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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을 대신한 아름다운 죽음
적벽대전에서 싸운 장수들을 위로한 손권은 다시 합비성을 노린다.
장요의 도전장이 날아들자 손권은 성급히 싸움에 나서고 위험을 도와 싸우던 송겸은 죽음을 맞는다.
한편 주유는 감 부인이 죽자 유비의 혼인을 주선하고 동오로 간 유비는 먼저 교국로를 찾는다.
그 무렵,
동오의 주유는 시상으로 돌아가 금창(활이나 창등 쇠독으로 다친 상처)을 치료하는 한편,
감녕에게는 파릉을 돌보게 하고 능통에게는 한양을 지키게 했다.
두 곳 사이는 전선을 벌여 만약의 일에 대비케 한 뒤 정보에게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어 합비현(안휘성)에 머물게 했다.
그때 손권은 적벽 싸움 이후 합비의 조조군을 상대로 10여 차례나 싸웠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치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성 밖 50여 리쯤 떨어진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정보가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손권은 구원군이 온다는 말에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맞기 위해 몸소 영채를 나섰는데
정보보다 한발 앞서 노숙이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손권은 그 말을 듣고 말에서 내려 노숙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당도한 노숙은 손권이 몸소 나와 기다리고 있는 걸 보자 급히 말에서 내려 손권에게 절을 올렸다.
여러 장수들은 손권이 이처럼 노숙을 극진히 대하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의아스럽게 여겼다.
손권은 노숙을 말 위에 오르게 한 후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면서 조용히 물었다.
"내가 말에서 내려 공을 맞았으니 이로써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보답이 되겠소?"
그러자 노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럼 어느 정도로 대접하면 만족하겠소?"
노숙의 말에 의외라는 듯 손권이 노숙을 보며 물었다.
"주공께서는 위엄과 덕을 사해에 떨치시고 9주를 모두 다스리시며 마침내 제업을 이루신 다음,
이 노숙의 이름을 죽백(역사를 기록한 책)에 올려 주십시오.
그것이 저를 대접하는 것이며 비로소 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노숙의 말에 흡족하여 손권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껄껄 웃었다.
손권은 노숙과 함께 진영에 이르자 크게 잔치를 열어 적벽대전에서 싸운 장수들을 위로하고 합비를 칠 계책을 의논했다.
"장요가 싸우자는 글을 보내 왔습니다."
그 때 문을 지키는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결전을 치러 보자는 장요의 오만스러운 글을 읽고 난 손권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소리쳤다.
"장요란 놈이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정보가 구원병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오기 전에 나를 화나게 해 싸움을 하자는 것이다.
오냐, 그렇다면 정보를 기다릴 것도 없이 내일은 내가 직접 가서 한바탕 싸울 테니 어디 두고 보아라!"
손권은 그날 밤 영을 내려 싸울 채비를 하고 오경 무렵이 되자 삼군을 이끌고 합비로 향했다.
진시(상오7시-9시)경이 되자 합비에 이르기도 전에 손권은 조조 군사와 마주쳤다.
양군이 진세를 벌이자 손권은 금빛 투구에 금빛 갑옷 차림으로 말을 타고 나섰다.
왼쪽에 송겸과 오른쪽에 가화가 각각 방천화극을 치켜들고 호위했다.
이윽고 조조군 진영에서 북이 세 차례 울려 퍼지고 문기가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세 사람의 장수가 무장을 갖추고 나타났다.
가운데가 장요였고 그 좌우로 이전과 악진이 호위하고 있었다.
장요가 손권을 보자 말을 달려나오며 꾸짖었다.
"손권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느냐!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젖비린내를 풍기며 왔느냐?"
장요가 손권과 승부를 가리기 위해 그를 격동시켰다.
손권이 창을 겨누고 달려나가려 하는데, 진문 안에서 한 장수가 질풍처럼 말을 몰아 내달았다.
그는 바로 태사자였는데 손권보다 먼저 달려오자 장요가 그를 맞았다.
태사자는 손견 이래 3대를 섬겨 온 장수이며 그의 용맹은 이미 천하에 떨치고 있는 터였다.
이제 늙은 장수라 하나 그 무용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장요와 태사자가 창과 칼을 부딪치니 기합 소리가 들판을 뒤흔들었다.
말과 말이 숨가쁜 호흡을 하며 엇갈리는 동안 80여 합이나 부딪쳤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때 두사람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던 북군의 이전이 악진에게 말했다.
"저 맞은편에 금빛 투구를 쓰고 있는 자가 손권임에 틀림없네.
만약 손권을 사로잡으면 83만 인마의 원수를 갚는 것이니 저놈을 사로잡도록하세."
악진이 미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가는데 그 빠르기가 마치 나는 화살과도 같았다.
곧장 손권 앞으로 짓쳐들어간 악진의 칼이 흰 무지개를 그리며 손권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려는 순간
송겸과 가화가 급히 화극을 들어 그 칼을 막았다.
힘껏 내리친 칼을 화극으로 막으니 화극이 쨍 하며 두 동강나고 말았다.
다급해진 송겸과 가화는 들고 있던 화극 자루로 악진이 탄 말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놀란 말이 울부짖으며 달아나자 악진이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리는데
송겸이 졸개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악진의 뒤를 바짝 쫓았다.
이 모양을 보고 있던 이전이 활에 시위를 메겨 송겸을 향해 쏘았다.
바람을 뚫는 시윗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이 송겸의 명치 끝에 척 꽂히자
송겸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몸을 뒤집으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이때까지 장요와 어울려 싸우고 있던 태사자가 등 뒤에서 들려 오는 비명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바로 송겸이었다.
송겸이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자 태사자는 싸움이 이롭지 못함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달렸다.
장요가 태사자의 뒤를 쫓자 휘하 군사들도 앞다투어 달려가 동오군을 덮쳤다.
가세가 오른 장요군을 맞자 동오군은 순식간에 어지러워지더니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장요는 기회를 놓칠세라 금빛 투구를 쓰고 있는 손권을 향해 말을 몰았다.
장요가 손권을 뒤쫓아 팔을 뻗어 손권을 낚아채려 할 때였다.
홀연 옆쪽에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손권을 구원하러 온 정보가 군사를 거느리고 때마침 나타난 것이었다.
달려온 정보가 손권 대신 장요를 맞아 싸웠다.
정보와 장요가 한바탕 어우러져 싸우고 있는 동안 손권은 멀리 말을 몰았다.
장요는 정보가 구원군을 이끌어 와 길을 끊자 더 이상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갔다.
정보도 순권을 호위하여 대채로 돌아가자 쫓기던 동오의 군사들도 연이어 영채로 돌아왔다.
손권은 대채로 돌아와 송겸의 죽음을 슬퍼하며 목을 놓아 울었다.
곁에 있던 장사(조정관)장굉이 손권을 달랬다.
"주공께서는 혈기에 넘쳐 기운만을 믿고 적을 너무 가볍게 보시니 저희들이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사 적장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아 싸움터에서 무공을 세우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낱 장수들이 할 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주공께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맹분(전국시대의 장수)이나 하육(주나라의 용사)의 용맹을 누르시고 패왕의 큰 뜻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송겸이 화살에 맞고 죽은 것도 모두 주공께서 적을 너무 가볍게 여겨서 일어난 일입니다.
앞으로는 보다 높은 곳에서 멀리 내다보며 싸움터에 직접 나서는 것을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장굉의 말에 손권도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모두가 나의 잘못이오.
앞으로는 장 공의 말을 깊이 새기겠소이다."
그때 태사자가 들어와 급히 고했다.
"제 부하 중에 과정 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이 자가 장요의 말을 돌보는 마부와 형제간입니다.
그가 장요에게 꾸중을 들은 일로 원한을 품고 있다 합니다.
과정은 오늘 밤 그 마부와 짜고 성에 불을 지른후 성안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틈타 장요를 찔러 죽여 한을 풀고,
송겸의 원수를 갚아 주겠노라고 알려 왔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주시면 가서 그와 호응할까 합니다."
"과정은 어디 있소?"
손권은 태사자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물었다.
"벌써 조조군 사이에 섞여 합비성 안으로 잠입했습니다.
제게 군사 5천을 주시면 합비성을 빼앗아 보겠습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제갈근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장요는 계략이 많은 자이오.
경솔히 나아가서는 아니 되오."
그러나 제갈근의 만류에도 태사자는 기어코 가겠다고 우겼다.
손권은 송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기고 있던 터라 장요의 목을 베어 송겸의 죽은 혼이나마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뿐만 아니라 전날의 패전을 설욕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권은 태사자가 끝내 가겠다고 고집하자 군사 5천을 주어 합비로 가게 했다.
한편 과정은 태사자와도 같은 고향 사람이었는데 이날 장요의 군중에 섞여 있다가 합비성으로 들어가 마부를 만났다.
"나는 벌써 태사자 장군께 말씀을 다 여쭙고 왔네.
장군은 오늘 밤에 반드시 접응하러 오실 걸세.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과정이 묻자 마부 후조가 제법 그럴 듯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군영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밤을 이용하여 단숨에 들이치는 일은 어렵네.
우선 내가 마구간 짚더미에 불을 지를 테니 자네는 밖으로 뛰어나가 군사들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소리치게.
그러면 성 안이 발칵 뒤집힐 것이 아닌가.
그 틈을 이용해 장요를 해치우면 나머지 군사들은 제풀에 뿔뿔이 흩어질 걸세."
"그것 참으로 묘한 계책일세!"
과정은 그렇게 감탄하며 의논을 정했다.
장요는 그날 밤 싸움에 이기고 돌아와 삼군에게 상을 내려 그 공을 치하하는 한편 엄히 군령을 내렸다.
"싸움에 이겼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 된다.
오늘은 잠자리에 들더라도 갑옷을 벗지 말라."
장수들은 장요의 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늘 우리가 적을 크게 깨뜨려 멀리 도망을 갔는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갑옷을 벗고 편히 쉬지 않으십니까?"
장요가 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깨우쳐 주었다.
"장수란 이겨도 기뻐하지 말아야 하며, 또 패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네.
만약 오군이 오늘 우리가 이겨 군심이 흩어져 있으리라고 여겨 그 허를 찔러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그들을 막아 낼 수 있겠나?
그러니 오늘 밤은 특히 여느 날보다 방비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장요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모반이다. 모반이 일어났다!"
"불이야, 불!" 장요의 뒤쪽 영채에서 불길이 일어나면서 허둥대는 외침이 들려 왔다.
이어 군사 하나가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와 급히 알렸다.
"모반을 일으킨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성에 불을 질렀습니다."
장요는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침착하게 막사를 나서 장수 10여 명을 거느리고 성 안의 움직임을 살폈다.
"함성이 요란하니 일이 가볍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 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장요는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성 안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모반을 꾸미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는 분명 몇몇 군사가 모반을 꾸며 우리 군사들을 놀라게 하려고 떠들어대는 것일 게다.
거기에 휩쓸려 성 안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으면 먼저 그 자부터 목을 벨 것이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이 과정과 마부인 후조를 끌고 왔다.
장요가 그들을 문초하자 쉽게 그들의 짓임이 드러나 장요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때 갑자기 성문 밖에서 징 소리와 북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뒤이어 함성이 요란하게 일었다.
"이는 분명 동오의 군사들이 성 밖에서 호응하러 온 것이리라.
그들의 계책을 거꾸로 이용해 무찔러야겠다."
장요는 군사들에게 급히 영을 내렸다.
"군사들은 불길이 번지지 않은 곳을 골라 성 안에 불을 놓아라.
그리고 '모반이다'하고 소리를 지르도록 하라.
그럴 동안 다른 군사들은 서서히 적교를 내리도록 하라!"
한편 성 밖에서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태사자는 장요가 유인책을 펴고 있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성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불길이 일고 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어 적교가 내려지자 과정의 계책이 성공한 것으로 여겨 앞장 서서 성 안으로 짓쳐들어갔다.
태사자가 성 안으로 냉큼 달려 들어가자 성 위에서 호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아차, 속았구나!" 태사자가 급히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이미 화살 두 대가 날아와 그의 몸에 콱 박히고 말았다.
태사자가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급히 말을 달리려는데 등 뒤에서 이전·악진이 함성을 지르며 군사를 이끌어 오고 있었다.
동오군은 크게 혼란이 일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이전과 악진이 이끄는 군사들에 의해 태반이 죽거나 상한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장요의 군사들은 승세를 타고 손권의 본진에까지 육박해 들어갔으나 육손과 동습이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나왔다.
이전과 악진은 더 이상 그들과 싸우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고
육손과 동습은 가까스로 태사자를 구출해 본진으로 돌아갔다.
손권은 지난번 싸움에서 송겸을 잃고 이제 태사자까지 크게 상한 채 돌아오자 더욱 마음이 언짢았다.
이때 장소가 손권에게 권했다.
"잠시 싸움을 멈추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이은 패배로 인해 군사들의 사기가 꺾여 있는데다 태사자까지 심한 상처를 입고 있어 손권도 장소의 말을 좇았다.
손권은 군사들을 거두어 배에 오른 후 남서의 윤주로 돌아가 그곳에 군마를 주둔시켰다.
태사자의 병세가 점점 위중해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손권은 장소를 시켜 병세를 알아보게 했다.
장소가 여러 관원들과 함께 병상을 찾자 태사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홀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장부가 난세에 태어났으니 석자 칼로 천하를 덮어 뒷날에까지 길이 떨칠 공을 세워야 마땅하리라.
그런데 내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허무헤가 죽게 되었으니 내 어찌 눈을 감는단 말인가!"
태사자는 가슴에 맺힌 한을 크게 외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아직 마흔하나였다.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남서의 북고산 기슭에 후히 장사지내 주었다.
또한 그의 아들 태사형을 자신의 부중에 데려다 기르게 했다.
한편 이때 유비는 형주에서 군마를 조련하고 있다가
손권이 장요와의 싸움에서 패해 남서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공명을 청해 들여 물었다.
"듣자하니 손권이 합비에서 패해 남서로 갔다고 합니다.
앞으로 형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비가 공명에게 묻자 공명이 놀라운 말을 했다.
"지난 밤에 천문을 보니 서북 하늘에서 별 하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필시 한의 황족 중에 누군가가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유비가 깜짝 놀라며 공명에게 궁금한 일을 묻고 있는데 한 사람이 들어와 고했다.
"공자 유기께서 어젯밤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갑작스런 비보를 접한 유비는 크게 슬퍼하며 통곡했다.
생전에 그토록 자기를 따랐던 정분도 그렇거니와 같이 한의 한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 때문이었다.
공명이 그런 유비를 위로하며 뒷일을 깨우쳤다.
"사람이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황숙께선 그 일로 몸을 상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유기가 없는 그곳으로 급히 사람을 보내 양양을 굳게 지키도록 하고 또 장례를 치르도록 하십시오."
슬픈 감정에 북받쳐 있던 유비도 공명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형주·양양을 넘보고 있을 동오와 조조를 떠올리며 공명에게 물었다.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마땅히 운장을 보내야만 합니다."
유비는 관우를 불러 급히 양양으로 가서 지키게 했다.
유비가 지난날 노숙과의 약속을 생각하고 다시 공명에게 물었다.
"유기가 죽었으니 동오에서는 반드시 형주를 돌려 달라고 할 터인즉,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땐 제가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유비의 걱정스러움에 비해 공명은 태평스런 얼굴로 위로할 뿐이었다.
유비도 공명의 말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는 데엔 능히 그에 대비한 계책이 따로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자 동오에서 노숙이 온다는 전갈이 왔다.
유기의 죽음을 조상하기 위함이라고 했으나
이전에 동오에게 했던 약조를 지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오는 것임이 분명했다.
공명이 유비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노숙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노숙이 말했다.
"영질(유기)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듣고 우리 주공께서 변변치 않은 예물을 갖추어 저에게 조상하라 하시었습니다.
또한 주 도독께서도 유 황숙과 제갈 선생께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유비와 공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마움을 표하고 술상을 마련하여 노숙을 대접했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자 노숙이 슬며시 입을 열어 지난번 약조했던 일을 꺼냈다.
"전에 황숙께서 공자 유기가 계시지 않을 때에는 형주를 동오에 반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유기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그 약조를 이행하실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황숙께선 언제쯤 돌려 주시려는지 그걸 묻고자 합니다."
노숙이 찾아온 본심을 드러내자 유비는 공명의 말을 생각하고 얼버무렸다.
"우선 공은 잔부터 드시오.
잔을 들면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유비가 노숙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술잔을 권했다.
노숙도 마지못해 몇 잔의 술을 비우더니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황숙께서는 형주를 언제 돌려 주시겠습니까?"
노숙의 말에 유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공명이 정색을 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자경은 오의 군신들 중에 그래도 분별 있는 분인 줄 알았는데, 지금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너무 사리에 어둡구려.
기어코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이치를 깨우쳐 드려야 하겠소?"
공명의 엄한 어조에 노숙도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다물고 있는데 공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고황제께서 흰 뱀을 베시고 의로써 군사를 일으켜 기업을 세우신 이래 오늘에 이르렀소.
그런데 불행히도 간웅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제각기 한 지방씩을 차지하고 있소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천도가 바로잡혀 다시 제자리를 찾아 정통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외다.
황숙께서는 중산정왕의 후예료, 효경황제의 현손이 됫며 현 황제의 숙부뻘이 되는 분이시니
봉토(제후를 봉하여 준 땅) 얼마쯤을 가지신다 하여 아니 될 이치가 어디 있소?
거기다가 형주의 옛 주인 유경승은 우리 주공의 형님이시니
아우로서 형님의 기업을 이어받은 것이 어찌 도리에 어긋난다 할 수 있겠소?
그런데 공의 주인은 본디 전당 땅의 하찮은 관리의 자손으로서
일찍이 조정에 아무런 공을 세운 바도 없이 그 세력을 뻗쳐서 6군 81주를 취하고 있소.
그러고도 오히려 그것이 부족해서 한의 땅을 전부 차지하려 하시는 겁니까?
아직도 한나라는 고조 유방에 의해 세워진 유씨 천하이건만 우리 주공께선 의지할 땅 한 조각 없소이다.
그런데 공의 주인은 손씨이면서도 오히려 나라의 땅을 더 욕심내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에 맞는 일이라 할 수 있겠소?
또한 적벽 싸움을 놓고 말하더라도 우리 주공의 수고로움이 적지 않았고,
여러 장수들이 모두 힘을 다해 싸웠기에 이겼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것을 어찌 동오 혼자만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소?
뿐입니까?
만약 내가 동남풍을 빌어 주지 않았다면 주랑, 그 사람이 무슨 재주로 반 푼어치의 공이라도 세울 수 있었겠소?
만약 강남이 일단 조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더라면 이교(손책과 주유의 아내)가 동작대로 끌려갔을 것이며
노공의 가솔들도 무슨 수로 살아남기를 바라겠소?
방금 주공께서 즉시 대답하기를 피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경은 이름 있는 어진 선비시라 일러 주지 않아도 능히 알아 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공은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공명이 사리에 어긋남이 없는, 빈틈없는 논리에다 물 흐르듯 거침없는 말로 노숙을 몰아붙였다.
노숙은 그만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원망하듯 말했다.
"공명 군사의 말씀이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렇게 되면 저의 처지가 심히 어려워지게 됩니다."
"무엇이 어려워진다는 말씀이오?"
공명이 짐짓 엄한 얼굴로 묻자 노숙이 무거운 어조로 다시 말했다.
"지난날 황숙께서 당양에서 고초를 당하였을 때 공을 청해서 함께 강을 건너 우리 주공을 만나게 해 드린 게 저였습니다.
그 뒤에 주유가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취하겠다 했을 때 그 일을 말렸을 뿐만 아니라
공자 유기가 세상을 떠나면 형주를 동오로 넘기기로 약조한 것도 제가 왔을 때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딴 말씀을 하시니 제가 어찌 얼굴을 들고 동오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공과 주공근은 그 죄를 물으려 하실 것이외다.
제가 죽는 것쯤은 한스러울 것이 없으나,
다만 근심스러운 일은 이로 인해 동오가 격분하여 군사를 내어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오.
그때에는 황숙께서도 이대로 편안히 형주에 머물러 계실 수 없을 것이며 공연히 천하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인즉
그 또한 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노숙은 온후한 어조로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가운데도 슬며시 엄포를 놓았다.
공명이 지체하지 않고 노숙의 말에 되물었다.
"지난날 조조가 백만 대군에다 천자의 이름을 내세우고 왔으나 나는 그를 우습게 여긴 바 있소.
하물며 주랑 같은 어린아이를 두려워하겠소?
그러나 자경께서 처지가 어려우시다니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오.
자경은 내가 이르는 대로 하시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오?"
공명의 말에 노숙이 궁금한 듯 급히 물었다.
"내가 황숙께 청해 증서를 써서 내놓으시게 하고 잠시 형주를 빌려 머물다가,
황숙께서 다른 땅을 취하면 그때에 즉시 동오로 돌려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증서를 써 드린다면 자경도 떳떳하게 돌아가실 수가 있을 것이오."
"군사께선 대체 어딜 얻으신 뒤에 형주를 돌려 주신다는 말씀이오?"
노숙은 얼른 공명의 본심을 헤아릴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중원에는 조조가 있으니 이미 때가 늦었고, 생각건대 서천은 아직 한 번도 침범을 받지 않은 곳이오.
그 주인 유장은 어리석고 유약하니 황숙께서는 그쪽에 뜻을 두신 바 있소이다.
그러니 서천을 얻는다면 그때는 즉시 형주를 돌려 드리겠소."
노숙은 공명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명이 준다는 증서라도 받는다면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처지였다.
유비가 친히 붓을 들어 증서 한 통을 써 서명하고 날인을 하자 공명도 보인(보증인)이 되어 서명을 한 후 노숙에게 말했다.
"나는 황숙 쪽 사람이니, 집안일에 집안 사람이 보인을 섰다면 남이 웃을 일이오.
자경이 보인을 서 주시면 오후께서도 흡족히 여기실 것 같소이다." 공명의 말을 듣고 보니 어긋난 말이 아니라.
노숙도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으며 유비에게 다짐을 두었다.
"황숙께서는 인의를 중히 여기시는 분이니 마땅히 약조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증서를 다 만들자 노숙은 하직을 고하고 유비와 공명은 나루터까지 나가 배웅해 주었다.
공명은 노숙과 헤어지면서 말했다.
"오후께 자경이 잘 말씀드려서 헛되이 경솔한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해주시오.
만약 이 증서를 마다하고 딴 마음을 품는다면 내가 강동의 81주를 모두 빼앗아 버릴 것이오.
지금은 우리 두 집안이 화목을 도모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 서로 다툰다면 기뻐할 사람은 조조뿐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기 바라오."
공명의 엄포가 담긴 당부였다.
노숙이 무거운 마음으로 배에 올라 동오로 가던 중 먼저 시상에 들러 주유를 만났다.
"형주를 되찾으러 갔던 일은 어찌 되었소?"
노숙을 기다리고 있던 주유가 그를 보자마자 얼른 그 일부터 물었다.
노숙은 증서를 꺼내 보이며 힘없이 말했다.
"증서를 받아왔습니다."
주유가 그 증서를 받아 단숨에 읽더니 펄쩍 뛰었다.
"자경은 또 제갈량 그놈에게 감쪽같이 속았소.
땅을 잠시 빌린다는 건 말뿐이지 가로채겠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들이 서천을 얻으면 형주를 돌려 준다고 하지만 그게 언제란 말이오?
설령 10년이 걸려서 서천을 얻는다고 한다면 형주를 10년 동안 돌려 주지 않을 것이니
그건 곧 돌려 주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겠소?
그러니 이런 증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뿐이오?
자경이 보증인이 되었으니 끝내 형주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자경께 그 죄를 물으실 것이요.
그때에는 어쩌시려고 이 따위 증서를 받아오셨소?"
노숙은 주유의 말을 듣고 있으니 오후 손권의 격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지 못한 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노숙이 다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덕이 설마 약조를 저버리겠습니까?"
"그들은 자경과는 다르오.
현덕은 속으로 야심을 감추고 있는 효웅이오.
거기다가 제갈량은 매우 간교한 무리요.
그 두 놈을 믿을 수 없으니 그것이 두렵소이다."
주유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노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숙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럼 앞으로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주유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으나 노숙의 힘없는 목소리에 동정을 금치 못했다.
주유가 언성을 낮추어 위로하듯 말했다.
"자경은 내 은인이오.
옛날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선뜻 곡식 3천 석을 주신 일은 잊을 수가 없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경을 구해 드릴 테니 여기 머물러 계시오.
강북으로 보낸 세작이 돌아오는 대로 달리 방책을 내어 보겠소."
주유가 그렇게 말하자 노숙은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시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주유가 보냈던 세작이 돌아왔다.
"형주성 안에는 조기가 세워지고, 성 밖에는 무덤이 하나 새로 생겼습니다.
군사들도 모두 상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작의 말에 주유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누가 죽었는가?" "유 황숙의 부인인 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감 부인은 지난날 유비가 소패에서 아내로 맞은 부인으로, 유일한 자식인 아두의 어머니였다.
지난번 당양에서 우물에 몸을 던져 미 부인을 잃게 된 이래 이제 감 부인마저 잃게 되었으니,
유비는 50의 나이에 홀아비가 된 셈이었다.
주유가 세작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무릎을 치며 말했다.
"으음, 그렇다면...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주유가 기쁜 얼굴로 노숙에게 말을 이었다.
"이제 유현덕을 사로잡고 형주를 고스란히 되찾게 될 것이오."
노숙이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습니까?"
"유현덕이 아내를 잃었으니 반드시 다시 장가를 들 것이오.
마침 우리 주공께 누이 한 분이 계시지 않소?
그 분은 성품이 굳세고 씩씩하여 방안에 병기를 벌여 세워 놓는가 하면
계집종들에게도 칼을 차고 다니게 할 정도로 남자 못지않은 여장부요.
내가 이제 주공께 글을 올려서 중매쟁이 한 사람을 형주에 보내게 한 다음 유현덕을 매부로 삼겠다고 꾀라 할 작정이오.
유현덕이 그 말에 넘어가 동오로 온다면 내가 남서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꽁꽁 묶어 옥에 가두어 버리고 말겠소.
그런 후 유비와 형주를 맞바꾸자고 한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형주를 내어 주게 될 것이오.
저들이 형주를 우리에게 내어 준 후에는 내게 또 다른 생각이 있소.
이 일이 성사된다면 자연히 자경의 딱한 처지도 저절로 펴질 수 있을 것이오."
불안으로 날을 지새던 노숙에게는 주유의 말이 더 이상 반가울 수 없었다.
주유에게 고마움을 나타내며 밝은 얼굴로 물었다. "
그럼 이제부터 어찌하면 좋겠소?"
"내가 글을 써 줄 테니 자경은 그 글을 가지고 주공에게로 가시오."
노숙은 그늘로 주유의 글을 받아 빠른 배를 내어 손권에게 가 형주를 빌려 준 일을 이야기하고 증서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손권은 증서를 읽어 보기도 전에 펄쩍 뛰며 노숙을 나무랐다.
"대체 무슨 일을 그 따위로 처리한다는 말이오!
이까짓 종잇장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오?"
"주 도독께서 주공께 올리는 글이 여기 있습니다.
이 계책대로 한다면 형주를 취할 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노숙은 다시 주유가 써 준 글을 손권에게 주었다.
서한을 다 읽어 본 손권이 흡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손권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여범이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면 능히 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으리라."
손권은 주유의 계책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형주로 보낼 중매쟁이를 손꼽아 보았던 것이다.
손권은 곧 여범을 불러들였다.
"근자에 듣기로 현덕이 부인을 잃었다는구려.
마침 내게 누이가 하나 있으니 이 기회에 현덕을 매부로 삼아 오래도록 손을 잡아 조조를 치고 한실을 바로잡고 싶소.
그런데
이 중매는 자형(여범의 자)이 나서 주어야만 될 것 같으니 부디 형주로 가서 유비를 달래어 데려오도록 하시오."
"이르신 대로 제가 현덕을 찾아보겠습니다."
여범은 손권의 명을 받자 그날로 배를 타고 졸개 몇을 데리고 형주로 갔다.
그때 형주의 유비는 아내 감 부인을 잃은 슬픔에 잠겨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런 유비를 공명이 위로하고 있는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동오에서 여범이란 사람이 와서 주공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공명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주유가 잔꾀를 부리려 보낸 사람인데 반드시 형주 문제를 꺼낼 것입니다.
저는 병풍 뒤에 몸을 숨길 터인즉 주공께서는 저쪽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모두 응낙하십시오.
그런 후 그를 역관으로 보내 쉬게 하신 다음 따로 방책을 세우면 될 것입니다."
공명이 병풍 되로 몸을 숨기자 유비는 여범을 불러들였다.
주인과 손님의 자리를 정해 앉은 후 예를 주고받자 유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형께선 무슨 일이 있어서 나를 찾았소?"
"황숙께서 부인을 잃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에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드림과 아울러 마침 좋은 혼처가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존의가 어떠하신지요?"
형주 일을 꺼내리라고 짐작하고 있던 유비로서는 뜻밖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유비가 얼른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다가 한참만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나이에 아내를 잃고 보니 실로 큰 불행으로 여겨지오.
그러나 아직 그 뼈와 살이 채 썩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다시 장가들 생각을 할 수 있겠소?"
여범이 물러서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러하시겠지만,
'사람에게 배필이 없으면 집에 대들보가 없는 것과 같다'는 옛말이 있듯
어찌 그 같은 인륜을 중도에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우리 오후께 누이가 계신데 아름다우면서도 어지시니 황숙과 아주 잘 어울리는 배필이 될 줄로 압니다.
만약 두 집안에서 진진지호(진나라와 진나라가 혼인을 이루어 화평하게 지냈던 일)를 맺으신다면
조조는 감히 동남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집안과 나라에도 모두 화평을 이루는 일이니 황숙께서는 다른 뜻이 있나 의심하시어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어머니 되시는 오 부인께서 막내따님을 몹시 귀여워하시기 때문에 멀리 시집을 보내기를 꺼려하십니다.
그러니 황숙께서 친히 동오로 오셔서 혼례를 올리셔야 할 줄로 압니다."
여범의 말에 유비도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감이 손권의 누이라는 말에 유비는 얼른 여범에게 물었다.
"그럼 이 일을 오후께서도 알고 계시오?"
"오후께 여쭈어 보지 않고 어찌 이런 일을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범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유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나이 이미 쉰이라 머리는 반백인데
오후의 매씨는 묘령의 처녀일 터인즉 아무래도 나의 배필로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오."
유비가 여범의 본심을 떠 보려 다시 한 번 거절의 뜻을 비쳤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여범이 아니었다.
"오후의 매씨는 몸은 비록 여자이지만 워낙 남아를 능가하는 뜻을 품고 계십니다.
평소 천하의 영웅이 아니면 지아비로 삼지 않으시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황숙께서는 그 이름이 사해에 널리 떨치시니 바로 오후의 매씨와 천생연분의 배필이 되실 것입니다.
이 혼례는 이 나라의 화평이 걸려 있는 중대사이며 오후께서도 무겁게 이 일을 정하셨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범이 거침없이 그렇게 말하자 유비는 공명이 당부한 말을 생각하고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끌지 않고 대화를 끊었다.
"이 일이 가볍지 않으니 공은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잘 생각해 본 후에 내일 대답하리다."
유비는 대답을 미루고 나서 연회를 베풀어 여범을 융숭히 대접한 다음 역관에 돌아가 쉬게 했다.
이때
공명은 병풍 뒤에서 유비와 여범이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탁자 위에는 방금 점친 점괘가 펼쳐져 있었다.
여범이 돌아가자 유비는 공명을 불러 물었다.
"군사의 뜻은 어떠시오?"
"그 사람이 온 뜻은 제가 이미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까 주역의 점괘를 뽑아 보았더니 크게 길하고 이롭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주공께서는 그 일을 응낙하시고 먼저 손건을 여범과 함께 동오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손권을 만나 혼사를 정한 뒤 좋은 날을 택해 혼인을 치르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걱정거리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필시 주유가 나를 해칠 목적으로 이 계책을 꾸몄을 터인데 그런 위험한 곳을 어찌 가벼이 갈 수가 있겠소?"
유비의 말에 공명이 고개를 저으며 껄껄 웃었다.
"주유가 비록 계교를 잘 쓴다고 하지만 어찌 이 제갈량을 넘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제 주유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하겠으니 주공은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손권의 매씨도 주공께 돌아오게 함은 물론 형주도 잃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며 유비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유비는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해 주저하고 있었다.
공명이 보다못해 손건으로 하여금 여범을 따라 강남으로 가서 혼담을 성사시키도록 일렀다.
손건은 여범과 함께 강남으로 갔다.
그러나 손권이 물었다.
"나는 황숙을 누이의 배필로 삼으려 할 뿐이지 다른 뜻은 없소.
황숙의 의향은 어떠하오?"
"황숙께서는 이번 혼사를 허락하셨습니다."
"오, 그러한가?
두 집안을 위해 실로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소."
손권도 기뻐하며 말했다.
손건은 절을 올리며 감사하고 형주로 돌아와 유비에게 강남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전했다.
"오후께서는 대사를 치르러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유비는 여전히 의심을 떨쳐 버리지 못해 주저하고 있는데 공명이 유비를 재촉했다.
"이미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제가 세 가지 계책을 세워 두었습니다.
조자룡을 데려가시면 능히 계책을 행해 위급을 면할 터인즉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명은 조자룡을 불러 귀엣말로 가만히 일렀다.
"자룡은 황숙을 호위하여 동오로 가시오.
가기 전에 여기 비단 주머니 세 개가 있으니 이것을 꼭 챙겨 가도록 하오.
주머니 속에는 적절한 계책이 들어 있으니 이것을 꼭 챙겨 가도록 하오.
주머니 속에는 적절한 계책이 들어 있으니 위급할 때마다 차례대로 그 계책을 펴도록 하시오."
조운은 비단 주머니를 받아 품 속에 간직했다.
공명은 유비와 조운이 떠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동오로 보내 예물을 전하게 했다.
때는 건안 14년(209년) 초겨울인 10월. 유비는 조운과 군사 5백을 거느린 채
열 척의 빠른 배를 타고 형주를 떠나 남서로 향했다.
형주의 모든 일을 공명에게 맡기고 떠난 유비는 여전히 한 가닥 의심을 지우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윽고 배가 남서에 닿자 조운은 떠나기 전에 공명이 일러 준 말이 생각났다.
'군사께서 세 가지 묘책을 차례대로 행하라고 하셨으니 이제 첫째 주머니를 열어 보도록 하자.'
조운이 비단 주머니를 끌러 보았다.
<먼저 교국로를 방문하라!> 교국로는 이교, 즉 조조가 일찍이 강남의 이교라 일컬은 두 미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두 딸 중 언니는 손책의 아내이며 동생은 주유의 아내였으니, 교국로는 자연히 동오의 원로로 추앙받고 있는 대신 이었다.
공명의 계책을 본 조운이 5백여 군사에게 이런저런 분부를 내리자 군사들은 각각 그 영을 받고 흩어졌다.
조운은 유비에게 아뢰어 공명의 계책대로 먼저 교국로를 찾아보게 했다.
이에 유비는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교국로 보러 떠났다.
이때 군사들은 빨간 옷에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다음 성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혼인에 소용되는 예물을 구입하며 유비가 동오의 사위가 되러 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5백이나 되는 군사들이 요란한 행색으로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떠드니 그 소문은 금세 성 안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다.
손권은 유비가 왔다는 말에 일이 뜻대로 되어 감을 기뻐하며,
여범으로 하여금 극진히 대접하게 한 뒤 객관으로 안내하여 편히 쉬게 했다.
주유의 계책에 유비가 이렇게 쉽게 떨어지리라고는 손권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