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6.25 동란의 순교자들(4)
윤 달 용 (모 세) 신부 (1890 - 1950?)
윤달용 신부는 성공회 성미카엘신학원 제8회 졸업생으로 1930년 6월 8일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1890년 8월 6일(음)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서 농업과 어업을 하던 아버지 윤기호씨와 어머니 유마리아씨의 사이에서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을 부모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하여 인격도야에 바탕을 세웠다.
그는 16세 때에 영세를 받고 그후 온수리에 있는 진명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후 20세 때에 서울로 유학하여 제일고보(경기중) 병설 교원양성소에서 수학한 후 서울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2년 후에는 강화 교동도에 있는 교동학교로 전임되었는데 이곳에는 이미 교동에 성공회가 있었으므로 교회의 기도생활은 물론 봉사활동에 있어서도 지도적 역할을 다 하였다.
그는 후에 사제가 되는 기초적인 신앙을 이 기간에 키운 것으로 알고 있다.
윤모세 신부는 사제직에 오르기 전 1924년에 현재 장학관과 같은 도 시학을 역임하였으며, 이 직책은 그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오르기 힘든 것 이었고, 그의 달변과 박식함은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맡을 정도로 탁월한 웅변가였다.
그는 한일 합방 이후 계속되는 일제의 강압과 폭정, 개인감시 그리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비극속에서 성직의 길이 뻔히 어렵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좋은 대우를 받던 공무원 생활을 내던지고 조마가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성공회 성미카엘 신학원에 입학하고 6년후 신부로 서품되어 강화읍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의 관할사제를 역임하였고,
인천 성미카엘 성당(현 내동성당)에서 잠시 목회한 후 서울대성당의 관할사제로 시무하였으며, 총감사제의 직을 맡아 교구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다.
윤달용 신부는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남달리 실천한 분이었다.
1930년 11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개최되었던 성공회 최초의 전도대회에서 윤신부는 김인순(바나바) 신부와 주 강사로 활약 하였으며 전도대회를 마치고 1931년 1월 성공회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표하였다.
"이 일은 백천전도구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필요한 계획과 실시할 사업이라고 나는 단언하기를 꺼리지 아니합니다."라고 하였고,
전도대회 후 회보에서 제언하기를
첫째) 전도대회 목적을 확정할 것.
둘째) 전도대회 준비를 1년동안 충분히 준비할 것.
셋째) 선전을 충분히 할 것.
넷째) 외교인에게 전도할 강사와 냉담자에게 강연할 강사를 구별할 것.
다섯째) 강연호가 끝난거은 새로운 시작이니, 강연 후에 노력할 것 등이다
이러한 피력은 성공회 초기 전도에 적지 아니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직자로서 강직한 성품과 굽히지 않는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성직을 택할 만큼 소명감이 있는 성직자였으며, 오직 복음 전파를 통하여 국민의 무지를 일깨우는데 노력하여 JODK (KBS의 전신)에서 교양강좌를 담당하였다.
그의 설득력 있고 달변이기도 한 설교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고 한다.
한국동란이 터졌을 때 서울에 있던 선교사들이 끝까지 교회를 지키자고 하였으며,
특히 윤모세 신부는 거리에서 인민재판으로 많은 사람이 살상 당하자 이모라는 인민위원장을 찾아 재판을 금지하도록 요청할 만큼 담대하였다.
윤달용 신부는 서울대성당의 관할사제로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신앙심 때문에 피난해야 한다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며,
1950년 7월 17일에 정치보위부에 연행 되어 18 - 19일에는 가택수색을 당하는 온갖 수난을 겪었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그는 8월 21일까지 그 형무소에 있었다는 사실이 9.28수복 후에 그곳에서 발견된 쪽지로 확인 되었다.
그 후 서울에서 순교 당하였다.
참고 및 출처: 선교 백년의 증언
주)
윤달용 신부의 가족으로는
친자 윤태헌(베드로)과 친손자 윤지상(요한)이 성공회 서울교구 분당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