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노트>
떠나간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난 3년 동안 쓴 시가 130여 편 되었다. 70여 편을 묶어서 세 명의 시인에게 보여주었다. 반응이 별로였다. 시큰둥했다.
“인수만의 관능, 표현과 관점의 재미, 해학과 능청이 약하네.”
시인 세 명의 평가는 거의 비슷했다. 인수는 살짝 언어를 뒤틀고, 능청스럽게 표현하고, 슬픔을 천진하게 웃음으로 빚어내고,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적 에너지와 뒤섞는 묘한 능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시가 진지하기만 하고 재미없다는 거였다. 한 마디로 어깨와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인수는 인수만의 감각과 표현 방법을 더 갈고 다듬어서 시를 써. 인수는 충분히 개성적인데 왜 그것을 살리지 못해?”
냉혹하고 냉정한 충고를 들었다. 진심 어린 충고였다. 나는 고민에 휩싸였다. 걷고 걸으면서 자괴감에 가까운 궁상을 떨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두 달 정도 고민을 한 후에 결단을 내렸다. ‘의인법이 없는 시는 버릴 것, 은유가 없는 시는 버릴 것, 진지한 시는 버릴 것, 중얼중얼 긴 시는 버릴 것, 동음이의어가 없는 시는 버릴 것, 재미없는 시는 버릴 것.’
사정없이 목을 쳤다. 130여 편 중에서 90여 편을 가차 없이 버렸다. 휴지통으로 날려버려서 영원히 삭제했다. 다른 폴더에 옮기지 않고 단칼에 처형을 했다. 며칠 끙끙 앓았다.
내가 쓴 시들이 이렇게 형편없었구나. ‘평범하게 잘 쓴 시는 좋은 시가 절대 아니야. 평범하게 잘 만든 시는 좋은 시가 결코 아니야. 그런 시는 다 버려!’
내 자신을 질타하며 냉정하게 지껄였다. 그렇게 해서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40여 편의 시 중에서 5편을 여기 <<사이펀>>에 싣는다. 비교적 길지 않은 시만을 골랐다.
내가 살려놓은 시 40여 편 중에서 부부와 관련된 시가 물경 9편이 있다. 「짱돌」, 「꽃다발」, 「몸의 안쪽」, 「몸의 미로」, 「단추는 왜 골탕을 먹이지?」, 「옷 동무」, 「해루질」, 「우유식빵」, 「가리비」, 「바보가 되기」. 이 중에 몇 편을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끝까지 살려두었다. 아내와 나 사이의 갈등 관계를 그린 시 9편은 처형당하지 않고 살려놓았다.
시를 무척 잘 쓰는 유명 시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종교시 쓰지 마. 가족시 쓰지 마. 종교시는 신의 눈치를 보게 되고, 가족 시는 아내나 남편의 눈치를 보게 돼. 검열을 당한 시는 형편이 없지.” 맞는 말일까?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관련된 시 5편을 발표한다. 형편없는 시일 가능성도 있다. 팔불출의 시일 가능성도 있다. 형편없는 시가 될 가능성을 무릎 쓰고 발표를 한다. 신작 소시집 리뷰를 해주실 평론가께서 엄정한 잣대로 내 시 5편을 까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일상을 살다 보면 매일 시가 써진다. 시가 나에게 살짝 다녀가는 순간이 매일 발생한다. 지하철 안에서, 모란시장에서, 탄천을 산책하다가 문득 불시에 시의 구절이 떠오른다. 시골에 가서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다니다 보면 멋진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영감과 직감이 떠오르며 시가 나에게 톡톡 말을 건네는 것이다. 메모지를 꺼내 즉시 메모를 한다. 메모지가 없으면 핸드폰을 꺼내어 저장을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몇십 분 지나서 까맣게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복기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쥐어짜도 이미 떠나간 문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시를 읽고 쓰는 일이 끼니와 간식이 되었다. 생활화되었다. 절필을 하려고 해도 절필이 되지 않는다. 너무 함부로 시를 쓰지 말자고 해도 어느 때는 막 시가 떠오른다. 내가 막을 수가 없다. 마구 떠오르면 마구 써야 한다. 일단 써놓고 본다. 며칠 지나면 버려야 할 평범한 문장으로 들통이 날지라도 지금 당장은 절박하고 간절하게 시를 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