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생활의 원리 : 교회 섬김과 헌금(연보)
사도행전 4장 32-37절 / 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행전 4장 32-37절은 신자의 삶, 또는 교회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원리적으로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해 나갈 일을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해 나갈 것이었지 사도 개인의 힘으로 해 나갈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자신들이 듣고 본 것인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했으며 성령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게 하심을 따라서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이적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일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3천명(행 2:41), 5천명이 되었다고 하는 것(행 4:4)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우리를 예수님의 몸과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때부터 새로운 사회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사회는 유대인이 갖는 사회의 모습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유대인이 갖는 사회의 특징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는 죄에 내려질 심판을 처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은 실상 하나님이 없는 온 세상의 이방인이 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중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자들에게 영생을 베푸실 것인데, 그 영생은 하나님의 자비로 베풀어질 것임을 알게 해 주시기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이름을 주시고 믿음으로 따르게 할 것을 율법의 계명은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메시야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정신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로 전혀 새로운 사회를 형성한 무리들이 등장하였으니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누구 하나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이 모든 것을 공유(公有)하며 함께 사용하는 특색을 띠었습니다. 사도들은 주 예수의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하였고 신자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왔으며 사도들은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모범적인 사람으로 요셉이 소개가 되고 있는데 그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권위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별명인 바나바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소유인 밭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한 것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속에서 주께 붙어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사회를 이상으로 품고 희망하여 이를 실천할 수 있기를 꿈꾸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인 바나바는 그러한 것을 실천할 수 있기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마침내 이를 해 나갔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만일 그렇게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 같이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그리고 바나바가 한 그대로를 모델로 갖고 와서 자신들이 그렇게 해서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를 음미하려고 하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가? 우리도 이런 교회 한번 해보자!라거나 내 일생의 목표는 예루살렘 교회 같은 교회를 해 보는 것이다!라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를 이상적으로 보게 되고 꿈꾸고 만들어보려고 하게 되며 이런 교회를 참으로 좋은 교회로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본문은 지금 이런 일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데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이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유대인 사회는 공유하고 통용하는 것이 그들의 민족의식 구조입니다.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그들이 땀 흘린 수고의 결실로서가 아니라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주심으로써 소유가 되어집니다. 그들의 광주리가 복을 받고 성읍이 복을 받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소유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렇게 해서 받은 기업을 나눕니다.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섬기고 절기에 쓰일 비용을 대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는 십일조를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매 7년에는 땅을 쉬며 매 50년에는 부득이 땅을 팔아야만 했던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그런데 이 규정에는 모두 가난한 이를 보살펴 돌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열 한 지파에게 각각 기업으로 주셨으나 그러나 그 땅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으로 그들에게 소유케 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땅을 언제까지 자기의 소유로 주장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나는 모든 수확물에서도 항상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일부를 남겨 놓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서 유대인들이 가진 공동체 의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업으로 주셨으나 자기 소유의 개념이 아닌 항상 공유와 통용의 개념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는 후에 바울을 통해서는 고린도후서 8-9장에서 헌금의 원리로 가르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어떻게 은총을 베푸셨는지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요케 하신 은혜를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으로 베푸는 것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 하고 이는 훗날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다시 그들이 그를 돕는 도움으로 돌아옴으로써 서로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어 평균케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일을 하는 헌금을 ‘봉사의 직무’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서 ‘많이 거둔 자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헌금의 원리를 가르치기 전에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먼저 이를 성령의 은사로 다루었습니다. “하찮게 여기는 지체를 특별히 소중히 여기고 남에게 보이기 흉한 지체를 더욱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것,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는 지체가 더 귀중하게 다루어지도록 몸을 만들어 주신 것은 지체들이 행복하게 되고 그 지체가 서로 돌보아 주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들이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신자는 모두 함께 모여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이들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모두가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지체들로서 서로를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각 사람들에게 은사[능력/재능]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임하시기 전의 유대인 사회는 이를 충실히 행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탐욕에 가득 찼으며 돈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오는 힘으로 공동체란 집단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에서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고 이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후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부요하여서 거만하고 가난하여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부요한 자도 남지 않고 가난한 자도 부족함이 없는 평균케 하시는 은혜가 공유와 통용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공유와 통용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는데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시라 부르는 자들에게서 그 누구도 소유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유의 권리는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참 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재물만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목숨도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재물을 관리하고 이를 사용하여서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들 생각에 좋은 대로 임의로 하거나 다른 사람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해 나갔습니다. 이를 믿는 자 안에 거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여기 바나바는 그에 대한 실증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밭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에게 내놓았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가 섬기는 주로부터 직접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는 주께로부터 받은 부요한 재물을 평균케 하시는 은혜를 따라서 그리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온 지체가 부족하지 않게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가난으로 인해서 훼방을 입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한 사람이 바나바 한 사람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에 의해서 운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이 바나바 한 사람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의 경우가 다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서 그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과 자세가 그러했습니다. 주께서는 각 신자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분량을 따라 평균케 하시는 은혜를 보여주는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다만 바나바가 주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봉사하여 나간 실증적인 사례로 등장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사회적인 조직의 구조에서 이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의 생명체라고 하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인데 여기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를 원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주께서 어떻게 간섭해 나가시는지, 즉 우리가 주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 나가는 것이 교회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이미 보고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개혁교회에서의 교회 섬김과 연보(헌금)이 어떻게 행해져 왔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
**2023년 3월 5-12일. 주일 오전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