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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우리집 대소사
* 팔순 자서전 발간
* 혁범 삼성 부장 승급
* 벼락 맞은 종부세
* 집사람 생일 강릉 여행
* 신안 섬 여행
* 혁범 장모 소천
팔순 자서전 발간
칠순에 ‘생각나는 대로 쓴 나의 인생기’ 에 이어 팔순에 ‘덤으로 사는 인생’을 출간 하였다.
320페이지에 500부를 인쇄하였다.
만 2년에 걸친 코로나 사태로 집회가 금지되어 발간된 책을 배포할 기회가 적어졌다.
들어가는 글
내가 고희에 ‘생각나는 대로 적은 나의 인생기’ 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발간하였다.
평생을 돌아보니 내로라하는 업적도 없고 사회적 명망도 없는 평범한 삶이었지만 내가 살아 있었다는 흔적이라도 남기기 위하여 기술한 책이었다.
이 책을 보고 친척은 왜 본인을 승화해서 쓰지 않고 비하해서 썼느냐고 서운해 하기도 하였다.
친구들은 나보고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칭찬을 한다.
출판사 사장은 전체적인 평을 술로 치면 막걸리 맛 이라고 한다.
소주나 양주라고 하지 않은 것은 미사여구 없이 소탈하게 썼다는 뜻이다.
출판사에 원고를 맡겼을 때 미숙한 문구를 세련되게 수정하고 편집을 해 줄 것을 기대 했으나 수정이 하나도 없이 오자도 그대로 나와 제본만 맡긴 꼴이 되었다.
내 원고를 보고 문장이 옛날식이라 요즈음 문장으로 바꾸려면 문맥의 뜻이 변형된다고 바꾸기가 애매 하다고 그대로 출판하겠다고 하여 허락한 결과다.
이번 팔순에 또 한권의 책을 출간 하려고 한다.
고희에 출간 할 때보다 문장이 세련되어야 하는데 기억력이 쇠퇴해 가고 감정이 메말라 가니 나 혼자 읽고 만족하는 졸작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메모 하듯 살이 붙지 않고 줄거리만 썼으니 명문장은 기대 할 수도 없었다.
대신에 사실에 입각한 생의 진솔한 면을 기술 했고 실명으로 표현을 하여 상대의 불만이 나 올수도 있으나 이것이 나의 적나라한 생활상을 표현 한 것이다.
나는 일제 시대에 태어나 초등 학교 때 6.25를 만나고 대학교 시절에 5.16을 맞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해병대 장교로 월남 전선에 파병되어 청룡부대 전포대장으로 전투를 한 참전 용사다.
포병 중대장으로 전역을 하고는 회사의 봉급쟁이로 있다 경리부장을 끝으로 중기업을 하는지 30년이 넘었다.
보릿고개에 허덕이던 5, 60년대에는 부모의 그늘에서 굶지는 안했지만 궁핍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우리나라가 한참 발전하고 있는 7, 80년대에 우리 집도 같이 발전을 해야 하는데 봉급생활하는 내가 이 시절에 집안을 책임지는 일이 생겼다.
조카들 까지 내가 아우르는 생활에 발전은 둘째 치고 피곤이 극에 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은 생활에 굴곡은 있었지만 자립하여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는 평범한 시민이 되었다.
내 일생을 보면 환갑 전 생활은 기억하고 싶지가 않다.
우리나라가 최빈국이던 시절부터 선진국에 이르는 동안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온 우리나라 역사의 산 증인이 될 동안 고생을 많이 한 생활 때문일 거다.
집안과 생활이 안정된 환갑 후의 생활은 행복의 연속이 20여년 지속되어 팔순이 되는 지금까지 불만이 없다.
내 일생이 팔십으로 끝날 줄 알았으나 지금까지 성성한 것을 보면 지금부터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즐겁게 살아보려고 한다.
여행 매니아로 코로나로 여행이 중단될 때 까지 집사람과 세계의 73개국을 여행했으니 여행에 대하여는 여한이 없다.
도서출판 문예프러스 에서는 내가 원고를 송고하니 작가라고 인증서를 준다.
지금도 스키장에를 가면 최고령자 스키어에 속한다.
고대 MBA 산우회를 열심히 따라 다니며 체력을 다진다.
고등학교 등산모임은 내가 주관하며 친구들에게 만보라도 걸으라고 독려하고 있다.
이런 체력이 구순까지 계속되기를 기원해 본다.
나의 강점은 아직 건강하다는 것이다.
2021년 12월 18일
권 오 찬
혁범 삼성 부장 승급
혁범이가 3월 1일부로 부장 진급 명령을 받았다.
삼선전자의 부장 진급이다.
그것도 기술부문 핸드폰 파트다.
축하할 일이다.
대학 졸업하고 말단 직원으로 입사하여 부장까지 승급하느냐고 수고와 고생 많았다.
부모입장에선 자식이 삼성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전에는 삼성에서 과장만 따고 이직을 하면 다른 회사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경쟁을 하고 직급도 높혀 우대해 주었다.
그만큼 삼성에서 인재를 뽑고 하드 트레이닝을 한 결과다.
우리 부부는 자식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3월 1일 6,3 빌딩 파밀리아 에서 혁범이 식구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며 격려 하였다.
벼락 맞은 종부세
문정부가 들어서서 부동산 법을 26번 뜯어 고치더니 조용히 살고 있는 나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사람이 한 주택을 가지고 있어야지 여러 채를 갖고 있으면 비율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법이다.
나는 55평 땅에 빌라를 지어 원룸에 세를 놓고 나도 살고 있다.
구청에 임대주택 사업자를 등록하고 세무서에는 임대사업자로 사업자 등록증을 받았다.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다하고 세금을 내며 조용히 살고 있는 나에게 작년에는 한 푼도 나오지 않던 종부세가 금년에 3천만 원이나 나왔다.
나는 정부의 실수나 오류로 알고 세무서에 가서 수정해 달라고 갔더니 고지서가 맞다 고 한다.
하도 어안이 벙벙해서 이유를 물으니 구청에서 임대사업자 등록이 말소되어 다세대 보유자이기 때문에 20억 과표로 정당하게 세금이 부과된 것 이라고 한다.
자년까지 하나도 내지 않던 세금을 3백만 원도 아니고 일년 년봉인 3천 만원을 부과하는 정부가 어데 있느냐, 국민에게 사전정보를 주고 해야지 가만히 않아있는 순진한 국민에게 정부가 이게 무슨 짓이냐 고 따저도 담당자는 자기도 황당하지만 법이 이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액을 분납 처리해 줄 수 있는 것이 다 라고 한다.
대지도 30년 이상 보유하고 있었고 세대주고 고령자인데 감액은 안 되냐고 물으니 해당이 안 된다고 한다.
담당자가 자기도 안타깝지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구청에서 사업자 등록을 9/30일 까지 소급해서 해 준다면 가능하다고 한다.
구청 민원실에 가서 임대 사업자등록 신청을 할 테니 날짜를 소급해서 해 달라고 하니 할수 없다고 한다.
가만히 가지고 있는 임대사업자 등록증을 작년에 구청에서 내가 말소해 달라고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구청에서 직권말소하고 종부세가 웬 말이냐고 따지니 작년에 법령이 바뀌어서 그렇단다.
작년에는 구청에서 3년 치 임대한 전출입 신고를 모두 하라고 하여 밤새도록 찾아서 서류를 구청에 신고하였는데 임대사업자 등록 말소는 무슨 짓이냐고 해도 자기부서가 아니라 모른다고 하다.
직권 말소가 된 후에 구청에 찾아가서 세금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니 하도 법이 바뀌어 자기들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이건으로 민원인이 구청에 폭주하여 설명도 못해주고 지금에 와서 세금폭탄이 웬말이냐고 항의 해도 자기들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한다.
구청에서 임대사업자를 재신청하지 않으면 이런 이런 문제가 있으니 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하여 주었으면 순진한 우리는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우선 가만히 있는 임대사업자를 직권 말소 하고 이런 분란을 만드는 정부의 시책이 경솔하기 짝이 없다.
정부정책에 부합하지 않는 임대사업자를 선별 직권 말소 하였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는 정책만 남발하는 정부가 원망스럽다.
구청 직원은 민원인의 얼굴을 안쓰럽게 처다 보며 억울한 것은 아나 자기들은 보탬을 줄 수 있는 것이 지금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임대사업자 등록을 3개월 소급해 달라며 민원 감사를 정식으로 제출하니 법령에 의하여 못한다고 구청에서 과장 전결로 공문이 왔다.
집사람은 세금통지서를 받고 감정이 예민해져서 잠도 제대로 못자며 식구들한테도 옛날일 까지 들춰가며 분란을 일으키니 집안에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만약 처녀 총각이 집 한 체씩 갖고 있는데 결혼을 하면 종부세를 뚜드려 맞는데 결혼을 해야할까? 또 부부가 집을 한 체씩 가지고 있는데 종부세 때문에 이혼을 해야 하나 하고 망 서려 질꺼다.
기본법 외에는 법이란 가능한 한 없는 것이 최상이다.
문 정부 들어서 제정된 부동산법은 모조리 페기 해도 국민에게 조금도 해가 없다.
집사람 생일 강릉 여행
집사람 생일 여행으로 혁범이가 강릉 세인트존스 호텔에 예약을 하며 수영도 하라고 한다.
9월4일에 혁범이 식구와 우리는 강릉에서 랑데뷰를 하였다.
이 호텔은 평창 동계 올림픽때 새로 지은 대형 호텔인데 크고 해안 비치에 연결되어 있어 상류호텔이 가질 수 있는 최적의 요인을 가지고 있다.
별채의 옥상에는 수영장이 있어 수영장에서 보면 동해가 펼쳐 있고 옥상이라 외부에서 보면 환상적인 수영장이다.
날씨가 싸늘한데도 수영을 할 수가 있고 온탕도 있다.
사계절 운영할 수 있게 지붕이 여닫이로 되어 있다.
우리 부부 방은 비치를 향한 베란다에 가전제품은 삼성제품이다.
혁범 부부와 순우방은 우리 방에서 한참 떨어진 북향이다.
강릉에 이런 고급호텔이 들어서다니 강릉의 면모가 변하는 느낌이다.
더구나 호텔에 붙은 해변 비치는 큰 소나무로 우거진 숲을 지나면 해안 비치다,
강문 해변이다.
전에는 군대의 철조망 때문에 해안을 갈수가 없었는데 철조망이 없어지니 비치도 넓고 바다로 갈수가 있어서 멋있는 해수욕장이 나타난 것이다.
지금 보니 군의 철조망이 다 걷혀 있어 해안이 매우 넓고 훤해서 참으로 좋고 해수욕장이 해안을 따라 비치로 계속 이어진다.
민물호수인 경포호를 둘러보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도 올라봤다.
서울을 뺨치는 커피거리 중앙 재래시장 옆의 월화거리에서 관광객을 위하여 강릉시에서 많은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호떡에서 부터 오징어 순대, 왕새우 튀김등 관광객들의 구미에 맞게 만들었는데 예상외로 많이 팔리고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다.
가격은 싼 편이 아니다.
우리나라 수제 맥주를 파는 상점이 있어 각지의 수제 맥주를 기념 삼아 여러 가지를 샀다.
양양의 하조대 해수욕장 옆의 서피 비치를 가 보니 완전히 해수욕장의 분위기가 틀린다.
서피 비치는 수영은 할 수 없고 서핑 전용 비치다.
젊은이들의 집합 장소고 식당의 데크레숀도 서양식이라 양양에서 외국 기분 내는 꼴이다.
바다에서 파도 타는 서퍼들을 보니 거의 다 초보들이다.
파도도 일이 메타 높이로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무릅 정도이니 서핑 선수들 입장에서 보면 장난감 정도다,
그래도 이런 파도에서 보드 위에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는 달리 쉽지가 않다.
서핑을 한다는 것은 체력과 유연성이 있어야 하고 한나절만 타면 녹초가 된다.
서퍼들의 낙원이다.
아들 덕분에 2박3일 동안 집사람 생일 여행 잘 했다.
신안 섬 여행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신안 섬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전라도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김대중 슨상님 알파고와 대결한 이세돌의 고향 신안이다.
10월 19일 전남 광주에서 무안을 거처 신안까지 가는데 관광 안내소에서 관광지도를 찾으나 신안 지도는 없다.
신안에 관광객이 다른 곳에 비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신안의 지도읍사무소를 찾아가서 관광지도를 얻고 안내 말을 들은 후 수산시장을 지나 증도 소금 박물관으로 갔다.
태평염전에서 나온 소금 두가마를 사고 증도 면사무소를 지나 펜숀을 찾아 짐을 풀었다.
바닷가가 보아는 전망 좋은 펜숀인데 휴가철이 지나서 인지 손님이 없다.
주인에게 물어 여기의 특산물을 물어보니 짱둥어 탕이란다.
짱뚱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도 특산물이라고 하니 안내해 주는 대로 식당을 찾아갔다.
짱뚱어는 올챙이 비슷한데 바다 갯벌에서 사는 물고기로 예쁘지는 않다.
가격은 비싸지는 않으나 특별한 맛은 아니고 일반 해물 탕과 비슷하다.
낙지까지 주문하여 소주 한 병으로 반주하며 저녁을 해결하였다.
오늘 하루 본격적인 신안 관광에 들어갔다.
증도의 명물인 짱뚱어 다리를 건너 짱뚱어 해수욕장까지 갔다.
슬로시티 슬로건을 내세운 신안 습지에서 시간도 여유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고요함을 맛보았다.
신안 해저 유물을 발견했다는 낙조 전망대 까지 가서 유물은 발견했다는 바다의 부표를 바라보았다.
부표가 없으면 바다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도는 없다.
신안 북부에서 남부로 가려면 왕바위에서 페리선을 타야 하는데 배 시간을 못 맞추면 멀쩡하게 선착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다행히 우리가 도착하니 배가 대기하고 있어 자은도로 갈수가 있었다.
자은 면사무소 옆에서 중식을 하는데 전라도 음식은 반찬도 많고 맛있기로 유명한데 섬 속의 여기는 어떨까 하고 호기심 있게 기다렸다.
대중음식점의 점심이라 반찬은 많이 나오지 않아도 정갈하고 외지인들의 입맛에도 맞는다.
앞태를 지나 안좌의 김환기 고택을 갔다.
나는 잘 모르는 화가 인데 여기 출신이라 부각시키는 모양이다.
벽화거리라고 하여 풍류와 서화를 즐기는 전라도의 그림이 어떤가 하고 찾았더니 현지의 주민도 어딘지 모른다고 한다.
신안이 야심차게 만든 퍼플교를 갔다.
동네 입구에서부터 모든 집의 지붕을 퍼플색인 보라색으로 덮었다.
전체가 보라색이니 눈에 확 띈다.
안좌에서 박지도 반월도 안좌도를 다리로 연결 하였는데 이 다리를 모두 보라색인 퍼플로 칠하고 퍼플교라고 명명하였다.
신안의 자랑거리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다.
보이지 않던 관광객이 여기에 오니 관광명소 답계 많이 보인다.
섬을 들어가는데 입장료를 받는다.
보라색 옷을 입은 사람은 무료다.
퍼플교에서 사진을 찍으면 환상적이다.
박지도에서 반월도까지 1 Km 나 되는 다리는 박지도 들어가는 500M 의 다리보다 조형미가 덜하다.
다리 어디에서 사진을 찍더라도 퍼플교의 멋스러움은 흠잡을 데가 없다.
박지도를 올라가면 보라색 꽃 정원이 있어 기념사진 찍기도 좋다.
신안은 퍼플교로 성공을 했다.
퍼플교를 보고 암태도의 에로스 사각 박물관을 보았다.
에로스 보다는 사각에 중점을 둔 것 같다.
신안의 또 하나 명품 천사대교를 건넜다.
목포에서 신안을 오려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천사대교를 완공하는 바람에 목포에서 신안의 퍼플섬까지 승용차로 직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천사대교로 신안은 이제 육지와 다름없는 생활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단초를 놓은 것이다.
천사대교는 7 Km 가 넘는 긴 현수교와 사장교로 내가 보기에 신안군에서 제일 잘한 역사로 본다.
천사대교를 보다 목포로 들어가는 압해교를 보니 이 긴 다리가 천사대교와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 같은 느낌이 든다.
목포에서 1박을 하고 목포해상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승강장 입구가 유달산 공원주차장에 있는 줄 알았더니 북항에 있다.
덕분에 유달산을 한 바퀴 돌며 유달산 공원을 볼 수 있어 더 잘 되었다.
북항에서 고하도 까지 3.2 Km를 운행하는 해상케이블카인데 유달산꼭대기에서 한번 쉰다.
그 바람에 유달산에 올라 목포 시내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혁범 장모 소천
6원 3일 혁범이 장모님이 알츠하이머로 고생하시다가 요양병원에서 소천을 하시었다.
수원 성 빈센트 병원 장례식장에 모시어 이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장식하였다.
남편을 여이고 홀로 남매를 키워 딸 미연이가 혁범이와 결혼하여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홀로 사는 여인이 칠십 평생 살면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격것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미연이 사춘기에 집안에 굴곡이 있었는데도 미연이가 샛길로 빠지지 않고 잘 자라주어 우리는 고맙게 생각한다.
혁범이 결혼하기 위하여 미연네 식구와 여의도 식당에서 상면 할 때 미연이 친 삼촌이 왔다.
미연이 어머니 입장에서는 부산 삼촌을 부르는데 무척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 부산 삼촌이 장례식장에 와서 주관을 하니 보기가 좋다.
나는 미연이가 부산 삼촌집들 하고 왕래가 있고 계속 친하길 원한다.
장례식장에는 혁범이 회사에서 장례식장 소모품을 일체 가지고 와서 상객을 맞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다.
혁범이는 이런 행사를 손이 익어서 매우 순조롭게 잘 치러 나간다.
식장에서 부산 친척들 하고 미연이는 단체 카톡방도 만들고 상시 교류하자고 하였다.
미연이는 이제 친척들 하고 스스럼 없이 만날수 있어 내 마음도 홀가분 하게 느껴진다.
여기의 주된 역할은 부산 삼촌이 한 것 같다.
장례식장에는 혁범이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코로나 상황인데도 여러명이 문상을 왔다.
장례비용을 내가 부담 할가 하다가 사돈집에 참견하는 것 같아 백만원만 부조로 하였다.
캐나다의 혁진이도 백만원을 하여 장례 비용에 유용하게 쓸것이다.
미연이 친척들은 미연이가 시집 잘 가서 잘 살고 있다고 고맙게 생각할거다.
집사람과 나는 이틀 동안 식장에 가며 우리가 주역인양 접대를 받았다.
발인식에는 너무 일찍 하여 참석을 못한다고 일러 주었다.
혁범이 장모님은 화장을 하여 봉안당에 남부럽지 않게 잘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