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은 한국의 첨단요리들이 각축을 벌이는 곳이다. 청담동 요리사들은 외국에 나가서 아이템을 얻어온다. 그래서 청담동은 새로운 요리와 창작 요리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새로운 레스토랑이 많이 생기기도 하지만 없어지는 숫자도 그만큼 많다. 지방 요리사나 서울 강북 요리사들은 청담동으로 와서 새로운 요리를 배워간다.
청담동에 있는 레스토랑 주인들은 생계형이 아니다. 식당 주인이 취미생활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위기로 식당을 꾸미고 멋진 음식을 파는 경우가 많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가장 앞선 패션거리에는 디자이너와 연예인이 모인다. 또 그 거리를 끼고 있는 골목에는 최고의 음식점들이 모인다. 이 음식점들도 패션처럼 유행을 타고 명멸한다. 한국의 청담동은 바로 그런 곳이다.
청담동에 퓨전 레스토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하루에’라는 카페가 시초였는데, 미국 뉴욕에서 오래 살다 온 주인이 단골로 드나들던 뉴욕의 카페와 똑같은 형태로 꾸몄다는 것이다. 그 뒤 한식과 양식을 접목한 퓨전 레스토랑 ‘궁’이 생겼고, 중국식과 이탈리아식을 섞은 ‘시안’도 문을 열었다. 이후 청담동에는 퓨전레스토랑이 붐을 이루었다.
1997년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외식산업이 큰 타격을 입던 시기다. 그러나 청담동은 IMF 바람을 전혀 타지 않고 호황을 누렸다. 이유는 이곳의 고객이 IMF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국의 최고 부유층이었기 때문이다. 청담동 레스토랑의 고객들은 주로 연예인, 정치인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가 외제자동차를 타고 식당을 찾는다. 걸어서 식당을 찾는 손님은 100명 중 1명이 될까 말까 한다.
한국의 청담동에 퓨전 요리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일본계 미국인 토드 니시모토다. 그는 98년 1월 청담동의 ‘시안’ 주방에 들어와 한국에 퓨전 요리라는 새로운 장을 펼쳤다. 현재 시안은 서울에만 분점을 네 곳 두고 있다.
김대원씨는 청담동의 퓨전 중식당 ‘마리’의 주방장이다. 한국의 중화요리를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화교다. 1997년 이전만 해도 화교들은 국내의 까다로운 규제 때문에 중화요리집 이외에는 마땅히 할 사업이 없었다. 또 귀화하지 않는 한 취직이 잘 안 되니, 요리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화교 어린이들은, 아이들이 흙과 돌멩이를 가지고 놀듯이 녹말가루와 튀김가루를 주무르며 자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국사람이 중화요리계에서 요리사를 하기는 쉽지 않다. 특급 호텔에서도 화교들의 텃세 때문에 한국인은 보조요리사 노릇을 하기도 힘들다. 지금도 주한 중국대사관과 주한 대만대표부 직원들은 회식을 할 때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집만 애용한다.
한국 사람인 김대원씨가 운영하는 중식당 마리는 화교들의 중화요리와는 다른, 한국화한 중화요리다. 말하자면 중식 퓨전요리의 시초다. 그는 이 식당에서 이탈리아요리인 파스타도 쓰고 생크림 요리도 만든다. 물론 한국의 화교들이 만드는 중화요리도 중국 본토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 대륙에는 북경 요리, 사천요리, 산동 요리, 광동 요리 등 지역별로 수많은 요리가 있다. 지금부터 100여년 전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한 한국의 화교들은 90%이상이 산동성 출신이다.
이들은 산동요리를 한국에 수입했고, 이것이 100여년 동안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한 것이 한국 화교들의 중화요리다. 말하자면 한국화한 산동요리가 한국의 중화요리다. 그런데 중식당 마리의 김대원씨가 만드는 중화요리는 이것과는 또 다른,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화한 중국요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중화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기름이다. 화교들의 중화요리집에서는 보통 식용유를 쓰는데 김대원씨는 파기름을 쓴다. 파기름은 식용유를 약한 불로 가열한 뒤 양파와 대파의 흰 부분을 잘라 넣고 양파와 대파가 검게 변할 때까지 3∼4시간 튀긴다. 이렇게 만든 파기름은 참기름처럼 순하고 담백하다. 또 양파와 파 향기가 배, 느끼한 맛을 싫어하는 한국인 입맛에 맞다.
김대원씨가 처음 요리를 시작한 것은 20살 되던 해인 1985년이다. 식당 홀에서 일하는 웨이터가 너무 멋있다고 생각한 그는 당시 인천에서 가장 큰 중화요리집인 동보성을 찾아가서 웨이터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대원씨는 웨이터로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말을 약간 더듬었던 것이다. 그때 동보성 지배인은 김대원씨에게 “자네는 말을 더듬어 홀에서는 힘드니, 주방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 낫다”며 취업을 거절했다.
말을 더듬어 요리사가 되다 요리사가 된 것은 이 거절이 계기였다. 그 길로 그는 서울로 올라와 논현동에 있는 중식당 ‘팬다’에 들어갔다. 팬다는 한국 최초로, 대로변에 독자적인 건물과 주차장을 갖춘 기업형 중식당(좌석수 120석)이었다. 그 뒤 그는 남산에 있는 유명한 중식당 ‘아리산’에 들어가 중국요리의 대가 이면희 선생을 만난다.
이면희 선생을 통해 그는 다양하고 화려한 중국요리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일 욕심이 많았던 그는 한 식당에서 요리 기술을 다 배우고 나면 다시 다른 식당으로 옮기를 여러 차례 했다.
화교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요리계에서 그는 전혀 차별을 받지 않는 한국인 요리사였다. 이는 한국인임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하는 노력파였기 때문이다. 이런 열성과 성실 탓에 화교들은 그를 견제하지 않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지금도 프라이팬을 들면 처음 만지는 것처럼 설렌다고 한다. 요리사는 그에게 천직인 모양이다.
현재 청담동에는 ‘마리’ 이외에도 중식당이 많다. 이 중식당은 신라호텔파와 지홍초파로 크게 나뉜다. 신라호텔파는 신라호텔에서 독립해 나온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이고, 지홍초파는 화교 요리사인 지홍초씨 문하에서 배운 요리사들이 차린 식당이다. 김대원씨의 ‘마리’는 지홍초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