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경기(京畿) 양근군(楊根郡)
동쪽으로 지평현(砥平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남쪽으로 여주(驪州) 경계까지 23리이며, 서쪽으로 광주(廣州) 경계까지 39리이고, 양주(楊州) 경계까지 40리이며, 북쪽으로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까지 1백 1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양근군(楊根郡)인데, 일명 항양(恒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빈양(濱陽)이라 고치어 기천군(沂川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옛 이름을 회복하여 광주(廣州)에다 예속하였다. 명종(明宗) 5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高宗)이 영화(永化)라고 일컬었으며, 원종(元宗) 10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향리(鄕里)였으므로, 승격하여 익화 현령(益和縣令)으로 삼았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승격시켜 군으로 만들어 지금 이름으로 회복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속현】 미원현(迷原縣) 군 북쪽 41리 지점에 있다. 고려 공민왕 5년에 국사(國師) 보우(普愚)가 군(郡)의 미원장(迷原莊)ㆍ소설암(小雪菴)에 우거하고 있었으므로, 장(莊)을 승격시켜 현(縣)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다가 조금 뒤에 땅이 좁고 사람이 드물므로 도로 군(郡)에 예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 1인인데 종사품이다. 여러 군이 같다. 훈도(訓導) 1인인데 종구품이다. 여러 군과 현이 같다. 【군명】 항양(恒陽)ㆍ빈양(濱陽)ㆍ영화(永化)ㆍ익화(益和). 【성씨】 본군(本郡) 함(咸)ㆍ탁(卓)ㆍ부(傅)ㆍ경(耿)ㆍ경(敬)ㆍ이(李)ㆍ정(鄭)ㆍ박(朴) 모두 속성(屬姓)이다. 미원(迷原) 함(咸). 【형승】 좌편으로 용문(龍門)에 의지하였다 이적(李迹)의 시에, “좌편으로는 용문에 의지하고 우편으로는 호수를 베었네.” 하였다. 【산천】 용문산(龍門山) 다른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인데, 군 동쪽 33리 되는 곳에 있다. 또 지평현(砥平縣) 편에 있다.
충주산(忠州山-떠드렁산) 군 동쪽으로 10여 리 되는 강 가운데 있다. ○ 한수(韓脩)의 시에, “해는 관음봉(觀音峯)에 비치는데, 손은 양근관(楊根館)을 떠나네. 동으로 30리를 행하지 못하여, 천경(千頃)이 편평하기가 책상과 같네. 맑은 강이 항상 오른쪽에 있는데, 멀고 가까운 것이 모두 구경할 만하네. 다시 10리쯤 가서 말을 쉬고 높은 언덕에 오르니, 외롭게 서 있는 강 가운데 산이 나의 호한(浩汗)한 시야를 가로막네. 이 지방 사람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저것이 본래 충주(忠州)에 있던 산인데, 내려오다가 여기에서 정지하였기에 충주산으로 부른다 하네. 동행들은 진실한 말이 못 된다 하여 모두 한 번 껄껄 웃었네. 영은산(靈隱山)은 날라 왔는데, 창오산(蒼梧山)이 이 짝이 되도다. 고요한 것은 산의 상리(常理)인데, 천상(天常)을 네 어찌 어지럽혔느뇨. 이곳이 어찌 그리워서 왔으며, 저곳이 어찌 괴로워서 도망하였느뇨. 물어도 끝내 말하지 않으니, 바람을 임하여 홀로 길이 탄식하노라.” 하였다.
양백산(陽白山) 군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마현산(馬峴山) 군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마유산(馬遊山) 군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대탄(大灘) 군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곧, 여강(驪江)의 하류인데 용진(龍津)과 합류한다. 돌이 물 가운데를 가로질렀는데 물이 넘치면 보이지 않고, 물이 얕아지면 파도가 부딪쳐 격동하고 쏟아져 흘러서, 하도(下道)의 수운하는 배들이 가끔 표몰(漂沒)되었다. 고려 때에 왕강(王康)이 건의하여 그 돌을 조금 팠었으나 공사가 쉽게 성취되지 못하여 그만두었는데, 그 뒤로부터 물 형세가 더욱 험하여졌다. 본조 세조 때에 구달충(具達忠)을 보내어 파게 하였더니, 물 가운데 나가서 그 돌의 둘레에 나무 문지방을 쌓아서, 물을 말리고 팠으나, 또한 끝내 성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염예퇴(灩澦堆 양자강 중류에 있다)에 비교한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맑은 가을 어젯밤에 유쾌하게 다락에 오르니, 작은 배가 흐름을 따라서 자유롭네. 흰 돌은 앞 여울에 이빨처럼 감춰졌고, 푸른 산은 양쪽 언덕에 여러 머리처럼 솟았네. 키 앞에 조금 앉았노라니 말보다 편하고, 뜸 밑에 외롭게 졸면 한가하기 근심하듯 하네. 얼굴을 우러르면 용문산의 높이가 만 길인데, 또 남은 취흥(醉興)을 타서 양주(楊州)로 지나네.” 하였다. 서심탄(西心灘) 군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대탄(大灘)의 하류이다. 파내탄(波乃灘) 군 남쪽 28리 지점에 있다. 대탄의 하류이다. 용진도(龍津渡) 군 서쪽 44리 지점에 있다. 나루 위에 여울이 있어 가물면 도보로 건넌다. ○ 권근(權近)의 시에, “작은 배가 푸른 물결 사이에 가볍게 출렁이니, 편히 건너는 것이 참으로 평탄한 길의 편한 것과 같네. 지난일이 유유(悠悠)하여 모두가 꿈이로구나. 떠서 사는 것이 역역(役役)하니 얼마 동안이나 한가한가. 물정이 헐뜯고 칭송하니 이름이 누(累)가 되었고, 환로(宦路)에 올랐다 잠겼다 하니 담(膽)이 한심스럽네. 영천(穎川)을 향하여 귀 씻는 것을 이루지 못하니, 맑은 강에 티끌조차 비치는 것이 매우 부끄럽네.” 하였다. 병탄(幷灘) 군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여강(驪江) 물과 용진(龍津) 물이 여기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병탄이라고 한다. ○ 이색(李穡)의 시에, “흐름을 따라 내려가니 뱃사공이 한가하도다. 험한 곳을 만나면 경각 사이에 놀라 외치네. 늦게 사장(沙場)에 닿으니 바람과 이슬이 차가운데, 한 등잔이 깜박깜박하여 구름 산을 비치네.” 하였다. 월계천(月溪遷)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산 중턱에 꾸불꾸불 둘려 있어 아래로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토산】 쏘가리[錦鱗魚]ㆍ누치[訥魚]ㆍ산개(山芥)ㆍ송이[松蕈]ㆍ잔무애뱀〔白花蛇]ㆍ신감채(辛甘菜)ㆍ오미자(五味子). 『신증』 백점토(白粘土) 군 남쪽 15리 되는 부로개촌(夫老介村)에서 난다. 【학교】 향교(鄕校) 군 서쪽 3리 되는 곳에 있다. 【역원】 오빈역(娛賓驛) 군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 권근(權近)의 시에, “누(樓) 밖에는 긴 강이요 들 밖에는 산인데, 좋은 바람이 두 기둥 사이에 차 있도다. 올라가면야 비록 살과 뼈를 맑히기는 하나, 거기서 땀흘리는 농부들을 차마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 권람(權擥)의 시에, “비를 무릅쓰고 새벽도 아랑곳없이 역루(驛樓)에 올라, 서쪽으로 화산(華山)을 바라보니 한없이 유유하도다. 누가 이날의 어버이 생각하는 뜻을 알리. 돌아가려는 마음을 쥐어서 물 흐름에 부치고자 하노라.” 하였다. 월계원(月溪院) 월계천(月溪遷) 북쪽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지난해에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산 나무에 앉아서 시를 썼도다. 그윽한 새가 서로 아는 것같이 울면서 좋은 꽃 가지에 오르네.” 하였다. 다락원(多樂院) 군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말원(末院)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초원(草院)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우】 소설암(小雪菴) 미원장(迷原莊) 미지산(彌智山)에 있는데, 보우(普愚)의 사리탑(舍利塔)이 있다. 권근(權近)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사나사(舍那寺) 미지산(彌智山)에 있다. 서방사(西方寺) 마유산(馬遊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총묘】 김사형(金士衡)의 묘(墓)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유관(柳寬)의 묘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김자지(金自知)의 묘ㆍ김여지(金汝知)의 묘 모두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강맹경(姜孟卿)의 묘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숭원(李崇元)의 묘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김하(金何)의 묘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고적】 함공성(咸公城)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만 9천 58척이다. 고려 때에 고을 사람들이 몽고(蒙古) 군사를 여기에서 피하였다. 【명환】 신라 자옥(子玉) 원성왕(元聖王) 때에 자옥을 양근현 소수(小守)로 삼았는데, 집사(執事) 모초(毛肖)가 논박하여 말하기를, “자옥은 문적(文籍)으로 출신(出身)하지 않았으니, 근심을 나누는 직책을 맡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시중(侍中)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비록 문적으로 출신하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당(唐) 나라에 들어가서 학생이 되었으니, 또한 쓸 만하지 않은가.”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본조 강석덕(姜碩德) 지군(知郡)이 되었다. 【인물】 고려 함규(咸規) 광평시랑(廣評侍郞)이고 태조(太祖)의 공신이다. 함유일(咸有一) 규(規)의 5대손이다. 인종(仁宗) 때에 서경(西京)이 반(叛)하니, 서리(胥吏)로서 종군한 공으로 선군기사관(選軍記事官)으로 조용(調用)되어, 벼슬이 공부 상서(工部尙書)에 이르고 치사(致仕)하였다. 그의 아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공이 생존한 때에 여러 아이들의 산업과 기지를 좀 마련하려 하는데, 어째서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외롭게 누구의 원조도 없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절조를 지키어 문호를 성립시켰으니, 아이들도 다만 마땅히 정직하고 절약하며 검소하여, 천명을 기다릴 뿐이지. 어찌 가난한 것을 근심하고 슬퍼하랴.” 하였다. 함순(咸淳) 유일(有一)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열녀】 본조 옥금(玉今) 군 아전 이순명(李順命)의 아내이다. 순명이 병으로 죽어 상사(喪事)를 마치니,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자 옥금은 죽기로 맹세하였다. 억지로 개가시키려 하니 드디어 스스로 목매었다. 『신증』 기매(其每) 귀화(歸化)한 동철환(童鐵環)의 아내이다. 철환이 일찍이 군관(軍官)이 되어 종성(鍾城)에서 병들어 죽자, 기매는 재물을 흩어 남편의 친척들을 고용하여서 함께 관을 호위하여 갔다가 돌아와서 묘혈(墓穴)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2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대탄공아장용마(大灘共訝藏龍馬) 조박(趙璞)의 시에, “산 앞의 두어 집, 강호(江湖)를 곁하고 있으니, 땅은 궁벽하고 사람은 드물어 할 일도 없다. 대탄은 용마를 감추었는가 모두 의심하고, 남령(南嶺)에는 봉추(鳳雛)가 있는지 누가 알랴.” 하였다. 여룡탐수불행우(驪龍貪睡不行雨) 한수(韓脩)의 시에, “여룡이 졸음을 탐하여 비를 행하지 않는구나. 두우(杜宇)가 괴롭게 우니 누가 새끼를 먹이는가. 옛 관사(館舍)는 황량하고 사람은 적적하니, 등불을 켜게 하여 벽에 비쳐 오락으로 삼네.” 하였다. 서새산전삼양가(西塞山前三兩家) 강석덕(姜碩德)의 시에, “서새 산 앞에 두세 집 있는데, 편평한 모래 먼 나무에 맑은 연기가 비꼈네. 느지막이 고깃배가 굽이진 물가에 의지하니, 가을비가 갈대꽃에 쓸쓸하도다.” 하였다. 수촌연화민안업(數村煙火民安業)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두어 촌락의 연화는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고, 한 동천(洞天)의 구름과 안개는 저절로 그림을 이루었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효종 9년에 지평(砥平)으로 하였다가 현종(顯宗) 9년에 다시 따로 두었다. 영종(英宗) 4년에는 현(縣)으로 내렸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23년에는 갈산(葛山)으로 옮겨 다스렸다. 전에 고을[舊治]은 건지산(乾止山) 아래에 있었다. 정종(正宗) 9년에 현으로 내렸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토산】 송이[松蕈]ㆍ백토(白土)ㆍ종이[紙]. 【누정】 태허루(太虛樓) 읍내에 있다. 감호정(鑑湖亭) 서쪽 8리에 있다. 【방면】 고읍(古邑) 북쪽으로 10리이다. 동시(東始) 동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이 10리이다. 동종(東終) 동쪽 처음은 10리, 끝이 20리이다. 남시(南始) 서쪽 처음은 10리, 끝이 20리이다. 남중(南中) 서쪽으로 40리이다. 남종(南終) 서남쪽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서시(西始) 서쪽 처음은 10리, 끝이 30리이다. 서중(西中) 서북쪽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서종(西終)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70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이 20리, 끝이 80리이다. 【진도】 용진도(龍津渡) 남쪽으로 광주(廣州)와 40리 거리인데, 나루 위에는 여울이 있고, 가물면 걸어서 서울로 가는 큰 길로 통하여 요해지(要害地)였다. 아래에는 고량진(高浪津)이 있는데 조그마한 지름길이 있다. 갈산진(葛山津) 남쪽에 있다. 세사진(洗司津)ㆍ상심리진(上心里津)ㆍ수청탄진(水靑灘津) 서쪽으로 10리이다. 수여리진(水餘里津)ㆍ사참진(沙站津)ㆍ이포진(梨浦津) 여주(驪州) 조에 있다. 【고읍】 미원(迷原) 북쪽 45리에 있다. 공민왕 5년 왕사(王師)로서, 중 보우(普愚)가 미원장에서 우거하였다. 소설암(小雪菴)을 장(莊)으로 승격시키고, 현으로 하여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땅이 협착하고 사람이 적어, 도로 군(郡)으로 예속시켰다.
[주D-001]영천(潁川) : 영천은 곧 영수(穎水)인데,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사양하자, 허유가 귀를 더럽혔다 하여 물에 귀를 씻고, 영수 남쪽 기산(箕山) 위에 숨었다는 곳이다. [주D-002]근심을 나누는 직책 : 임금의 근심을 나눈다는 뜻인데 수령(守令)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경기(京畿) 지평현(砥平縣)
동쪽으로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경계까지 47리이고, 남쪽으로 여주(驪州) 경계까지 16리이며, 서쪽으로 양근군(楊根郡) 경계까지 21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江原道) 홍천현(洪川縣)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울까지 1백 6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지현현(砥峴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이 광주(廣州)에 붙였고, 신우(辛禑-우왕)가 유모 장씨의 고향이므로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파하였으며, 공양왕 3년에 현의 경내에 철장(鐵場)을 두고 감무를 설치하여 겸하게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었다 전조(前朝) 말에 여러 현의 감무를 모두 참외(叅外) 및 권무(權務)와 사(司)의 이전(吏典)으로 시켰기 때문에, 품질(品秩)이 낮고 사람이 미천하여 세상에서 천하게 여기었다. 홍무(洪武) 21년에 비로소 조관 육품(六品) 이상을 가려 제수하여 보내어 그 소임을 중하게 하였으나, 감무의 이름이 오히려 그대로 있더니, 이때에 와서 고치었다. 여러 도가 이와 같다. 【관원】 현감(縣監) 1인인데, 종육품(從六品)이다. 여러 현감이 같다. 훈도(訓導) 1인. 【군명】 지현(砥峴)ㆍ지제(砥堤). 【성씨】 본현(本縣) 이(李)ㆍ신(申)ㆍ경(敬)ㆍ김(金)ㆍ방(方). 【형승】 동으로 원주(原州)를 접하고, 남으로 여흥(驪興)을 이웃하며, 북으로 홍천(洪川)에 닿았다 최항(崔恒)의 동헌기(東軒記)에 있다. 【산천】 미지산(彌智山) 현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곧 용문산(龍門山)이다. 부동산(不動山) 현 북쪽 30리에 있다. 소산(所山) 현 남쪽 7리 되는 곳에 있다. 송현(松峴) 현 동쪽 30리 원주(原州) 경계에 있다. 구질현(仇叱峴)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전곡천(田谷川)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근원이 부동산에서 나와서 양근군 대탄으로 들어간다. 【토산】 송이[松蕈]ㆍ신감채(辛甘菜)ㆍ산개(山芥)ㆍ오미자(五味子)ㆍ자기(磁器)ㆍ도기(陶器). 『신증』 녹반(綠礬) 현 북쪽 월로리(月老里)에서 난다. 【누정】 해서정(解暑亭) 객사 남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전곡역(田谷驛)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백동역(白冬驛)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지덕원(之德院)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상원사(上元寺) 미지산(彌智山)에 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여기에 거둥하였었다. 윤필암(潤筆庵) 미지산에 있다. ○ 이색이 왕의 명으로 나옹(懶翁)의 부도명(浮屠銘)을 지었는데, 그 무리들이 윤필물(潤筆物)을 바쳤다. 이색은 받지 않고 폐한 절을 수리하게 하였기 때문에 암자 이름으로 삼았다. 용문사(龍門寺) 미지산에 있다. 산을 용문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절 때문이다. 절에 이색의 대장전기(大藏殿記)가 있다. 죽장암(竹杖庵) 미지산에 있다. ○ 이색의 중수기(重修記) 대략에, “지평(砥平)의 용문산은 세상이 아는 바인데, 그 이름은 미지(彌智)이다. 옛날에 암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개현(開峴)으로, 이 암자에 있으면서 도를 깨달은 자의 이름은 잃었으나, 군왕에게서 대지팡이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죽장(竹杖)으로 편액(扁額)하였다. 산 가운데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것이 이와 같다. 암자가 산 가운데 있어 높은 곳을 차지하여, 마치 심장의 위치에 있다면 상원사는 무릎에 있는 것 같다. 암자가 시원스럽고 깨끗하며 나무 숲과 봉우리가 창울한 밖으로 뛰어나서, 굽어보면 치악산(雉岳山)과 여강(驪江)이 손바닥 가운데 있는 것 같다. 가까운 봉우리들이 나직이 읍하여 좌우에 둘려 있으니, 빼어나고 온자하여 사랑스럽고 구경할 만하며, 사찰의 경치가 컴컴했다 밝았다 하는 것이 또 말할 것도 없다.” 하였다. 보리사(普提寺) 미지산에 있다. 고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중 대경(大境)의 현기탑비(玄機塔碑)가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인물】 고려 이적(李績) 청렴하고 절개를 닦아 기뻐하고 노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평상시에는 담(膽)이 없는 것 같으나 군진[陣]에 임하여 용맹을 부릴 때에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또 검소하여 비록 귀하고 현달한 데 이르렀으나, 항상 누추한 방에 거처하기를 편안히 여겼다. 벼슬은 추밀(樞密)에 이르렀다. 【제영】 거민협안수평분(居民挾岸水平分) 중 정근(丁近)의 시에, “큰 뫼뿌리가 하늘을 꿰뚫어 동이를 엎은 것 같은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언덕을 끼고 있으니 물이 편평하게 나뉘었네. 창(窓)에 임한 붉은 잎새는 바람 앞에서 춤추고, 골짜기에서 울리는 드문 종 소리는 달 아래서 들리네. 고요한 가운데 소리가 있으니 돌 시내가 어여쁘고, 한가한 가운데 일이 많으니 산구름이 웃네. 주인의 맑은 절개를 장차 누구에게 비교할까. 문득 영재(鈴齋 군청청사)에 차군(此君 대를 말함) 없는 것을 한하노라.” 하였다. 동계수합서계수(東溪水合西溪水) 이계수(李桂遂)의 시에, “동쪽 시냇물은 서쪽 시냇물과 합하고, 남쪽 고개 구름은 북쪽 고개 구름과 연하였네.” 하였다. 만첨한기수생운(滿簷寒氣樹生雲)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벽을 격한 빠른 사람은 샘돌에 떨어지고, 처마에 가득한 찬 기운은 나무에서 구름이 난다.” 하였다. 두견체혈야심문(杜鵑啼血夜深聞)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제비가 집을 찾는 것을 봄 뒤에 보고, 두견의 피맺힌 울음을 밤 깊어 듣네.” 하였다. 우세산용개박간(雨洗山容開箔看) 옛 사람의 시에, “비가 산 얼굴을 씻으니 발을 열어 바라보고, 바람이 꾀꼬리의 말을 전하니 꽃을 격하여 듣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버섯ㆍ백토(白土)ㆍ종이[紙].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면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상북(上北) 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상동(上東)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하동(下東) 끝이 25리이다. 상서(上西) 끝이 15리이다. 하서(下西) 서북쪽으로 끝이 30리이다. 【사원】 운계서원(雲谿書院) 선조(宣祖) 갑오년에 세웠다가 숙종 갑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인물】 조성(趙晟) 자는 백양(伯陽), 호는 양심당(養心堂)인데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벼슬은 의영고녕(義盈庫令)이었다. 조욱(趙昱)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인데, 성(晟)의 아우로 벼슬은 장수 현감(長水縣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주D-001]윤필물(潤筆物) : 윤필은 붓을 적신다는 뜻인데, 글씨를 써 준 사람에게 보수로 주는 물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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