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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예논쟁의 결과 문聞사思수修 교학전통의 티벳불교 뿌리내려
삼예사의 논쟁은 이미 수많은 서적과 논문, 지면과 방송에서 다루어 온 불교논쟁의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연구논문과 발표자료들은 선불교의 입장인 중국 선사들의 입장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많다. 이에 달라이라마가 설립한 티벳 전통강원에서 13년간 공부하고, 동국대학교 티벳대장경역경원에서 근무하였으며, 동국대 불교학부 외래교수와 사단법인 나란다불교학술원장을 맡고 있는 박은정 교수는, 티벳인들의 입장에서 삼예논쟁을 조명한 발표문을 보내왔다. 단, 이 원고는 삼예사 논쟁의 주요 쟁점보다는 삼예사 논쟁의 전후사정과 티벳의 사회종교적 상황에서 이 논쟁이 갖는 불교사적 의의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고 밝혔다. / 편집자
박은정 _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외래교수, 전 달라이라마 공식통역사, 사단법인 나란다불교학술원 원장
삼예논쟁의 역사적 배경
삼예논쟁이란 티벳 삼예사라는 사찰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논쟁입니다. 삼예사는 티벳 최초의 사찰이고, 티벳불교는 대승불교국가이며, 북방불교의 한 주류입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티벳에 불교가 수용되었던 시기는 다소 늦은 7세기 송첸깜뽀왕(?~649)시대입니다. 당시 그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중국의 문성공주와 네팔의 공주가 시집을 왔습니다. 그때 당나라 문성공주가 시집을 올 때 석가모니 부처님 불상을 갖고 왔고, 이것이 티벳에 전래된 최초의 불상이 되었습니다.
티벳사람들은 석가모니 불상을 ‘조오’라고 부르고 조캉사원에 모셨습니다. 그렇지만 송첸깜뽀시대에는 불교가 정착되고 뿌리내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제8대 티송데첸왕(재위: 742∼797) 시대에 이르러서야 불교가 정착하게 됩니다. 이때 불교가 전적으로 수용되어 정착되고 국가의 종교로 공인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삼예논쟁입니다.
본고는 논쟁의 쟁점보다는 논쟁의 과정에 초점을 두고, 티벳인들의 입장에서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삼예사의 논쟁은 인도스님과 중국스님들과의 논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쟁을 소개하는 저서나 논문들이 중국 선사들의 입장을 편들고 있어, 나는 티벳인의 입장에서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티벳대사전에는 ‘삼예논쟁’에 대해 “8세기에 티베트에 도래한 스님(하샹, 和尙)들이 선사상을 널리 알리면서 인도 아사리의 따와(견해), 쬐바(행)와 상반되는 내용을 설함으로써 인도불교와 충돌, 대립하여 이에 왕(티송데첸)이 주도하고 증명하는 논쟁, 즉 어전논쟁(御前論爭)이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삼예논쟁의 핵심 인물인 산트락시타
당시 티벳에는 중국 스님들이 많이 와서 선사상을 널리 알리고 있었는데, 인도스님들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즉, 인도스님들이 주장하는 ‘행’에 대해 중국 화상들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에 많은 혼란이 발생했기에, 이를 어전논쟁을 통해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티송데첸시대에는 이 삼예논쟁에 앞서, 뵌교와의 치열한 논쟁이 먼저 있었습니다.
티벳의 역사적 자료인 ‘바셰’라는 기록물을 근거로 이에 대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셰’는 ‘바쎌낭’과 ‘바쌍씨’ 등이 편찬한 것으로, 8세기 티벳의 왕 티송데첸 시대의 상세한 역사기록물입니다. 주요 내용으로는 삼예사 완공 이후 불교 보급에 초점을 두고 당나라와 티벳의 관계, 티벳과 인도의 불교교류문제, 또 왕의 칙령과 번역원 설립, 정치체제와 경제·문화 발전 전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역사기록물을 통해 삼예논쟁에 대한 역사적 사실여부와 티벳의 입장에서 정리된 평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정치종교적 상황을 보면, 티송데첸은 8살에 부왕인 ‘메 악촘’이 사망하고 등극했습니다. 때문에 나이가 어린 탓으로 섭정체제가 들어섰는데, 그 섭정이 ‘샹마샹 돔바 까’라는 뵌교세력이었고, 불교를 탄압하게 됩니다. 뵌교도들은 문성공주가 가져온 최초의 불상인 ‘조오 불상’을 끌어내리게 되는데, 처음에는 뵌교신하들이 이 불상을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땅에 묻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티송데첸이 성장하면서 불교를 신뢰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게 되면서 왕은 뵌교도 신하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티송데첸이 샴 지역의 왕을 죽이는데 그곳은 뵌교의 근거지였습니다. 이에 뵌교도들은 왕과 불교에 원한을 갖게 되었고, 뵌교 주술사들의 저주로 티송데첸이 병환이 들면서 뵌교가 다시 부흥하게 됩니다. 뵌교가 득세하면서 왕의 병이 낫게 되자 뵌교는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게 됩니다.
티송데첸왕, 뵌교와의 전쟁을 선언
그렇지만 티송데첸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싶어했으며, 결국 ‘바쎌낭’과 상의해 인도의 고승을 모셔와서 불교의 뿌리를 내리자고 주문합니다. 이때 바쎌낭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산트락시타(적호)’입니다. 그렇게 산트락시타를 초청하자 뵌교측에서 강력히 반발합니다. 뵌교도들이 저주하여 밤이 되면 우르릉거리면서 건립중인 삼예사가 붕괴되기도 했습니다. 뵌교사제들은 이를 두고 신들이 노했다고 주장하였고, 또 마침 티벳 전역에 기근과 역병이 창궐하면서 민심마저 흉흉해 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불교수용은 난관에 봉착합니다. 결국 산트락시따는 4개월만에 티벳 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티송데첸은 굴하지 않고, 티벳의 귀신과 토속신들이 거칠다고 판단해 신통력이 뛰어난 승려인 파드마삼바바를 모시기로 합니다.
이렇게 티송데첸이 적극적으로 불교 수용의지를 펼치자, 뵌교신하들은 '뵌교를 무시하고 불교를 들여오려는 왕들이 단명했다'고 겁을 주기도 하지만, 티송데첸은 산트락시타마저 다시 초청하게 됩니다. 티송데첸이 산트락시타를 신뢰한 것은, 처음 산트락시타를 만나서 “당신의 견해와 실천(행)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산트락시타의 정연한 교학과 실천행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훌륭한 법을 들여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티벳에 인도불교를 정착시킨 티송데첸왕
한편, 파드마삼바바의 등장에는 하나의 사건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티벳왕국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국가 제사 의식을 행할때, 살아있는 공물을 바치는 것에서 발단이 됩니다. 당시 삼예사에는 오명학에 능통한 인도에서 온 108명의 빤디따(불교학자)들이 역경을 위해 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뵌교의 제사를 보면서, 살아있는 동물을 잔인하게 죽여 공양하는 것을 보고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도 빤디따들은, 이러한 뵌교와 불교는 함께 공존할 수 없다고 보고, 살생방식을 내버려 두면 자신들은 떠나겠다고 왕에게 반발을 하게 됩니다. 이에 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뵌교와 불교 중에 어느 것이 정법인지 어전논쟁을 개최해 결정을 하게 됩니다.
뵌교 주술사는 신통력을 통해, 나라의 안녕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불교는 선업을 쌓는 실천(행)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도력이 높은 파드마삼바바를 초빙하여 신통력을 경합하게 됩니다. 결국 신통력에서도 파드마삼바바가 승리하자 왕이 정법을 불교로 인정하고 뵌교를 금지시키게 됩니다. 결국 뵌교도들은 추방을 안당하려면 개종을 해야 되었고, 뵌교 성직자 500명이 개종하게 되며, 불교가 국가적 종교로 공인받게 됩니다.
그 이후 비로소 티벳에는 불교가 정착기를 맞게 되며, 삼예사의 완공과 동시에 이를 경영할 승단의 설립과 교법과 증법을 계승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티벳인 최초로 승려(쌔미뒨)가 배출되고 왕의 지원으로 교단이 형성됩니다.
그전에는 티벳인 유학생은 있지만, 승려가 없었는데, 이때 비로소 최로로 7명의 승려가 탄생하고, 울라(국사)에게 정치와 종교를 상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드마삼바바와는 정치를, 산트락시타와는 종교문제를 주로 상의합니다. 또 티벳인들은 이전에 쓰던 샤머니즘에 입각한 이름들이 불교식으로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전쟁후 협정을 맺는 방식도 변화가 생기는데, 예전에는 동물을 죽여 피로 맹세하던 것을, 부처님을 걸고 서약하고 맹세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스님들이 티벳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티벳과 중국의 국제적 관계는 한때는 티벳세력이 중국의 수도까지 쳐들어가기도 하였고, 조공을 받는 등 적대적관계와 때로는 평화적인 관계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중국의 점성학과 의학이 도입되었고, 학자들을 초청했으며, 천축으로 가는 구법승들이 티벳을 경유하기도 하면서, 중국선사들도 상당한 숫자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 선불교와의 종교적 교류는 미미했는데, 근본적으로 티송데첸의 생각은, 불교의 근원지가 인도이기 때문에 인도에서 법을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문입니다. 아무튼 당시에 중국선사들이 티벳에 들어와 미요쌈댄링(부동선원) 중심으로 수행하였고, 뛰어난 마하연 선사가 부사의관(不思意觀)의 가르침으로 점차 선사상이 유행하게 됩니다.
인도 나란다의 문사수 교학과 중국식 선불교 부사의관의 충돌
그런데 당시 중국 하샹의 견해는 선업을 쌓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사의관의 돈오적 해탈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업과 불선업으로 선취와 악도를 윤회하기 때문에 이를 해탈하기 위해서는 불사의관과 무상무념을 주장했습니다. 또 대승의 십바라밀은 둔근기같은 인연 없는 중생을 위한 것이므로, 선업도 필요없고 차제에 의한 수행은 하열한 근기들을 위한 것이라고 폄훼하게 됩니다.
당나라 문성공주가 가져온 티벳최초의 불상 조오(석가모니불상)가 안치된 조캉사원
이들은 흰구름이 선업이고, 먹구름이 악업이라면 태양은 선업도 악업도 모두 가리는 것이라며, '마음의 성품을 보면 성불에 이른다'는 주장에 티벳인들이 열광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불사의관을 통해 무분별지로 단박에(돈오) 십지에 도달한다는, '깔뽀 칙둡(만병통치약)'을 명약이라고 느끼면서, 중국 하샹의 견해가 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티송데첸은 뵌교와의 대립으로 이들 중국 하샹들의 활동에 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가 도래하는데, 바로 산트락시타의 입적입니다. 산트락시타가 사라지자 중국 선사들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결국 티벳인들이 중국 하샹들의 영향으로 '선업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삼예사원에 보시도 하지 않고, 절에 참배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분노한 티송데첸은 인도스님들을 따르라고 하면서, 교학과 선업을 부정하는 선불교를 금지시키게 됩니다. 그러자 선사들이 과격하게 저항하게 되는데, 자신의 팔을 자르거나 자살까지 하는 등 거센 도전을 하게 됩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왕은 바쎌낭을 불러 논의한 끝에 어전논쟁을 통해 정리하자는 입장을 갖게 됩니다.
한편 산트락시타는 바쎌낭에게 남긴 유언에서 “티벳에는 외도가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정법을 위해서 까말라쉴라를 초청하라”고 했다는 내용을 왕에게 전했고, 왕은 인도의 대논사인 까말라쉴라를 초빙하여, 어느 것이 정견이고 어느 것이 사견인지 가리자는 삼예사의 논쟁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에 부동선원의 중국 선사 300여 명이 산문을 닫아 걸고 4개월간 반야경을 읽으며 준비에 들어갑니다.
세기의 논쟁이 벌어졌던 티벳 최초의 불교사원인 삼예사. 구사론에서 말하는 수미산과 사대주에 근거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구현했다.
이렇게 삼예사논쟁은 인도 아사리와 중국 하샹의 논쟁으로 불교 내의 견해 충돌이 그 특징입니다. 부처님 재세시부터 그후 인도에서의 불교논쟁은 외도들과의 논쟁이지만, 삼예논쟁은 불교 내의 챌린지라고 보아야 합니다. 초창기 불교를 거쳐 나란다대학까지의 논쟁은 대부분 교조를 걸고 논쟁을 합니다. 그래서 논쟁에서 이기면 자기 종교를 버리고 개종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예논쟁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패자가 승자에게 꽃다발을 주는 존중의 의미가 전제되었습니다.
티벳불교 - 인도 나란다의 차제도 교학을 선택하다
이 논쟁의 성격은 성불도(成佛道)를 둘러싸고 돈문(頓門)이냐 점문(漸門)이냐의 문제가 있었고, 왕이 증명하는 어전논쟁입니다. 당시 우측에는 하샹이 자리를 잡았고, 좌측에는 까말라쉴라가 좌정해 정견과 사견을 가름하고, 티벳불교의 향방을 결정하는 논쟁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선사들의 주장은 “십선법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방편’을 부정합니다. 불사불관과 부사의관의 관점에서 '배움과 사유도 분별이다'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즉 선업을 흰구름, 악업을 먹구름에 비유하고, 태양이 비추면 두 구름 모두 그늘이 생기는 것으로 선업도 무가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보시를 비롯한 10바라밀을 행할 필요가 없고,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견성성불을 위해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분별을 버리고, 무상무념을 강조하며, 내용과 사유를 분별로 보고 배우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였고, 선업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논쟁에서 까말라쉴라의 입장이 승리합니다. 그리고 왕은 중국 선불교를 거부하고 인도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논쟁의 결과에 대해서 ‘바셰’는 이렇게 티송데첸왕의 칙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께서“돈문이라는 하샹의 법은 십법을 허물이라고 여겨 행하지 않는다. 마음이 어둡고 나와 남의 배움의 문을 막고, 하던 배움을 멈추게 한다면 그것으로 마음이 어두워지고 법을 쇠락하게 하므로 그만 두라. 그와 같은 것을 그대들은 닦지 말라. 이제 우리 티벳의 군신과 백성들은 누구라도 법을 행하는 자라면 이와 같이 할지어다. 티벳은 격지에 있는 나라이며 어리석고 범인만 많을 뿐이다. 그리하여 법은 깨닫기 어렵다. 왕이 초청하여 지원하는 인도의 현자로 알려진 스님과 정통한 역경사가 인정하는 법을 행해야 한다. 왕이 지원하지 않고 정통한 역경사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행하지 말라. 만병통치약(깔보칙둡)이라는 도풍을 버리고 룽릭(논거와 전거)에 어긋남이 없는 인도의 도풍을 따르라. 이제 중국의 도, 깔보칙둡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벌을 내려라.”라고 티벳 전역에 금지령을 내리고 중국 선의 교전들을 모아서 삼예사에 묻었다.
삼예사 주불전으로 수미산의 중심에 해당한다.
논쟁의 마지막에 마하연 선사에게 왕이 대답을 종용하자 마하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일어서서 꽃다발을 까밀라쉴라에게 건네주게 됩니다. 왕은 삼예논쟁 이후에 마하연 선사를 위해 삼예사에 법당을 보시하였고, 선사들이 계속해서 머물며 수행하게 했습니다. 그들중 상당수는 인도불교를 알기 위해 유학의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금지령을 수용하지 못하는 돈문파 제자들은 스스로 떠나기도 하였고, 그들중 일부가 역경원에 자객을 보내 까밀라쉴라를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까말라쉴라가 살해당하자 충격을 받은 바쏄낭은 자살해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삼예논쟁은 굉장히 큰 사건이라 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바로 인도불교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삼예논쟁은 이렇게 후유증이 많이 남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논쟁으로 인해 그후 1300년 동안 티벳은 인도불교를 유지할 수 있었고, 성불도에 있어 지혜와 방편의 구족에 의한 성불도, 문사수를 통한 수행, 수행 차제와 교학을 중시하는 특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12세기 아띠샤의 ‘보리도등론’과, 14세기 쫑카빠대사의 ‘보리도차제론’으로 계승되어 티벳교학의 체계가 되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티벳불교는 교학을 중시하고 차제를 중시하는 불교입니다. 현대 종교 중에서 서구사회에서 티벳불교가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바로 삼예논쟁에서 살아남은 때문입니다. 삼예논쟁이 없었다면 지금의 티벳불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