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 여행
올해엔 시간이 날 것 같지 않았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모처럼 단풍 구경 날짜를 잡고 설레는 마음에 출발하기 전부터 내 마음엔 벌써 단풍이 들어 있었다. 대미사 후에 일행과 합류하여 단풍축제가 열리는 백양사로 향하였다. 백양사 톨게이트가 가까워지기도 전에 먼저 온 자동차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부터 국도까지 빼곡하게 들어 찬 자동차들을 보며 흥분되었던 마음은 서리맞아 말려 놓은 무 잎 시래기가 되는 듯 하였다. 단풍 구경도 식후경이라 백양사 역전에서 택시기사에게 맛있게 하는 식당을 물어 점심을 먹고 나니 달리는 차에 속도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다시 눈앞에 긴 줄이 끝이 보이지 않게 시작되고 계속 가야되는지 망설이는데 백양사 단풍만 단풍이냐고 옆에 있던 국립공원 남창 골에서 노란 저고리에 폭 너른 빠알간 치마를 두른 새각시가 가느다란 손을 흔드는데 유혹의 손길이 너무도 달콤하였다. 긴 자동차의 행렬보다 남창 골의 유혹에 넘어가 버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만장일치로 좌회전을 하고 순간의 선택에 만족하며 휘파람을 불며 룰루랄라! 시원스런 물소리가 부르는 계곡으로 빠져들었다.. 이 곳이 백양사와 같이 국립공원 내장사 지구에 속하기는 한 거야? 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남창 골은 세 사람, 혹은 네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등산로가 잘 닦여 있었다. 툭 트인 등산로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시원스럽게 열어 주었다. 갈참나무, 단풍나무는 붉은 모습이 절정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제 몫을 다하며 알록달록 뽐내고 있었고 돌 틈 사이 이름 모를 들꽃들도 마지막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푸르던가 붉던가 둘 중 하나였으면 한다는 어줍잖은 나의 말에 일행 중 한 분이 "왜 그래? 다 자기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데!" 라고 하셔서 부끄러워 내 얼굴이 단풍든 것처럼 빨개져 버렸다. 그래, 지금 이 곳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구나. 다시 한번 숙연해지고... 전남대 수련원을 옆으로 하고 한참을 가다가 안내 표지가 있는 곳에서 "얼마쯤 가면 정상에 오르나요?" 하고 내려오는 이에게 묻자 "한시간 반이면 됩니다." 하여 우린 가벼운 마음으로 농담도 섞어 가며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우며 유명한 것에 비해 여름철 피서객들이 많이 붐비지 않고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아주 좋다는 것이 지나가던 등산객의 설명이었다. 높이 654여m의 입암산 기슭에 위치한 남창 계곡은 국립공원 내장산 남부(남창 지구)에 속한다. 산성, 은선동 그리고 반석동(새재 계곡)등 6개 계곡으로 이루어졌다 유명한 백양사와 약사암, 용천암, 영천굴 등의 암자, 장성호와 비자나무숲 등이 근처에 있고, 특히 계곡 상류에 위치 한 입암산성은 삼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국가사적 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3.1부터 5.15까지, 11.15부터 12.15까지 입산이 통제된다고 한다. 오랜만에 맛보는 해방감과 자신을 태워 가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오색 단풍에 탄성을 지르며 커다란 암반이 넓게 자리한 은선 계곡에 이르렀다. 삼삼오오 짝지은 등산객들이 내려오며 언제 갔다 내려올까? 걱정하는 소리도 뒷전에 두고 잠시 바위에 앉아 목을 축였다. 나이를 잊은 채 사춘기 소녀 마냥 재잘거리는데 재촉하시는 분이 계셔 마지못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 계획했던 노정을 바꿔 남창 골에 온 것이 차선이었지만 최선보다 더 큰 수확이었음을 확인하며 서로 자기의 공이라고 우기면서 가는데 이것 또한 어찌나 즐거운지. 전혀 얄밉지가 않았다. 사추기의 아줌마들이라 자꾸 뒤로 댕기는 것 같아 발걸음이 더뎌지고 선두에서 인솔하시는 분은 말씀은 못하고 답답해하시는 것 같아 죄송하기도 했지만 밤송이만 굴러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호호거리는 웃는 웃음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도 남는 듯 했다. 그만 내려 가야할 것 같은데? 고지가 바로 저긴데.. 산 속의 해는 빨리 진다는데.. 모두들 불안해하면서 정상인 갓바위에 도달하였다. 갓바위 아래로 보이는 너른 호남평야에 입암 저수지, 전남북을 가르는 입암 터널, 그 옆으로 유선형의 길다랗고 날쌘 기차가 유유히 달리고 있었다. 으악새가 흐드러지게 피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돋우는데 한편으론 한기가 느껴졌다. 갓바위를 내려오는데 싸래기 눈이 얼굴을 스쳐 갔다. 그제서야 모두들 너무 많이 올라 왔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아기 손같이 작은 애기단풍이 유난히 많아 내려오는 길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노래도 부르고 시도 읊으며 에덴 동산에 온 것처럼 행복해하며 입암 산성에 도착하였다. 더욱 더 아름다워진 애기단풍, 특히 입암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호남평야의 황금들판과 산성 안의 분지에 하얗게 핀 억새가 좋은 대조를 이루며 장관을 이루었다. 산이 순해서 겨울등산도 무난할 것 같다고 입을 모으며 또 오자고 눈에서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비스듬히 갓바위에서 내려오는 길은 마치 중국의 만리장성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그런데 그런 기분도 잠시, 다시 산성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잃어 헤매는 사이 해가 지는가 보다 생각하는데, 순간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계곡 갈림길까지 아직 한 시간 반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모두들 불안했겠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모두 손에 손을 잡고 내려왔다. 금새 칠흑 같은 밤이 오고 오른 쪽은 낭떠러지, 눈앞이 깜깜하여 뒷머리가 당겨지듯 쭈뼜거렸다. 후레쉬는 물론 성냥 한 개비도 없었다. 내려오는 중간 중간에 나무 팻말이 세워져 조난 시에 연락할 전화번호가 적혀 있고 현 위치가 적혀 있었다. 한편으론 안심도 되고. 금방금방 더욱 더 깜깜해지는 가운데 우리 모두의 입에선 낮은 탄성이 울려 퍼졌다. 눈앞에서 희미하지만 반짝이는 것이 있었으니... 보잘것없이 하찮게 여겼던 돌멩이들이 반짝이며 길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시구나! 하느님! 고맙습니다. 성모님! 고맙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은총이 가득 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누군가 "이런 때를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하나요? 묻자 일행 중 가장 어르신이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칠흑은 말 그대로이지. 지금은 하늘 길이 보이지 않나?" 하셨다. 양쪽 길에 줄지어 서있는 길다란 두 줄기 나무 위로 아주 희미하지만 하늘 길이 열려 있었다. 우린 발 밑은 보지 않고 하늘 위만 쳐다보며 걸었다. 아! 이런 상황에서 이보다 더 평안할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발 밑만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잡다한 일로 나를 소모해 왔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말씀으로만 받아 선반 위에 모셔 두고 정작 쓸데없이 지나간 일과 오지도 않은 일에 불안해 하며, 걱정을 사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하느님! 이제부터는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래요!'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도원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한줄기 불빛! 와! 살았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길다면 기-인 시간이었지만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하늘빛을 바라보며 무사히 내려온 것에 감사하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촉촉한 눈가의 이슬로 모두들 서로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가벼운 흥분과 설렘으로 출발했던 올 가을 단풍 여행에서 하느님은 미천한 나를 더욱 가까이 하느님께로 불러 주셔서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고 작고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해 주시며 이번 가을은 왠지 가슴 한편이 시리다며 투정하는 욕심 많고 철없는 나를 끝없이 넓고 푸른 가을 하늘로 부르시어 사랑 가득 안아주신다. 꼬오옥! - 2002. 10. 27 남창계곡을 다녀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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