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흔히 인간의 원죄이야기로 분류되고 있지요. 죄를 지은 인간이 하느님을 피해 숨어 있다가 하느님께 변명을 늘어놓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비겁한 인간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범죄에 가담한 자들은 차례대로 형을 선고받습니다. 뱀은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되는 운명에 처해지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와 남편에게 다스림 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남자는 범죄의 대가로 땅이 저주를 받아 그 땅에서 나는 소산물을 먹으려면 땀을 흘리는 수고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그럴듯한 해답이 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죄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아니 죄라는 표현보다는 고통의 근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고통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흔히들 교회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가르치지요.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낙원을 잃어버리고 앞에서 말 한대로 형벌을 받고 고통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신본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해석입니다. 이 문제는 좀더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악과란 무엇이며 그것을 먹은 인간에게 온 변화는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악과란 하나의 상징이죠. 그 상징물을 따먹은 인간에게 온 변화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아담의 말을 빌리면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서 숨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은 이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뱀이 이브를 꼬실 때 속삭인 말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 하느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분별지라고 하죠. 뱀이 가르친 것은 너와 내가 다르다. 하느님과 나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는 지식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았고 하느님과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기는커녕 하느님과도, 자연과도 분리되어 대상화된 존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어졌던 하나됨은 분별심이 생겨나는 것을 계기로 하나 하나 분리되어 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니 이전에는 자동적으로 알던 것을 하나 하나 배워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나와 분리된 다른 것을 아는 지식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류의 문명을 형성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일 때는 완벽히 알 수 있었던 것이 분리됨을 통하여 서로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 그래서 경계의 대상이 되고, 끊임없는 다툼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담이 에덴을 떠난 직면하게된 최초의 상황이 형제간의 다툼과 살해라는 가인의 비극이었나 봅니다. 분별지는 인간에게 파당 짓는 것과 그것을 통한 이기심의 충족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랜 세월동안 인간이 살아온 환경이 되고 만거죠.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형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지 않습니다. 뱀으로 표상 되는 악한 세력,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분별심에 대항하여 여자의 후손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과 싸울 것이고 상처를 입기는 하지만 뱀의 머리를 짓밟고 승리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여자의 후손은 바울의 말을 빌리면 둘째 아담임니다. 하느님이 창조의 원칙대로 새롭게 변화시킨 인간이죠. 분별심을 극복하고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인간과 하느님이 완전히 하나된 존재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싸우는 전사입니다. 분열과 다툼이라는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동산에서 다정한 음성으로 찾으시던 바로 그 사람인거죠.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사람 말입니다.
첫째 아담으로 비롯된 인간 고통의 상황 속에서 둘째 아담들은 낙원의 회복을 위해 계속 싸워 왔습니다. 인간의 해방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싸워 왔던 모든 사상가들과 실천가들은 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분별심과 이기심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것은 첫째 아담의 범주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뭐 거창한 이념과 조직을 갖추고 하는 싸움도 있겠지만 별로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홀로 실천하는 싸움도 있습니다.
최근 한총련 5기 출범식을 둘러싸고 학생과 경찰간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꽃다운 젊은이 2명이 죽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한 명은 시위진압이라는 권력의 도구에 동원되었던 전경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경찰의 프락지로 의심받은 선반 노동자였습니다.
사실 이번 한총련 사건의 발단은 경찰의 과잉 반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총련이 출범식을 교내에서 평화적으로 치르겠다고 집회 신고를 하였지만, 경찰은 폭력시위가 예상된다면서 집회를 불허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한총련 측이 대회의 강행을 발표하자 경찰은 원천봉쇄로 맞섰습니다. 출범식에 참가하려던 학생들은 교내 진입이 불가능해지자 산발적인 도심 시위를 벌이게 되었던 거죠.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래 가장 과격한 양상을 보였고, 경찰의 대응 역시 도에 지나칠 정도로 과했습니다. 대치 5일째의 경찰과 학생의 부상자 수가 각각 187명(중상 17명), 500여명(중상 18명)에 이른다 하니 격렬한 대치 국면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은 점점 상승작용을 일으켜 서로의 격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 결국 두 명의 청년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한총련 출범식 장소인 한양대 부근에서 시위대와 대치하다 숨진 유지웅 상경의 사인을 둘러싸고 말이 많았습니다만 부검 결과는 가스 차에 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집도한 국립과학 수사연구소 법의학 부장 강신몽 박사에 의하면 '직접 사인은 간 파열로 폭행에 의한 것으로 보기는 지극히 어렵고 차량에 의한 손상일 것으로 본다'고 밝힘으로써 사인을 둘러싼 시비는 종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뒤이은 노동자 이석씨의 폭행 사망사건은 천파만파의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진술은 이렇습니다. 이석씨의 행동이 수상하여 프락치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석씨가 조사 학생의 목을 조르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해서 구타를 했고 의자에 묶어 놓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석씨를 구타한 학생들은 한총련 조국평화통일 위원장 이준구씨의 호위 대원이고, 경찰로부터 빼앗은 진압봉으로 세시간 동안 이석씨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피멍이 맺히도록 때렸다는 것입니다. 사건 직후 한총련 강위원 의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씨의 유가족에 애도를 표한 뒤 "한총련은 이씨의 죽음과 관련한 모든 법적 도의적인 책임을 질 것"이며 구타에 관련된 학생들과 목격자 5-6명이 경찰에 자진출두 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학생들이 같은 또래의 노동자에게 프락지로 의심 간다는 이유 하나로 이런 폭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속에 분별심이 작용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나와 다른 적이니까 폭력을 써서라도 우리의 생각과 조직을 사수하겠다는 거죠. 이런 태도는 그들이 비난하는 권력의 횡포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조나선 레빈이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나이는 31살, 직업은 뉴욕 브롱스의 빈민가에 있는 흑인 고등학교의 영어 교사입니다.
그 학교는 문제아들이 바글거리는 곳이었고, 총기 사고가 자주일어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학교 입구에 금속 탐지기를 설치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뉴욕 빈민가의 자포자기 분위기가 학교를 오염시켰고, 마약과 폭력, 각종 범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그런 학교에 한 백인교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95년에 자원해 영어교사로 부임한 그는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백인이라고 경원시 하던 아이들도 선생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점점 친해졌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문학의 아름다움과 현실고발을 통하여 그들의 절망을 극복하도록 도왔습니다. 때로는 골치 덩어리인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 양키스 구장을 찾기도 하였고, 레스토랑에 데려가 자신들이 사는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 주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품도록 가르쳤으며, 교육을 통해 꿈을 이루는 방법을 깨우쳐 주려고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지난 6월 2일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자신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은 뉴욕의 빈민가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또 하나의 피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예사롭게 넘겨지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와 함께 지내며 감화 받은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고,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슬픔이었습니다. 거기다 아이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죽음 이후 그의 신분이 알려진 것입니다. 흑인 아이들은 자신들 속에 섞여 들어와 함께 슬픔과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심어주었던 그 백인 선생님이 미국 최대의 연예 산업회사인 <타임 워너> 회장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평소 행동이나 삶을 접한 아이들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삶은 소박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건 이후 가까운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재벌 회장의 아들이기 보다 스스로 택한 삶에 만족하는 '한사람'이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의미를 절망에 빠진 아이들에게 문학을 통한 삶의 승화를 가르쳐 주는 것에서 찾았다고 그의 친구들은 회상했습니다. 재벌 회장인 그의 아버지 제럴드 레빈도 아들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미국 언론들이 전하고 있구요. 뭐 거창한 이념과 사상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조나선 레빈의 경우는 둘째 아담의 반열에 들사람입니다.
종교의 목표는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것을 하느님의 형상회복이라 말하고 불교는 성불이라고 합니다. 사회운동도 인간 해방, 인간화를 부르짖고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목적도 수단이 그릇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탄에게 봉사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은 사람을 찾습니다. 둘째 아담을 기대하며 찾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저주스런 고통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담 이후로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들에게 하느님은 하나의 소망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바로 둘째 아담이죠. 모든 분열과 다툼을 종식시키고 하나됨을 향해 일하는 소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끝에 희망을 남겨두신 것이죠.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느님은 계속해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둘째 아담을 부르고 있습니다. 둘째 아담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완벽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생각, 사상, 말과 행동은 둘째 아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낙원의 회복을 꿈꾸며 오늘도 사람을 찾습니다. 조나선 레빈과 같은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부름을 듣고 나서는 축복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