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무심하다 할 정도로 오랜 가뭄이 이어졌다. 최근 장마에 들면서 메마른 국토 해갈되었다. 비가 제때에 맞춰 적당히 내려주면 인간의 삶이 훨씬 윤택해질 터인데 오래 가물다가 갑자기 폭우가 내리는 것이 다반사다. 그래서 태평성세를 이루려는 황제는 치수 즉, 물을 다스려야만 했다. 내린 비를 저수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적당히 쓸 수 있는 치수정책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다.
비가 보통 때에 비해 오랫동안 오지 않거나 적게 오는 기간이 지속되는 현상을 가뭄(Drought)이라 한다. 기후학적으로는 연강수량이 기후 값의 75% 이하이면 가뭄, 50% 이하이면 심각한 가뭄으로 분류한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 물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자연환경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이 모두 큰 강을 중심으로 탄생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강은 높은 고산지대인 에티오피아가 발원지다. 인류가 모여 뿌리를 내리기에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시작한 나일강은 이집트의 북부를 지나 남쪽으로 흘러갈수록 점차 완만해지고 상류지대에서 내린 많은 양의 비가 중하류의 평지에 이르러서는 범람을 하게 된다. 이것이 결국 홍수인데 그렇게 상류에서 쓸고 내려온 흙들이 중하류의 다소 완만한 지역에 다다르면 퇴적하여 삼각주를 형성한다. 상류지대의 자연재앙이 중하류지대에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짓기 쉬운 비옥토를 만들어 준 것이다. 따라서 이집트문명의 탄생은 나일강의 중하류지대이다. 강 주변의 기름진 땅에서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니 이동을 하던 인류는 다소 불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모여서 국가를 만들고 물질적인 풍요와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지니 상대적으로 세련된 삶이 양태된 것이다. 이것이 곧 문명(civilization, 文明)이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생겨난 이집트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메소포타미아문명, 그리고 인도의 젖줄인 인더스강 유역으로는 인더스문명이 발생하였고, 중국 황하 중하류 지역의 비옥한 황토지대를 중심으로는 황허문명이 발생하였다. 세계 4대 문명인데, 큰 강의 중하류 지대는 대개 농사를 짓기에 좋은 비옥토가 형성되어 있고 큰 강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듯 인류의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라이벌(rival)의 어원도 강(river)에 있다.
우리는 보통 무서운 자연재해하면 쓰나미나 태풍 혹은 집중호우 등을 먼저 생각하지만 미래학자들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홍수 태풍은 삽시간에 대도시를 집어 삼키기도 하지만 사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소리 없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가뭄’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가뭄은 대기근을 가져오면서 찬란했던 고대문명을 수도 없이 몰락시켰다.
인류문명의 기원이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을 멸망시킨 것도 가뭄이었다. 4200년 전부터 약 300년 동안 건조화로 인한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면서 망하고 만 것이다. 중남미 지역의 찬란한 마야문명도 가뭄의 희생양이다. 서기 900년경 마야문명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810년ㆍ860년ㆍ910년경에 닥친 강력한 가뭄 때문이다. 이집트 문명도, 인더스 문명도, 앙코르 문명도 다 가뭄으로 인해 종말을 맞았다.
어떤 기상현상으로도 문명이 멸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뭄은 다르다. 그만큼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역사에도 가장 가혹한 재해인 가뭄의 기록들은 많다.
삼국시대의 가뭄은 주로 봄ㆍ여름에 발생하였다. 가뭄발생에 대한 기록은 가뭄이 발생했다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다. 가뭄피해는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되어 기근을 겪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우기인 7월에 강우가 없어 풀과 나무는 말라죽었다.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려 서로 잡아먹었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자녀들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의 가뭄이 얼마나 큰 참사였나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고려시대에도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뭄은 주로 봄ㆍ여름에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심각한 기근이 초래되었다. 가뭄에 대한 기록의 실례를 살펴보면, 1259년 고종 46년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거나 관리들도 굶주려 죽은 사람이 많다”, 1344년 충혜왕 5년에 “전년도 5월부터 그해 4월까지 거의 1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1381년 우왕 7년에는 “가뭄이 들어 아이들을 버린 것이 길에 가득하였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약 500년 동안 총 100건의 가뭄기록이 남겨져있다. 대략 5년에 한번 꼴로 가뭄이 발생하였다. 가뭄에 의한 피해는 대부분 기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는 기우제가 연중행사처럼 거행되었다고 쓰여 있다. 성군 세종대왕은 가뭄이 들면 하늘에 스스로 죄를 묻고 음식을 줄였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이 나라님의 탓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나라님은 그것이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 여겼고 이윽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에 제를 올렸다.
부덕한 죄인의 마음으로...
대통령은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부덕(不德)의 소치(所致)로 받아들이고 간절히 하늘을 쳐다볼 때 하늘은 감동하여 해갈의 단비를 내려줄 것이다. 그로인해 해갈이 되면 백성들의 마음은 보다 넉넉해지고 서로 다 같이 웃을 수 있지 않을까싶다.
장기간의 경기침제와 어지럽고 혼란한 정치판도에 지쳐 사는 게 낙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는 수많은 국민들을 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자연재해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부디 국민들이 더는 좌절하지 않도록 하늘이 백성들을 굽어 살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덕으로 백성을 대하고 겸허히 나랏일에 정진하는 대통령이 이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구국위인일지라...
〈2017.07.27. 한림(漢林)최기영〉ericchoi1126@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