이 약간 세차게 불어왔다. 땀에 젖은 몸이 약간 찬 공기를 느끼자 나는 허리에 매었던 윈드자켓을 다시 얼른 입었다.
이 평평바위 지대를 벗어나자 길은 다시 좌측으로 비스듬하게 꺾이면서 계속되었다. 여전히 암반이었다. 오른 쪽에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능선 너머에 정상이 있다고 산행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격려하였다. 이제는 어둠이 상당히 가시었다. 그러나 나는 헤드랜턴을 끄지 않았다.
걸음걸이가 현저하게 느려지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약간 허기를 느꼈다. 공복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싶어 얼른 초콜릿을 하나 씹었다. 옆에 있는 부인에게도 권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부인은 군팅라가단에서 맞은편 침대에 있었다. 그녀에게는 산장에서 출발할 때도 초콜릿을 권하였던 것이다. 하산 길에 그녀는 내가 주는 초콜릿을 먹고 등정하는 내내 속이 매우 매스꺼웠다고 실토하였다.
나는 보통 때와는 달리 방귀가 자주 나왔다. 이 구간은 약간 비스듬히 측진하는 길이었으나 수월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모두가 산행 가이드의 지시에 맞추어 자주 걸음을 멈추고 쉬었다. 그때마다 어떤 일행은 등을 완전히 암반에 대고 벌렁 누웠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8.5KM 지점을 통과하자 진행 방향이 약간 우측으로 바뀌었다. 키나발루의 정상 로우스 봉을 향해 직상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힘이 들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급사면인 데다가 조금 전까지는 하나로 이어진 암반 지대가 이제부터는 큰 바위 덩어리 지대로 바뀌었다. 너덜지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밧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나 밧줄의 장력(張力)이 너무 팽팽한데다가 줄의 길이에 여유가 없어 잡고 힘을 의지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밧줄은 정상으로 인도하는 방향을 지시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더구나 밧줄을 따라 가다가는 큰 바위 덩어리가 앞을 막거나 갑자기 앞이 끊겨 우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산행 가이드 뒤를 바싹 따라 전진하였다. 그는 이곳 행로에 익숙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조금 가다가 쉬곤 하였다. 쉬면서 올라온 방향을 내려다보자 왼편 아래에 키나발루 남봉(3,921.5M)과 맞은편에 세인트 존스 봉(4,090.7M)이 보였다. 내가 선 고도에서 보는 세인트 존스 봉은 지금 향해 올라가는 키나발루의 정상 로우스봉(4,095.2M)보다 오히려 높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년에 백두산 등정에 동행한 여성 동지가 세인트 존스 봉을 보고는 고릴라가 가슴을 펴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였다. 가슴에 해당하는 일대가 흑색의 주위에 비해 약간 흰 색조를 띠었다. 그녀와 함께 키나발루 등정에 참가한 여성 군단은 전혀 힘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진 36. 등정 중에 키나발루 남봉을 뒤돌아보고 (촬영 : 강용주)
사진 37. 등정 중에 세인트 존스 봉을 뒤돌아 보며 (촬영 : 강용주)
어느새 어둠이 완전히 가시고 앞이 환하여 헤드랜턴을 껐다. 그 덕에 시야를 넓게 확보하여 미리 발을 딛고 나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 당도한 것이 06시 08분이었다. 8.5KM 지점에서 정상에 당도하는 데 거리는 짧은 것 같은데도 23분이나 걸린 것이다.
정상은 이미 우리 보다 앞서 도착한 사람들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정상이 매우 협소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얼굴에 여명(黎明)이 비쳐지고 있었다. 모두들 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동쪽 하늘을 보았다. 해는 구름 속에 가려 있었다. 바람이 약간 불었다. 살을 에는 한기(寒氣)를 머금고 있지는 않았다. 한국 가이드는 이렇게 조용하고 온화한 날씨는 드문 일이라 하였다. 틈을 찾아 정상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억지로 비집고 올라섰다. 겨우 확보한 공간이라 안정하게 발을 딛고 서 있기가 불편하였다.
정상에 서자 나는 바로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메라에 담긴 나의 모습을 보면 오른 손을 가슴에 대고 있다. 입을 열고 있고 그 표정을 보아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오른 편에서 나를 부축하며 서 있는 외국 청년이 나에게 무엇이라 말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일행들이 정상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자 차두리 군이 사진을 찍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카메라를 차두리에게 맡겼다. 그리고 나는 서두러 윈드자켓 가슴 주머니에 품고 갔던 대한민국 부산등산교실 팔기회(八起會)의 기(旗)를 끄집어내었다. 공간이 좁았지만 펼쳤다. 약속한 것이었다. 바람이 세지 않아 반듯하게 펼쳐 들 수가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몇 년 전인가 정상에서 갑자기 비가 내려 우산을 펼치는 순간에 몸이 공중에 날리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사고사(事故死)가 있었다는 말을 차두리 군으로부터 어제 듣고는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39.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일행과 함께 (촬영 : 차두리)
일행 한 명에게 부탁하여 기를 펼쳐든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고향에 있는 팔기회의 얼굴들을 생각하였다. 방한모의 왼쪽 날개가 머리에서 풀어져 왼 뺨에 흘러내린 괴상한 보습이었다. 하산하여 카메라에 담긴 것을 재생할 때 알았다. 정상에서 좁은 확보 공간과 짧은 체류 시간에 얼마나 경황이 없었던 순간이었던가를 증명하는 표징(標徵)이 될 수 있다 싶어 오히려 잘 된 일이라 생각하였다.
사진 40.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부산등산교실 팔기회기를 펼치고 (촬영 : 김정호)
정상에서 주위를 조망하는 짧은 동안에도 사람들이 계속 정상을 올라왔다. 일출을 기다렸다. 구름 속에서 갑자기 해가 나타나자 우리는 돌아섰다. 우리는 더 머물래야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자리를 양보하듯 정상에서 내려와 하산을 시작한 것이 06시 20분이었다.
사진 41.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촬영 : 전은순)
사진 42.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일출을 보며 (촬영 : 김정호)
내려오는 길도 편하지가 않았다. 숨이 차거나 힘이 들어서가 아니다. 오를 때보다 사면이 더 급하게 느껴졌다. 큰 바위덩어리가 산재하는 너덜 지역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서기에 여간 위험하지가 않았다. 나는 기듯이 자세를 낮추고 앞 서 가는 일행을 애써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이번 산행에서 나는 앞서 가는 일행을 애써 따라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진 43. 하산하며 세인트 존스 봉을 바라보고 (촬영 : 신현옥)
사진 44. 하산하면서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을 등지고 (촬영 : 미상의 외국인)
평평바위의 광활한 화강암반(花崗巖盤)이 나타났다. 플라토라고 한다. 밝은 눈에서 보는 광경은 지구가 아닌 어느 혹성의 세계 같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부산에서 금정봉을 오른 적이 있는 사람은 금정봉에 다다르기 직전에 너럭바위를 지나간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너럭바위가 온 산을 덮고 있다 상상하면 된다. 멀리 시야를 옮기자 바다가 보였다. 남지나해이다. 짙은 파랑색이다. 내가 고교 시절에 입던 하계 교복 상의가 새파란 인디고 색이다. 바다가 바로 그 밝은 인디고 색으로 펼쳐져 있었다. 정상으로 가는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암반 위를 달리는 밧줄을 따라 잰걸음으로 단숨에 내려 왔다.
사진 45. 하산 길에서 내려단 남지나해의 원경(촬영 : 김정호)
사진 46. 좌측의 정상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밧줄(촬영 : 김정호)
사진 47. 하산 길에 키나발루 남봉을 바라보며 (촬영 : 전은순)
07시 20분에 사얏사얏 체크포인터를 통과하였다. 사얏사얏 체크포인터에서 또 신고를 하였다. 07시 27분에 7KM 지점을 통과한 후 하산 길은 한층 경사도를 더했다. 낭떠러지에 당도하였다. 밤에 오를 때는 몰랐지만 조금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자유낙하할 것 같았다. 오른 쪽에 밧줄을 잡고 왼쪽에 절벽 아래를 흘금흘금 보면서 통과하였다.
사진 48. 하산 길에서 위에서 내려단 본 사얏사얏 체크포인터(촬영 : 김정호)
사진 49. 하산 길에서 사얏사얏 체크포인터를 등지고 (촬영 : 신현옥)
군팅라가단에 귀환한 것이 08시 50분이었다. 숙소에서 정상까지는 불과 2.5KM를 조금 초과하는 거리이다. 지난밤에 등정하는 데 정확하게 3시간 18분 소요된 행로를 하산에는 2시간 30분이 걸렸다. 오를 때 어두워서 보지 못한 주변 경관을 구경하는 둥, 사진을 찍는 둥 여유를 부리며 내려온 탓도 있지만 하산이라 생각하여 이보다 빨리 내려올 수도 있었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 것은 암반으로 된 급사면이 위험하여 하산도 승산(昇山) 못지않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군팅라가단에 귀환하자 산행 가이드가 일행 중에서 가장 연장자라고 염려한 때문인지 나에게 다가와서 웃으면서 “콘그레추레이션!” 하고 등정을 축하하여 주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면서 V자 손가락을 흔들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김정호 회장님과는 하이파이브로 살짝 자축하였다. 새벽에 등정을 포기한 일행이 세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50. 하산 길에서 돌아본 군팅라가단의 등정 산행 입구(촬영 : 김정호)
군팅라가단에 도착하자 바로 짐을 꾸렸다. 군팅라가단에서 우리가 귀환하는 것을 지키고 있던 포터는 얼른 짐을 받아 같이 라반라타로 내려갔다. 라반라타에서는 이미 등정을 끝내고 온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어제 저녁을 먹었던 그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였다. 메뉴는 기본이 어제와 별반 다름이 없었고, 계란 후라이?콘플레이크?우유가 추가되었다. 우리가 늦게 식사를 시작하여서인지 계란 후라이가 금방 동이 났다. 미리 계란 후라이를 챙기지 않은 나는 그로부터 식사가 끝날 무렵이어야 계란 후라이를 접할 수 있었다. 서둘러 익힌 탓인지 약간 탔다. 여성 동지가 또 김치 주머니를 풀었다.
식사를 마치고 틈을 내어 화장실에서 대충 세면을 하고 이를 닦았다. 하산을 앞두고 쉬는 동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제법 빗줄기가 굵은 것이 창문을 때렸다.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비가 개이자 09시 30분에 우리는 라반라타를 출발하였다. 우리가 하산을 서둘자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였는지 안 보이던 포터가 바로 나타나서 배낭을 메었다. 10시 00분에 5.0KM 지점(해발 3,001M), 10시 13분에 4.5KM 지점(해발 2,898M), 10시 29분에 4.0KM 지점(해발 2,75M)에 도착하였다. 4.0KM 지점은 우리가 어제 산행한 메실라우 루트가 팀폰 루트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좌측으로 꺾지 않고 직진하였다. 팀폰 루트를 택한 것이다. 10시 50분에 3.5KM 지점(해발 2,634M), 11시 09분에 3.0KM 지점(해발 2,455M), 11시 19분에 2.5KM 지점(해발 2,350M), 11시 31분에 2.0KM 지점(해발 2,252M), 12시 06분에 1.0KM 지점(해발 2,039M), 12시 21분에 0.5KM 지점(해발 1,935M), 12시 30분에 팀폰 게이트(해발 1,866M)에 도착하여 나는 산행을 종료하였다. 라반라타를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 데 정확하게 3시간이 걸린 것이다.
포터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산 길을 동행하였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쉼터 중 두 군데에서 짧게는 3분 길게는 12분을 휴식한 것을 제외하고 계속하여 직하(直下)하였다. 등반객이 계속 올라왔다. 산행가이드와 포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외국의 청년들이었다. 급사면의 계단 길이 계속되었다. 내려와서 들었지만 팀폰 게이트에 가까워서 여성 동지들이 몸길이 1m 정도의 뱀을 만나 혼비백산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사건이 없었다. 하산은 급경사를 따라 계단길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너무 단조로웠다. 팀폰 게이트에 가까워서 우측에 조그마한 폭포가 유일한 변화이었다. 높은 고도인데도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아 지루하기만 하였다. 노고단 산장에 조금 못 미쳐 코재에서 구례 화엄사로 하산하는 길과 진배없었다. 우리가 당초에 계획한 팀폰 루트를 버리고 메실라우 루트를 따라 등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하산 길에서 알았다.
급경사의 계단 길이 이어지는 하산에서 우리 일행은 선두와 후미 간에 상당한 격차가 났다. 팀폰 게이트에는 내가 일행 중에서 중간으로 도착하였다. 지난밤에 등정을 포기한 일행들 모두가 하산 길에서는 활발하였다. 고소 증세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팀폰 게이트에서 마지막 후미가 도착한 것은 12시 50분이었다.
사진 52. 팀폰 게이트 입구에서 (촬영 : 신현옥)
후미를 기다리는 동안에 팀폰 게이트를 둘러보았다. 한 게시판에 키나발루 산악 마라톤의 경기 결과가 적혀 있었다. 매년 되풀이 되는 국제 행사인 것 같았다. 놀랍게도 팀폰 게이트를 출발하여 키나발루 정상에 갔다가 팀폰 게이트로 귀환한 기록을 보니까 선두가 2시간 50분대이었다. 가히 철인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놀라운 기록이었다.
사진 53. 키나발루 산악 마라톤 경기 결과(촬영 : 강용주)
후미가 도착하고 출입구 입산 관리소에 하산 완료 신고를 한 지 시간이 꽤 지나가건만 우리를 태우고 메실라우 산장으로 갈 차가 나타나지 않았다. 차를 기다리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조금 내리다가 말겠거니 생각하였으나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지붕 아래로 가서 비를 피하였다.
곧 그칠 것으로 여긴 비가 계속 내렸다. 이제부터는 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참말로 우리의 키나발루 등정은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비를 피한 것 같았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 라는 소설을 보면 아내와 이별하는 날, 전투에 패하고 탈주하는 중에 포로가 된 전우가 총살을 당하는 날, 어렵게 만난 아내를 만나 전장을 탈출하여 스위스로 피신하는 날, 스위스에서 아내가 해산(解産) 중에 사망하는 날에 어김없이 비가 왔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비를 상징적으로 사용한다는 비평을 읽은 적이 있다. 키나발루 등정에서는 비가 항상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지만 결코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이는 나의 고산등정사(高山登頂史)에서 무엇을 상징할까 생각하였다.
차를 기다리는데 관광객이 연신 도착하였다. 노인 부부들로만 구성된 외국인 단체도 보였다. 연간 20만명 가까이가 외국에서 이곳 키나발루 국립공원을 방문하고 그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카나발루를 등정한다고 한다.
말레이인으로 보이는 세 명의 청춘남녀가 자가용을 타고 나타난 것이 유달리 나의 관심을 끌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었다. 한 여자는 가슴과 배꼽을 들어내고 무릎 위를 한참이나 올라간 치마를 입었다. 우리 남정네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게 아슬아슬하였다. 나는 이를 보고는 내가 이제 속세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였다. 동행한 다른 여자는 히잡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슬람교가 성하면서도 자유로운 말레이시아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아 흥미롭게 두 여인이 떠날 때까지 계속하여 이들을 지켜보았다. 이들이 떠날 때 그 아슬아슬한 여성이 조수석에 자리 잡고 히잡의 여성이 뒷 자석에 앉는 것까지도 나에게는 의미심장하였다. 우리 일행에서 여성 동지 한 명이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남정네들을 빈정대었다. 나는 작년에 백두산을 함께 등정한 여성 동지에게 저런 나이에 저런 몸매를 하지 않았느냐고 변명하듯이 물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하였다.
첫댓글 면면 아는 분들이 계시네요.. 박교수님 내외 그리고 신교수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