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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갔다 온 이야기를 사진 몇 장과 함께 간략히 하려 한 것이
길게 늘어 지고, 또 추석 밑에 이런 저런 일이 밀려 마치지 못 했습니다.
이제 이 기행문의 마지막-청기(靑杞)편 입니다.
필자(筆者)가 비록 살지는 않았어도 고향이요,
우재공파(愚齋公派)와 취수당파(醉睡堂派)의 세거지 인지라
귀동냥 한 이야기만 해도 글 한편으로는 어림도 없으나
자세한 것은 아직 진행 중인 세거지(世居地) 시리즈에서
다루도록 하고 이번은 간략히 맛보기 소개만 하겠습니다.
낙남(落南) 길을 따라 (6) 고향-청기(靑杞) (完)
영양읍(英陽邑) 서쪽의 팔시골-여름재 를 넘으면 청기(靑杞)다.
앞서 (5)번 글에서 울팃재 이야기하면서 소개한 상소문 중 한 구절
“….영양은 영해와의 거리가 1백 여 리(里)이고,
먼 곳은 또 8,90리를 더 가는데…..”
그 옛날 청기(靑杞 사람들은 영해부(寧海府)에 가려면
울팃재 가기 전에 여름재 부터 넘어야 했다.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팔시골’ 은 골짜기가 80개 있다 하여,
그리고 ‘여름재’ 는 재가 하도 험하여 ‘여자가 울고 넘었다’고
‘여우름재’로 부르다가 ‘여름재’가 되었다고 한다.
여름재 (예우름재) 항공지도
‘여름재’ 는 ‘예우름재’ 라고도 한다.
‘여자가 울고 넘었다’ 하여 ‘여우름재 ->여름재’ 라 ? 정말 맞는 거야 ?
옛날부터 전하는 이야기로 고향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필자(筆者)는 다른 생각을 해 본다.
전통시대 여자는 재 넘는 데 울 정도로 연약하지 않았다.
크게 힘 한번 쓰는 일이야 남자가 했지만, 표도 나지 않게 골병 드는
잔잔한 일 -김 매고 방아 찧고 밥하고 설거지, 빨래에 옷 만지고 애 거두고
끝도 없는 일은 모두 여자들 차지로 노동의 총량은 여자 쪽이 훨씬 많았다.
더구나 반촌(班村) 일수록 여자들 고생이 심했다.
왜냐하면 양반이라고 다 잘 사는 것도 아닌 데 선비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앉아서 굶을 수 없으니 대부분의 일을 여자들이 할 수 밖에.
필자의 할머니는 내세에는 선비집에 시집가기 싫다고 했단다.
하루는 할머니가 잠시 마실 간 사이 소나기가 와 헐레벌떡
돌아 오니 마당에 널어 놓은 곡식이랑 빨래랑 온통 젖는 데
할아버지는 오불관언(吾不關焉) - 사랑에서 책만 읽고 계시더라고.
옛날 고향 길에 집안 아지매 한 분을 읍에서 만나 재를 같이 넘었다.
필자는 스물이 채 될락말락 이었고,지금 아흔이 넘은 아지매는
당시 오십 대 중반쯤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빈 몸인 필자(筆者)가
숨을 헐떡이며 몰아 쉬는 동안, 머리에 무거운 보퉁이까지 인
아지매는 사뿐사뿐 재를 넘는 것 아닌가 ?
이런 아지매들이 재를 울고 넘었다 ?
별로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여름재는 ‘여자가 울고 넘은 재’ 가 아니라
우리나라 도처에 있는 ‘여우울음재’ 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추리해 본다. 아님 말고.. ^^
*여우는 ‘여우, 여수(단음), 여:수(장음), 예수(단음), 예:수(장음),
여시, 여껭이, 여꽝이, 여호 ‘ 등등 곳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는 데,
영양(英陽) 에서는 ‘여수’ 라고 한다.
동네 전경
재 이름에 걸핏하면 ‘울음’ 이 들어 갈 정도로 깊은 산중(山中) 이지만,
그런대로 들판을 끼고 있는 골짜기도 있다.
사진은 필자의 13대조(11세(世) 문월당(問月堂) 갓등 산소에서
청기(靑杞) 동네를 내려다 보며 찍은 것이다.
앞에 내가 휘감아 돌고 들판이 넓지는 않지만 아늑하게 펼쳐진 것이
그럭저럭 사람이 살아갈 만 하게 보이지 않는가 ?
영남인구와 옛날 농사법
역사를 들여 다 보다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옛날 영남(嶺南)의 인구가 다른 도(道)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다.
조선초기 호구전결도표
위 자료의 출처는 “영남사림파의 형성-이수건 저’ 로서
저자가 조선초기 자료를 Processing 하여 만든 도표다.
도표에 보면 경상도의 전결(田結) 수가 호남보다 많고
인구-호수(戶數)는 전라, 충청을 합친 정도에 가깝다.
요즈음도 세금 피하려고 별수를 다 쓰는 데, 그 옛날 부역이나 조세를
면하려고 숨고 숨기는 일이 흔했을 것이니, 실재 보다 누락된 수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국적인 현상일 것으로경상도 사람만 정직하고 전라도는 요령 부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
인구란 토지의 부양력과 직접 관계가 있을 터인 데,
산이 많은 영남(嶺南)에 기름진 들판 호남(湖南) 보다
어째서 인구가 더 많았을까 ?
여기에는 복합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 두 가지를 추정해 보면 ;
첫째 : 지리적으로 준령(峻嶺)으로 막혀 있다.
경상도는 험한 산맥이 병풍 같이 둘러 져 고려 시대 빈번한 북쪽 오랑캐
-거란, 몽고, 홍건적의 침입 때도 비교적 안전했으니 다른 도 (道)에서 피난
오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6.25 때도 경상도로 모두 모이지 않았는가 ?
왜구(倭寇)는 정규부대가 아니라 도적떼니 바닷가는 몰라도
내륙 깊숙이 들어 오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둘째 농사법의 차이
오늘 날은 너른 들판을 큰 저수지로 물을 막아 가며 짓는 것이 능률적이다.
그러나 옛날 기술로는 큰 댐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이앙법-모내기도
조선 후기에야 들어 올 정도였다. 원시적 기술로는 넓은 평야 큰 강보다는
작은 하천을 끼고 있는 계곡에 펼쳐 진 들판 쪽이 농사짓기 쉽다.
경상도는 도 중앙을 흐르는 낙동강으로 흘러 오는 계곡물이
상류부터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다.
이런 곳에 농사를 지으면 가물어도 산에서 물이 계속 나오고,
또 내 바닥이 높지 않으니 홍수위험도 별로 없다.
요즘도 다른 곳에서 큰 물 지거나 가물어 난리가 나도,
필자(筆者)의 고향은 거의 그런 일을 겪지 않는다.
요즈음 생각 같아서는 옛날 어른 분들이 좀 넓은 데 자리 잡으시지
왜 하필 이런 궁벽한 산골에 들어 오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자 고향에 왔으니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벌초를 해야 한다.
사진 : 갓등산소와 청기
위 사진 중 붉은 핀을 꽂은 곳 '오대댁' 이 우리집이다.
오대댁은 할머니 택호(宅號)로 그 손자- 필자의 이 카페 닉이 '오대댁 손자' 다.
사진 위 중앙쯤에 우리 할배, 할매 산소가 있고,
그 위로 조금 올라 가면 13대 조(祖) 산소, 다시 그 위에
14대 조(祖) 분이 계시다.
우리 산소에는 떼가 잘 자라지 않아 벌건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떼가 없으니 일 할 것도 별로 없지만 카메라를 의식하여
아들녀석과 함께 뭘 하는 척 해 보았다. ^^
풀이 많으면 예초기 없이 내 낫질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갓등산소 항공사진 확대
할배 할매 산소에서 어영부영 풀을 벤다기보다 뽑고 나서
‘갓등’ 이라 불리는 비탈 능선을 따라 올라가 14대조(10世) 와
13대조(11세 문월당) 산소를 찾았다.
나중에 아들녀석한테 들으니 지 친구들한테 십 몇대 조(祖) 산소
찾아 보았다고 했더니 엄청 놀라더라나…^^
14대조 (10세(世) 휘(諱) '민수' 공 산소에서 청기동네를 !
사진 바로 앞이 14대조 (10世), 그 오른쪽 비껴 아래에 보이는 산소가
13대조(11世) 문월당 산소다.
청계정 (靑溪亭)
청계정은 필자(筆者) 의 12대조-고향 마을 입향조(入鄕祖) 우재공(愚齋公)을
위한 정자다. 이 어른이 이 마을에 자리 잡은 것은 대략 병자호란 (丙子胡亂1636년)
직후라니 현재 종가(宗家) 당주(當主)까지 12대 370년 정도를 이 마을에서
살아 온 셈이다.
입향(入鄕)을 둘러 싸고 민담(民譚) 비슷한 것이 있다.
이 마을에는 의성 김씨 한 분이 먼저 살았으니 12대조 분과 친구였다.
두 분이 바둑 두다가 우리 조상이 이겨서 이 마을을 얻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런 이야기란 정규 역사 보다 생명력이 질겨서 나까지 들은 것이다.
이 이야기를 아들에게 했더니
‘그럼 우리 조상이 겜블러(Gambler-賭博師) 였어요 ? ‘
하는 것 아닌가?
거 참 버르장머리 없긴 하지만 그렇게 들리게끔 이야기한 잘못도
있는 지라…. 쩝 !
조계정 (造溪亭)
청계정이 우재파 공동조상-12대 조(祖) 우재공(愚齋公)을 위한 정자라면,
조계정은 우리 집안 정자로 (정확하게 우리 큰집-당주(當主)는 필자와
재종(再從-6촌간), 증조(曾祖)께서 5대조를 위하여 지었다.
우리집과 마을
이제 우리 집 뒤 언덕에서 마을을 본다.
사진 상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우리 집인데
여러 해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 놓아 거의 허물어져 내린다.
몇 년 전 고건축 하는 지인(知人)에게 보였더니,
“하아.. 뭘 잠깐 손 대셨군요. 그것만 아니어도 지방문화재 신청이 가능한데”
이러는 것 아닌가 ? 더 들어 보니
잘 지은 집은 당연히 아니고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으나 (약 150년 ?)
요즈음 시골에 전통 민가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아
이야기를 붙일 수도 있은 듯.
거 .. 참.. 집 걱정 안 해도 될 뻔한 것을… 쩝…
고장비알
위 사진 - 마을과 우리 집 사진 찍은 언덕을
‘고장비알’ 이라 부른다.
‘비알/ 삐알/빈달’ 은 경북북부 말로 낮은 언덕이요.
고장은 고려장의 준말이라고 한다.
마을 전설에 의하면 바로 고려장 지내던 언덕 이란다.
농토 넓히느라 다 갈아 엎었는지 ?
지금은 지표에서 보이지 않지만 얼마 전 까지 돌- 영양지방에
흔한 구리성분 때문에 붉은 빛이 도는 돌-로 무엇을 쌓은 흔적,
자연상태는 분명히 아닌 인공구조물이 있고 그 사이로 틈까지
벌어져 노인을 그 안 구덩이에 넣고 숨 질 때 까지 구메밥을
조금씩 넣어 주었다는 ‘고려장’ 설을 그럴듯하게 뒷받침 하고 있었다.
이렇게 동네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 오는
‘고려장’ 설을 굳게 믿고 있지만 필자(筆者)는
그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아님 말고 수준이 아니라…^^
왜 고려장터가 될 수 없는지 ? 를 논증(論證)하려면
제법 긴 이야기가 될 터이니 나중에 별도의 글 꼭지를 잡겠다.
이하 사진이 더 있으니
즉 취수당파 정자 사진과
동구 밖 망미에 있는 삼일 기념탑과 음설록 비
-부름할배가 기미년 옥중에서 분하여 쓴 시비(詩碑)
입향조 우재공 친구로 우리가 청기에 자리잡게 권유한
표은 김시온 선생이 우거(寓居)하던 돈간재(敦艮齋) 사진
등 여러 점 더 있으나 글 한편에 올릴 수 있는 사진 용량을 초과한 지라
곧 다룰 세거지(世居地) 청기(靑杞)편에서 부연하기로 하고 이만 마친다.
이상으로 요령부족으로 중언부언한 이야기
끝 까지 읽어준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첫댓글 #부럽군요 오대댁 할머님 택호 떼가 자라지 않는 산소는 왜일까요 집이 아주 좋군요 잘 보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마을이 평화롭고 넓어서..겜블러중국에 졸정원을 아시는지요 하룻밤 노름으로 그큰 정원을 탕진한 애기 아름다운 정원으로 관광의 명소로서 부족함없는...아주 거운 마음으로 보았구요 읽어보면 볼수록 재미있고 해서 이제는 오대댁님 글의 애독자가 되었어요^^계속 해서 많은글 올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명절 잘 보내셨지요 모친께서는 강령 하시구요감사 합니다,
네 어머님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고 두서 없는 글 잘 읽으신다니 기쁩니다 ^^
청기 정말로 아음다운 고장이군요 시간뒤면 청기한번가바야지 좋은글 감사 감사
너무 많은것을 느끼게 하는군요 아이에게 조상님의 삶에 대해 가르치는 일 그리고 고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 조상님에 대한 업적등 많이 알고 있다는 점 또한 알고 있는 내용을 잘 표현하여 쉽게 이해하게 설명 한다는점이 부럽습니다 우리 함양오씨 카페를 빛내는 형님께 항상 감사드림니다 ^^
함양오씨의 영양쪽. 집성촌에대한. 역사탐방 이야기는. 아마도. 함오의 모든집성촌에 해당되는. 것으로 봅니다. 유사한. 역사의 과정을 밟았 겠지요. 다른곳 3-5곳만 더된다면..책을만들어도..되겠네요..묘지위 황토흙..문제는. 이론적으로는..복합비료주면..잔디가 잘살게됩니다..
필자의 고향이기도하지만 나의고향을 인터넷사진으로 직접보게되니 고향에 간 느낌이드는군.그곳에서 자라지도 않았는데도 어떻게 그곳에서 성장한 나보다도 더많이 알고있어서 한편으론 부끄럽군.앞으로도 좋은글 좋은자료 부탁해요.
대단하십니다. 저의 시집이 청기라 다시한번 정감이 갑니다. 아쉽게도 저의 집은 보이지를 않네요.....
번지수와 택호를 말씀하면 보여드릴 수도 있을 텐데 ^^
이렇게. 오대댁손자님의 글을 끝내기는. 아쉽네요. 좀. 쉬었다가.... 함양오씨의 영양. 선조님들의 많은. 문집 저서에 대하여. 살펴봐주시길 바랍니다. 문월집2권. 용계공집. 취수당일고. 우제공집. 외에 조선말기의 인암. 석준애국지사글. 시등. 많은 저서 있는데...이들에대한. 글 도 쓰셔야지요. 감격스러운것들이. 많드라구요..
옛어른들께. 들은바. 일정시대. 이전에는. 왜적. 난들이 많아서. 피난을 자주 다녔답니다. 이로인해. 가능한한. 난을 피할수있는. 오지로. 들어가 사는것이 종족보존. 과 행복하게 사는길이 였을겁니다. 이런관점에서. 볼때. 영양은 오지로써. 최적지가 아닌가 보여집니다. 이런환경과 조건속에서. 함양오씨의 역사을. 길게. 보존할수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내륙의 오지로써. 동해안의 생선을 쉽게 구할수 있는곳. 그러면서도..민족최대의 시련기였던..임진왜란. 정유재란. 몽고침입. 등등 의난에 피해을 적게본곳이 아닌가?. 생각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