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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형식과 내용 분출한 2000년대 시조
1.
2000년대는 새천년에 대한 대망에서 출발했다. 뉴 밀레니엄의 첫 세기로서 21세기는 지난 시대를 지배해 왔던 가치와 담론을 수용과 변화로 갱신하면서 새로운 천년을 시작했다. 특히 정보혁명으로 ‘새로운 제3의 물결’이라고 불릴 만큼 비약적인 문명을 이룩한 이 시대는 컴퓨터의 공급과 인터넷의 발달을 통해 본격적인 디지털 사회를 열었다.
21세기의 문학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탈장르와 융복합을 표방한 담론들이 생산되었다. 한국문학을 이분화했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은 다양한 문학적 담론의 스펙트럼으로 분화되고 탈경계적 상상력이 시단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또한 주류였던 순수 서정시의 시대가 저물면서 탈서정이라는 분할된 서정의 주체들이 파생되었다. 자기(Self)에 편중되었던 가치와 담론들은 자아(ego)라는 개인적 감정에 집중하는 동시에 타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동안 중심부에서 소외되었던 여성, 환경, 동물, 사물, 지역 등이 표면화되면서 그들의 억압된 서정이 분출된 것이다. 타자화된 자아로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시적 의식은 200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적 흐름으로 기억된다.
2000년대 문학사를 반영하듯 시조단은 탈정형성으로 시조미학을 달성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3장 6구 4음보 45자 이내라는 구태의연한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 기법을 찾으려는 시조시인들의 행보가 주목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사설시조 또는 변형된 연시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자유시와 경계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탈정형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경향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등단자 등 신인의 시편뿐만 아니라 기성 시조시인들의 작품에서도 나타났다. 게다가 자유시 시인들이 시조를 쓰고 발표하는 탈장르 현상까지 생겨나면서 이들이 시조시인으로 재등단하는 풍토가 생겨나기도 했다. 자유시와 경계가 모호해진 시조는 오히려 시조 인구의 확산을 불러왔다. 이는 2000년대라는 새로운 천년 속 변화하는 문학사에서 시조단이 나아가야 할 시대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단의 분위기는 시조시인들의 연령층에 반영되어 20~30대 등단자가 속출했다. 이들은 현대시조의 대중화와 세대적 시조 변혁을 모색하면서 형식적 전통 위에 창조적 계승이라는 시 의식으로 시조단의 차별화를 꾀하였다. 이를테면 2000년대 후반 결성된 ‘21세기 동인’과 ‘영언 동인’ 등은 젊은 층의 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패턴을 구사하며 신선하고 감성적인 시조 생산에 앞장섰다.
2000년대 시조의 문학적 특징으로는 서정성에 입각한 감정과 감각적 정서에서 감수성이라는 분화된 미학적 양상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감각과 감정을 자기로부터 오는 자의식이라고 한다면 감수성은 타자의 아픔을 유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공감 능력으로 통하는 감수성은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같이 상대라는 타자성을 견인하는 덕목 중 하나다. 외부 세계의 자극을 시적 감수성으로 현현하는 상상력은 다양한 방식의 언술을 통해 서정의 체형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2.
2000년대에 등단한 주요 시조시인들 중 이송희, 박지현, 박희경, 박성민, 배우식, 이교상, 조성문, 손증호, 정용국, 선안영, 문수영, 임채성, 서정화, 김진숙, 이석구 등은 불교적 세계관을 시조 작품에 투영하여 감각적인 서정성뿐만 아니라 시대에 대한 비판의식도 함께 드러내고 있다.
이들 중 불교적 사유의 형상화로 독특한 감수성을 현시하는 이송희, 박지현, 박희정, 박성민은 시조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완성해가고 있다.
먼저 살펴볼 이송희는 1976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등의 시집이 있으며 ‘21세기 시조’ 동인이다.
우리 한번 만났던 적 있었던 것 같은데
눈 내리는 창밖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언젠가 들은 적 있는 천 년 전 목소리 자꾸만 붙잡고 싶은 어제 같은 오늘의, 당신에게 달려가다 자꾸만 넘어지고 넓은 그늘 아래서 울던 소리 들려오면 가슴 한쪽 털리고 속이 텅 빈 하늘가에 언젠가 본 적 있는 계수나무 한 그루 그 푸른 나무 아래서 하나둘씩 펼치던 꿈 언젠가 와본 적 있는 이곳에서 길 잃었네
천 년 전 당신 손잡고 걸었던 이 밀밭 길
— 이송희 〈데자뷔〉 전문
데자뷔는 처음 체험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의미한다. “우리 한번 만났던 적 있었던 것 같은데”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이미 보았다’는 데자뷔‘ 현상을 사설시조로 풀어냈다. ‘당신’으로부터 현현하는 화자에게 내재한 불교적 심상이 감수성으로 파고든다. 거기서 발현된 시공간은 전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언젠가 들은 적 있는 천 년 전 목소리”로 표출된다. 화자에게 멈춘 시간은 10세기 고려 시대이고, 공간은 “계수나무 한 그루”가 있는 곳이다. 시공간에서 길을 잃어버린 화자는 종장에서 “천 년 전 당신 손잡고 걸었던 이 밀밭 길”로 생이 반복되는 윤회를 감성적으로 만나게 한다.
물이 쏟아졌다 바닥이 흥건하다
부슬부슬 젖어드는 내 안의 언어들
갑골문
복사(卜辭)가 되어
살과 뼈를 허문다
손톱을 짓이기는 누군가의 허튼말
허공을 떠돌다가 어느 마음에 누워
절명의
눈 붉은 꽃을
화엄으로 피우는데
젖지 않았으면 바스라질 침윤의 생
색깔도 모양새도 모두 제각각이어도
살이면 살이어야 하고
뼈는 뼈이어야 하는 것
— 박지현 〈흔적〉 전문
1954년 부산에서 출생한 박지현은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집으로 《눈 녹는 마을 숲에》 《못의 시학》 등이 있다. 이 시는 언어의 ‘살과 뼈’를 드러내면서 지우지 못하는 말의 ‘흔적’과 함께 불교의 ‘화엄’을 보여준다. ‘화엄’은 만행과 만덕을 닦아 덕과(德果)를 장엄하게 하는 ‘언어’들이다. 한번 내뱉은 말은 쏟아진 물처럼 “부슬부슬 젖어드는 내 안의 언어들”로 고여들어 “복사(卜辭)가 되어/ 살과 뼈를 허문다”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는 화자의 감수성을 파고들며 “손톱을 짓이기는 누군가의 허튼말”이 되기도 한다. “눈 붉은 꽃을/ 화엄”으로 피우고 있다는 것은, ‘허튼말’의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그로 인해 온갖 꽃으로 장식될 수도 있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말라버린 것을 품고 더디게 오는 계절
죽은 지 오래된 지렁이 허물 위로
만장은 가을 무지개, 주문처럼 풀어진다
황급히 길 건너다 그만, 밟혀버린
툭 터진 옆구리로 비릿하게 흐른 액체
점점이 얼룩 남기고 길 위에 길을 내는
끝내 혼자라면 나서지나 말 것을
생때같은 몸을 끌며 한 마장 또 건너다
다비로 붉어진 가을, 하늘 잠시 구불텅하다
— 박희정 〈가을 만장〉 전문
이 시를 지은 박희정은 1963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하여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길은 다시 반전이다》 《들꽃사전》 등의 시집이 있다. 3수 3연으로 된 이 연시조에서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만장’처럼 걸려서 죽은 이를 애도하고 있다. 시적 대상은 “죽은 지 오래된 지렁이”의 주검이며 화자가 “황급히 길 건너다 그만, 밟혀버린/ 툭 터진 옆구리로 비릿하게 흐른 액체”로 현현된다. 지렁이를 통해 자신의 감수성을 타자화하면서 “만장은 가을 무지개, 주문처럼 풀어진” 주검 사이로 “점점이 얼룩 남기고 길 위에 길을 내는” 것을 발견한다. 특히 마지막 행 “다비로 붉어진 가을”에서 ‘다비’는 육신을 불에 태워서 원래 이루어진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불교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결국 가을이 붉은 것은 처음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잠시 구불텅”한 말구가 지렁이의 이미지와 교차하면서 무상함을 일깨운다.
엎질러진 물들이
모르는 길을 간다
축축해진 허공에서
꽃들이 깨어나고
너무나
멀리 가버린
별빛이 또 흐릿하다
부리 닳은 새 한 마리
종소리를 쪼다 가면
그대 손 놓쳐버린
이번 생(生)이 너무 짧다
눈뜨고
눈감는 일이
말라가는 눈물 같다
— 박성민 〈겁(劫)〉 전문
박성민은 1965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여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쌍봉낙타의 꿈》 《어쩌자고 그대는 먼 곳에 떠 있는가》 등이 있으며 ‘21세기 시조’ 동인이다. 2수로 된 이 시의 제목인 〈겁(劫)〉은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나타내는 불교 용어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무한한 시간 속에 존재함을 암시하는데 “엎질러진 물들이/ 모르는 길을” 가듯이 “너무나/ 멀리 가버린/ 별빛이 또 흐릿하”듯이 알 수 없는 시간의 영역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번 생(生)이 너무 짧다”는 아쉬움 속에 다음 생을 기약하면서 “눈뜨고/ 눈감는 일이/ 말라가는 눈물 같다”라는 찰나적 감성으로 인간 삶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한다.
3.
2000년대 시조의 특이점으로 사물에 불교적 심상이 형상화된 시편이 다수 관찰되는데, 이번에 살펴볼 배우식, 이교상, 조성문, 손증호의 시조에서도 불교적 관념이 새로운 시 의식으로 은유되고 있다. 사물의 이미지를 통해 불교적 가치관을 투영하면서 사유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1.
까만 어둠 헤집고 올라오는 꽃대 하나,
인삼꽃 피어나는 말간 소리 들린다.
그 끝을 무심히 따라가면 투명 창이 보인다.
2.
한 사내가 꽃대 하나 밀어 올려 보낸 뒤
땅속에서 환하게 반가부좌 가만 튼다.
창문 안 들여다보는 내 눈에도 삼꽃 핀다.
무아경, 흙탕물이 쏟아져도 잔잔하다.
깊고 깊은 선정삼매 고요히 빠져 있는
저 사내, 인삼반가사유상 얼굴이 환히 맑다.
3.
홀연히 진박새가 날아들어 묵언 문다.
산 너머로 날아간 뒤 떠오르는 보름달
그 사내 침묵 사유 만발하여 나도 활짝, 환하다.
— 배우식 〈인삼반가사유상〉 전문
배우식은 1952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여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보다 먼저 2003년 《시문학》에 등단한 이력이 있는데, 《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 《인삼반가사유상》 등의 시집을 펴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연작시조는 인삼 모양과 반가사유상의 형상을 통해 감각적인 세계관을 선보인다. 연작 1에서 “까만 어둠 헤집고 올라오는 꽃대 하나”인 ‘인삼’을 중심으로 연작 2에 와서는 인삼이 “땅속에서 환하게 반가부좌 가만 튼다”라는 ‘반가사유상’의 이미지와 교환된다. 거기에 ‘무아경’과 ‘선정삼매’에 빠져들고 있다고 서술하면서 인삼은 반가사유상이 되고, 반가사유상은 인삼이 되어 이 둘은 하나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한다. 연작 3에서는 활짝 핀 인삼꽃을 “침묵 사유 만발”로 상징하며 해학적으로 마무리한다.
입춘 내내 내린 폭설 천막 지붕 내려앉고
눈 녹듯 밤새 사라진 컵밥 집 다시 문 여는
고시촌 비탈진 골목
탁발의 밥줄 길다
건밤 새운 칼잠마저 옹송그린 발우공양
종이컵에 꾹꾹 눌러 애옥살이 그리하고
집 없는 민달팽이들
걸랑 하나 그만이다
눈밭엔 부신 볕살 꿈결같이 고명 얹고
한 그릇 밥 비우는 건 그 하루 비손하는 일
눙치는 노루 꼬리 해가
꿀꺽 진다, 저 너머
— 조성문 〈컵밥 공양〉 전문
1965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한 조성문은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했다. 3수로 된 이 시편은 고시촌의 ‘컵밥’ 나누는 풍경을 보여준다. 1수에서는 컵밥을 먹으려고 “고시촌 비탈진 골목”에서 줄을 선 사람들을 향해 ‘탁발의 밥줄’이라고 한다. 원래 탁발은 수행을 하는 승려가 경문을 외면서 집마다 다니며 동냥하는 것을 말하는데, 수행자의 아집과 아만을 없앰과 동시에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의 의미도 수반된다. 2수의 “발우공양”은 ‘종이컵’이 수행의 도구라는 사유를 담아냄으로써, ‘컵밥’이 자비와 공덕이 담긴 ‘공양’으로 승화되고 있다.
봄이 오면
어깨가
탈골되는 남자 있다
긴 밤이 물고 있는
비린 기억
되삼켜
죽어도
죽지 않는 목숨
다시, 몸에
새기는
— 이교상 〈팔만대장경 산벚꽃〉 전문
큰스님 선정에 든 법당 앞 봄날 오후
심심한 동자승 꼬박꼬박 조는 사이
한 그루 목련보살님
꽃등 가만 켭니다.
— 손증호 〈목련보살〉 전문
단시조 〈팔만대장경 산벚꽃〉을 창작한 이교상은 1963년 경북 금릉에서 출생하여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긴 이별 짧은 편지》 《시크릿 다이어리》 등이 있다. 〈목련보살〉의 손증호는 1956년 경북 청송 출생으로 《침 발라 쓰는 시》 《불쑥》 등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
이교상의 시조는 ‘산벚꽃’ 나무를 “봄이 오면/ 어깨가/ 탈골되는 남자”로 비유하면서 ‘비린 기억’과 함께 “죽어도/ 죽지 않는 목숨”을 “몸에/ 새기는” 팔만대장경을 소환한다. 사방에 만발한 ‘산벚꽃’은 번뇌 많은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길을 설법하는 팔만대장경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다.
손증호의 〈목련보살〉은 “큰스님 선정에 든 법당 앞 봄날 오후”를 배경으로 ‘목련’이 피어나는 것을 ‘보살’로 치환하고 있다.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 보살로 겨울을 이겨낸 목련의 아름다운 모습을 형상화했다.
4.
인간의 이성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면서 사물을 가리는 지각 작용이라는 점에서 논리적 사고를 요구한다. 반면에 비논리적인 감정은 객관적인 감각이나 이성과 달리 현상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이나 기분을 의미한다. 외부 자극을 원인으로 우리의 정신과 신체에 생겨나는 이러한 감정은 타자와 세계를 통해 반응하는 기재다.
이번에 살펴볼 정용국, 선안영, 문수영 등의 시편에서는 자신의 감정선에서 발아된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감정이 불교적 정서로 순화되어 그 의미망이 수렴되고 있다.
혼이 빠져나간 자리
녹슨 금강경 몇 줄
공양도 마다한 채
긴 안거에 들어 있다
순순히
소신한 몸을
애물처럼 붙안고
혈마다 진을 빼고
뭉개 놓은 행간엔
임시방편 허기들이
아우성을 치는데
사초는
변명도 없이
긴 한숨만 내쉰다
— 정용국 〈폐광(廢鑛)〉 전문
2수로 된 위 시편의 정용국은 1958년 경기 양주에서 출생했다. 2001년 《시조세계》로 등단했으며, 시집 《내 마음속 게릴라》 《명왕성은 있다》 《난 네가 참 좋다》 《동두천 아카펠라》 등이 있다. 위 시편 〈폐광(廢鑛)〉은 오래전 광물을 채취하던 장소로 텅 비어버린 공간에서 생겨난 불안한 화자의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을씨년스러운 이곳을 “혼이 빠져나간 자리”라면서 ‘녹슨 금강경’ ‘공양’ ‘안거’ ‘소신’ 등의 불교적 제재로 형상화한다. 이를테면 광물을 축출하고 남은 ‘폐광’은 이미 자신을 다 내어주고 역할을 다한 공(空)의 세계다. “혈마다 진을 빼고” 버려진 “뭉개 놓은 행간”을 발견하고는 “임시방편 허기들이/ 아우성 치는데”라고 읊으면서 “긴 한숨만”의 감정선으로 일체개고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목탁 속 어둠 닮은 저녁이 오는 망해사
우는 사람 뒷모습 같은 느티나무 한 그루
우수수
잎들 떨구며
바람에 몸이 휜다
울음 끝 퉁퉁 부은 목젖같이 붉은 노을
곧 꺼질 듯 점멸하는 불빛 아니 혹은 당신
탄광 속
카나리아 새의
울음 같은 너의 안부
— 선안영 〈통증〉 전문
1966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한 선안영은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초록몽유》 《목이 긴 꽃병》 《거듭 나, 당신께 살러 갑니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시조 〈통증〉은 전북 김제시 진봉면에 위치한 망해사를 소재로 한다. 원래 망해사(642년, 백제 의자왕 축성)는 만경강 하류 서해에 접하여 고군산열도 바라보는 망해(望海)의 암자였으나, 2010년 완공된 새만금 방조제로 호수로 바뀌면서 바다를 잃고 본래 이름과 다르게 망해가듯 변해 버렸다. 화자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서 있는 망해사의 처지를 “우는 사람 뒷모습 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떨구는 잎들로 비유한다. 2수 초장 “울음 끝 퉁퉁 부은 목젖같이 붉은 노을”은 환경파괴로 인류가 치러야 할 대가를 경고하고 있다.
모퉁이 비탈진 세상, 마음을 모아 쥔
어머니 구십 평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하나씩 돌 쌓아 올리듯 하루하루 마음 올려
물기 묻은 앞치마 결마다 냄새 서린
알전구 들어 있지 않아도 어둠 비추는
유봉산 깊은 골짜기 천년 지기 사리탑
바람이 숨 돌리는 숲속의 간이정거장
탈색된 그리움이 온 몸 여울로 남아
창공을 부여잡은 손
환하다, 들꽃처럼
— 문수영 〈탑-죽림사 사리탑〉 전문
문수영은 1957년 경북 김천 출생으로,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했다. 《푸른 그늘》 《먼지의 행로》 《화음》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영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3수로 된 문수영의〈탑-죽림사 사리탑〉은 경북 영천 유봉산에 있는 죽림사 사리탑을 소재로 했다. 이곳 사리탑 앞에서 ‘구십 평생 어머니’의 기도가 “하나씩 돌 쌓아 올리듯 하루하루 마음 올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림사 사리탑에는 ‘물기 묻은’ 어머니의 ‘앞치마 결마다 냄새’가 깃들어 있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탈색된 그리움이 온 몸 여울로 남아” 있듯이 어머니에 대한 화자의 감정이 사리탑같이 ‘환’하고 ‘들꽃처럼’ 개화한다는 것이다.
5.
한편 2000년대 시조의 특징으로 시대적 성찰과 사회적 비판의 흐름을 간과할 수 없다. 2000년대 현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시조 형식과 접목되어 당면한 시대의 문제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임재성은 풍자를 통해 끝이 없는 인간의 욕망을, 서정화는 인간의 욕망이 초래한 재난을 질타하고 있다.
극락이 있다길래
극락전 보러 갔지
극락을
빌러 온 사람
극락전 뜰에 줄을 섰네
극락도 만원이구나
극락 가긴
영 글렀네
— 임채성 〈봉정사 극락전에서〉 전문
1968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한 임채성은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등이 있으며 ‘21세기 시조’ 동인이다. 〈봉정사 극락전에서〉는 극락을 욕망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봉정사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본전으로 모신 전각으로 괴로움이 없고 안락한 세상을 추구한다. 이곳에서 화자가 “극락을/ 빌러 온 사람”들을 향해 “극락도 만원이구나/ 극락 가긴 영 글렀네”라는 냉소적인 결구로 욕심 가득한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상한 지느러미 아스팔트에 헤엄친다
허기진 새끼염소 저려 오는 울음소리
도시를 점령한 물이 시뻘겋게 흐른다
부처상 머리 위에 얹은 꽃들 지나서
둑 넘어 씨앗 나르고 변방까지 흘러간 비
한복판 우기를 지나 적멸 위에 잠이 든다
— 서정화 〈아스팔트 연못〉 전문
1977년 서울에서 출생한 서정화는 2007년 백수 정완영 전국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했다. 《유령 그물》 《나무 무덤》 《서이치에 기대다》 《바다 거미 출력소》 등의 시집이 있다. 2수로 된 〈아스팔트 연못〉은 홍수가 난 도시의 모습에서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아낸다. 인간의 시간을 단축한 ‘아스팔트’는 문명의 상징이지만 반면 그로 인한 재해 속에서 아스팔트는 유명무실해진다. “허기진 새끼염소 저려 오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도시를 점령한 물이 시뻘겋게” 흘러갈 뿐이다. “부처상 머리 위에 얹은 꽃들”의 이미지는 이 모두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인과응보임을 성찰하게 한다.
6.
멍들고 뒤틀리고 찢겨진 것들의 고향이다
금박 장식 벗겨진 미륵대불 어깨 위로
세상을 견디게 하는 눈이 펄펄 끓는다
— 김진숙 〈겨울 관음사〉 전문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2000년대 시조는 한편으로 불교적 가치관에 우리의 희망을 의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겨울 관음사〉를 발표한 김진숙 시인은 1967년 제주 출생으로, 2008년 《시조21》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미스킴라일락》 《눈물이 참 싱겁다》 등의 시집을 냈다. 이 시는 제주도 관음사의 미륵대불을 소재로 한다. 이 미륵대불은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 형상으로 2006년 조성되어, 제주도민의 풍요로움과 안락을 발원한다. 따라서 이곳은 “멍들고 뒤틀리고 찢겨진 것들의 고향이”이면서 “금박 장식 벗겨진 미륵대불 어깨 위로” “세상을 견디게 하는 눈이 펄펄 끓는다”고 묘사한다. 그만큼 절박하게 이 험난한 사바세계에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온 산에 늙은 나무
봄이면 꽃이 핀다
개심사 그중에서
대웅전 앞뜰 목련
공양주
무릎에 앉아
하얀 꽃대
올린다
추녀 끝 치켜 올린
허공의 멧새 한 마리
산 너머 숲에 머문
명지바람 불러들여
절 마당
목탁 소리마냥
꽃망울을/ 터트린다
— 이석구 〈해제(解制)〉 전문
1960년 충남 청양 출생인 이석구는 2004년 《월간문학》 신인상과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 《커다란 잎》 《그늘의 초록을 만졌다》 등의 시집이 있으며 ‘21세기 시조’ 동인이다.
이석구의 〈해제(解制)〉는 충남 서산시에 있는 ‘개심사 대웅전 앞뜰’에서 ‘하얀 꽃대’를 올리는 ‘목련’으로 봄을 밝힌다. 그것도 ‘공양주’같이 대웅전에 올리는 ‘봄꽃’은 희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새로운세기의 도래를 알리는 듯하다. “절 마당/ 목탁 소리마냥/ 꽃망울을/ 터트”리는 모습을, 겨우내 동안거에 들었던 수행자들이 안거를 끝내고 만행을 떠나는 ‘해제’로 묘사하고 있다. 불교적 심상에 기대어 새로운 희망이 움트기를 염원하는 작품이다. ■
권성훈
문학평론가.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한신대 종교학과, 경기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박사후과정 수료.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