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늘한 밤바람이 뱃전을 휩쓸고 적취지의 물결은 오색 등불에 오히려 음산해보였다. 중천에서 기운 달은 차가운 냉기를 사위에 뿌리고 있다.
배 안의 사공들과 시녀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시녀 중 하나가 태평공주에게 환약을 먹이고 몸을 주무르자, 한참 후에 그녀가 깨어났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하고 조용히 명했다.
“황태후 폐하는 조심스럽게 장생전 침실로 모셔라. 황제 폐하도 침전으로 모시고.”
태평공주는 이어서 말했다.
“저기 회의대사님에게 해독제를 먹여 깨워드리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은 서원의 추정각秋情閣에 모시고 여인들은 춘락원春樂院에 모시도록 해라.”
“선실에 잠들어 있는 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사비우 장군과 여미아는 혹시 깨어났을지도 모르니, 혈도穴道를 찍어 기절시킨 후, 각기 추정각과 춘락원으로 모셔라.”
조금 있으니 회의가 일어났다. 그는 주변 상황을 둘러보다가 태평공주를 발견하고 물었다.
“공주마마, 어떻게 된 건가요?”
“모두들 추정각과 춘락원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대사께서는 이 밤에 어디서 주무실 건가요?”
“글쎄요, 그건 공주마마께서 조처해 주셔야겠죠.”
“괜찮으시다면, 추정각으로 가서 조용한 방에 혼자 주무십시오.”
“고맙습니다.”
배가 잔교에 닿고 사공들과 시녀들은 차분하게 움직이며 쓰러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업고 서원의 추정각과 춘락원으로 향했다.
태평공주가 춘락원까지 따라가서 여인들의 잠자리를 보살펴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눕혀진 것을 확인한 태평공주는, 아랫사람들이 죄다 나간 후 곁에 있는 회의에게 말했다.
“대사님, 이 쪽 방 둘엔 미시아, 극시아가 자고 있고, 저 쪽 방에는 이루하와 여미아가 자고 있습니다.”
“그런 걸 왜 제게 말씀하십니까?”
“그들을 잘 보살펴 주세요.”
“보살펴주라뇨?”
“다른 분들은 모두 술에 약해 곯아떨어지고 깨어있는 분은 대사님 밖에 없으니, 이분들이 이곳에서 안전하게 주무시도록 지켜달라는 뜻입니다.”
“이곳엔 순찰꾼들이 오지 않습니까?”
“오지만 시간이 바뀔 때 한차례씩만 거의 형식적으로 둘러보고 갑니다.”
“그렇군요. 소승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회의는 매우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추정각의 숙소에 가서 쉬십시오. 제가 친히 안내할게요.”
“고맙습니다.”
한편, 선실에 누워있던 여미아는 자신과 사비우를 지키던 시녀들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듣고 살며시 눈을 떠보니 밖이 좀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시녀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한 여인이 그녀의 몸을 뒤집어엎더니, 갑자기 그녀의 목 뒤 혼수혈昏睡穴을 사정없이 갈기는 것이었다. 여미아는 느닷없는 일격에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가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사방이 칠흑 같이 깜깜했다.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있었는데, 곁에는 자신의 여주인 이루하 아가씨가 잠들어 있음을 그녀의 체취와 숨결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문을 더듬어 찾아 밖으로 나와 보니, 만월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사위는 풀벌레소리만 요란할 뿐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가 차가운 냉기를 느끼며 안으로 다시 들어와 방문을 닫고 누웠다. 몸이 피곤해 다시 곧 잠들려는 찰나다. 어디선가 살풋이 문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여미아가 귀를 곤두세우고 들었으나 사방은 고요했다.
갑자기 그녀의 가슴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계속 귀를 집중하고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잠시 후에, 현관문을 열고 닫는 듯한 소리가 아주 약하게 들렸다.
‘어젯밤, 연회가 파하고 여인들이 모두 여기에 잠든 건가?’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해보았으나, 웬일인지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조금 있으니 야경꾼들의 딱따기 소리가 들리다가 사라져간다. 그 때 옆 방문이 살며시 열리는 듯한 소리가 감지되었다.
‘아마도 누가 나처럼 바람 쐬러 나갔다가 들어오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불현 듯 불길한 예감이 다시 가슴을 압박했다. 여미아는 소리 없이 일어나 방문을 조용히 열고 나간 후, 옆방 문틈 가까이에 귀를 대어 보았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방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남이 자는 방안을 엿보는 것이 꺼림칙해,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안에서 “헉!”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건 급소를 얻어맞고 내는 소리 같았다.
‘이상하다?’
마침내 용기를 낸 여미아는 방문을 가만히 열어젖혔다. 방안이 깜깜해서 사물이 잘 분간되지 않았으나, 몇 사람이 누워있는 것 외에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여미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시험 삼아 말해보았다.
“안에 계신 분, 모든 것을 비밀로 해 드릴 터이니, 지금 즉시 밖으로 나가주세요. 저도 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실내는 마치 깊은 바닷 속에 바늘이 빠진 듯 흔적 없이 고요했다.
“제가 불을 켜기 전에 어서 빨리 나오세요.”
역시 아무런 반응도, 대답도 없다.
‘내가 신경이 과민해, 착각을 한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여미아는 조용하게 문을 닫았다. 되돌아 나오려다가 아무래도 뭔가가 걸쩍지근해서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와 화섭자에 불을 붙인 다음 재차 옆 방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실내에는 몇 여인만 잠들어 있을 뿐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방에서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강력한 일격이 그녀의 명문命門을 습격했다. 불의의 일격에 명문을 한 대 얻어맞은 여미아는 앞으로 꼬꾸라지려는 몸을 간신히 버티며 앞으로 건너뛰고, 뒤를 홱 돌아다보았다.
찰나 간, 흑의를 입고 얼굴에 복면을 쓴 검은 그림자가 문 밖으로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 여미아는 그를 추격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 사이 흑의인은 몸이 몹시도 가벼운 듯, 날아갈 듯 달아나는 것이다.
여미아는 갑자기 호승심이 발동해 즉시 맨발로 그를 추격했다. 잠시 후 두 사람 사이가 점점 좁혀졌다.
‘아차! 이건 혹시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가 아닐까?’
이렇게 의심하며 여미아는 추격을 멈추고 발걸음을 되돌려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별다른 동정이 없었다. 그녀는 흑의괴인이 들어갔던 방으로 들어가 등불을 켰다.
두어 명의 여인이 그 곳에 반듯이 누워있는데, 한 여인은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녀를 눈여겨보니, 다름 아닌 미시아였다. 예감이 좋지 않아, 그녀의 옷매무새를 살펴보니, 옷을 죄다 입은 채로 잠들어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여미아가 미시아를 흔들어 깨웠으나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혼약에 혼절된 게 틀림없구나. 해약을 가졌다더니, 먹지 못했나?’
이렇게 생각하며 여미아는 품속에서 해독제를 하나 꺼내 그녀의 입을 벌리고 집어넣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 혈도를 짚인 게 틀림없구나.’
여미아는 자신이 혼수혈을 짚여 당한 일을 상기하며 그녀의 혼수혈을 풀어주었다. 잠시 후 미시아가 눈을 떴다. 미시아는 여미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방금 전의 그 괴한은 어디로 갔느냐?”
“도망가고 말았어요.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글쎄 말이다. 미혼약 해독제가 잘 듣지 않는가 보구나.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지 뭐냐?”
“···?”
“어떤 야행인夜行人이 방안에 침입한 것을 뻔히 느끼면서도 소리를 지를 수도, 제어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놈에게 혈도를 제압당했어.”
여미아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미시아가 여미아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언니는 옷차림이 온전하잖아요?”
미시아가 자기 옷을 만져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은 그야말로 권모술수가 난무해 자칫하다가는 목숨을 잃기 쉬운 용담호혈龍潭虎穴, 도산검림刀山劍林이니, 정말 조심해야 해.”
미시아의 말이다.
“감사해요. 언니는 이 안에 계시니, 제가 오히려 걱정돼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굴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니?”
여미아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언니, 우리 방으로 가요. 그 방에는 저의 주인 아씨 밖에 없어요.”
“그러자꾸나.”
방안의 불을 끈 후 자기 방으로 미시아와 함께 극시아를 안고 온 여미아는 촛불을 켜고 이루하와 극시아에게 해독제를 먹였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미혼약을 썼는지 모르나, 약효가 늦게 발동하면서도 한 번 발하면 매우 강력한 것 같아요.”
“그래, 근데, 술에 미혼약을 타서, 우리 모두에게 먹인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그건 말하기도 부끄러워요. 아마도 우리의 몸을 유린하려 했을 거예요.”
미시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왔던 그 흑의괴인이 바로···.”
미시아가 한 차례 몸서리를 쳤다.
“언니도 아시겠지만, 무 태후가 조영공자를 자신의 남자로 삼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하지만 조영공자는 의기가 가득한 장부인지라, 그녀의 갖은 술수에도 넘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넌 어떻게 그리 잘 아니?”
“그건 조금만 추측해보아도 쉬이 알 수 있어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여미아는 다시 이었다.
“한편으로 태평공주는 공주 나름대로 조영 공자를 자기 남자로 만들고자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녀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은, 나도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둘의 혼인은 우리 본국의 뜻과도 합치하지 않느냐?”
“전, 그런 식의 정략적인 결혼이 과연 우리 본국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모르겠어요.”
“어째서?”
“남아의 심성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이는, 길러주는 유모나 어머니예요. 장차 본국 황실 후예들의 외가가 당나라라면, 그들의 심성은 당나라 문물에 젖어들고, 나라까지 당나라에 예속되며, 심할 경우 혈통조차 당인唐人으로 바뀔 수 있어요.”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어르신들의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분들은 나름대로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를 가지고 계실 거예요.”
미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묻는다.
“무 태후 주위를 맴도는 회의대사는 도대체 누구냐?”
“원래 낙양성의 무술 꽤나 하는 약장수였대요. 그를 무 태후에게 소개한 이가, 천금공주라는 말도 있고, 태평공주라는 풍문도 있어요.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나, 당 황실은 물론 대당의 권력층이 남녀관계에서 몹시 부패해 있어요. 근데 왜 갑자기 그를 들먹여요?”
“아무래도 내 예감이 이상해.”
“누가 왔었다는 거예요?”
“그냥 느낌일 뿐이야.”
그러고 보니, 달아나던 흑의인의 체형이 누군가와 동일한 것 같았다.
“좌우간, 무 태후 모녀가 조영 공자를 노리는 이런 와중에 언니와 제가, 그리고 우리 이루하 아씨가 조영공자 주변에서 맴돌고 있으니, 그들은 우리 셋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해요.”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하고 있단다.”
“그들이 우리를 제거하지 않는 것은, 아직 적당한 명분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작년에는 우리 아씨와 제가 무 태후의 계략에 걸려 하마터면 정절을 짓밟히거나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여이마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총명한 여미아는 여러 정황을 분석해서, 그리고 직감에 의해, 작년 숭산에 놀러갔다 오는 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던 사건이 무 태후의 술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네가 여길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구나.”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리고 주인아씨가 반은 볼모가 되어 여기에 붙잡혀 있는데, 비녀인 제가 어떻게 떠나요?”
“그래, 나도 실은 볼모나 마찬가지지. 또 우린 태자전하(고조영)를 지켜드려야 하고, 또 이곳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를 붙잡겠느냐?”
“언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어떡하긴? 모른 척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내야지.”
미시아가 대답한 후 되물었다.
“너야말로 어떡할 작정이냐?”
“그냥 지켜 볼 거예요. 저는 이루하 아씨의 여종이니 주인께서 움직이는 대로 처신하는 수 밖에요.”
“이루하 아가씨와 이기창 도령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래요, 사실이에요.”
“두 사람이 혼인할 것 같니?”
“모르겠어요. 우리 아씨는 조영공자를 죽도록 좋아하면서도, 이기창 공자가 큰 호의를 가지고 매우 적극적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요. 우리 아씨가 불쌍해요.”
“그런 감상은 버려야 한다. 밀명을 수행하는데 해로워. 그리고 이루하 아씨가 왜 불쌍하니? 이기창 공자와 혼인하면 앞으로 안방마님으로 떵떵거리며 호화롭게 살 터인데.”
“제 생각에는 우리 아씨가 끝내 그 혼인을 수락할 것 같지 않아요. 조영 공자를 못 잊고 있어요.”
미시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창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여미아에게 물었다.
“너도 아마 짐작하고 있겠지?”
“뭘요?”
“우리가 아주 어릴 적에 할아버지께서 우리의 장래 낭군으로 정해주신 남아가 어쩌면 태자전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여미아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도! 말은 바르게 하셔야죠. 우리가 아니라, 언니죠.”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 둘 중 하나와 혼인시키기로 정하셨다고 하니까.”
그 때 곁에서 누군가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나! 그게 사실이에요?”
미시아와 여미아는 그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루하의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루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아씨, 깨어나셨군요.”
사실 이루하는 오래 전부터 깨어났지만 잠든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조영이 미시아 자매와 혼약했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발설하고만 것이다.
이루하가 재차 물었다.
“두 자매와 조영 장군님이 어릴 적에 혼약했다는 건, 진실이군요?”
“아가씨, 그건 추측일 뿐입니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요.”
미시아의 대답이다. 이루하가 침묵을 지켰다. 미시아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시절이 하 수상하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천명天命이 있어서, 혼인대사는 향후 수년 내로 고려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미시아는 이루하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아마 조영공자도 몇 해 안에 장가가긴 힘들 거예요. 아가씨는 어떻게 젊은 청춘을 허비하며 늙어갈 수 있겠어요?”
그것은 고조영을 단념하라는 뜻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이루하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이루하는 얼굴에 수심을 가득 담고 말이 없었다.
여미아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녀가 미시아에게 물었다.
“언니, 언니를 해치지 못했으므로, 그들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할 텐데, 장차 어떡하실 거예요?”
“고육지계를 써서 속여야지, 어쩌겠니?”
“어떻게요?”
“넌, 흑의와 복면을 착용하고 침범한 괴한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여미아는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모른 척했다.
“그 작자가 틀림없어.”
“누구를 말함인가요?”
이루하가 물었다.
“그 자 있잖아요? 겉으로는 근엄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음란을 가득 품고 있는 그 자 말이에요.”
이루하도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반문했다.
“하지만, 태후마마가 그걸 아는 날에는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태평공주와 그 남자가 둘이서 꾸몄을 거예요.”
미시아가 속삭이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들이 노리는 건 저와 이루하 아가씨, 그리고 내 동생 여미아예요. 왜냐하면, 태평공주가 조영공자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태후마마도 조영공자를···.”
이루하는 차마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린 그들의 공동 표적이 되어 있어요.”
“하지만, 무 태후가 미시아 아가씨를 곁에 두는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어요. 마치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 같을 텐데.”
“그건 다 숨은 까닭이 있을 거예요. 아마도, 저를 완전한 자기 사람으로 만든 후 호랑이 굴을 통째로 없애버릴 계획을 품고 있을 겁니다.”
“호랑이 굴이라면?”
“그건 우리 비밀이라 자세히 말하기 어렵지만, 아가씨도 지난 번 영주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짐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당장 군사를 풀어 손을 쓰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이유가 없죠. 우리 세력을 뿌리 뽑지도 못할뿐더러 오히려 반감만 키워, 동북지방에서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무 태후 자신으로서는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죠.”
그건 사실이다. 그렇잖아도 동돌궐이 자꾸 국경을 침범해 노략질하니, 동북 변방을 생각하면 무 태후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런 마당에 그 쪽의 고려인, 말갈인, 해족, 거란인 등이 들고 일어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거란족 이루하와 그녀의 부친 송막도독 이진영, 귀성주자사 손만영 등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소이所以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동북방이 염려스러운 무 태후는 이진영의 처남인 귀성주자사 손만영을, 숙위宿衛(궁궐에서 제왕을 호위함)의 명분으로 동도 낙양에 불러 놓고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루하도 공공연한 볼모의 처지가 아니었으나, 실은 모종의 관찰을 암암리에 받고 있었으므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도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거란인 이해고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으나, 고조영과 미시아는 명백한 볼모였다.
고조영은 고려인들과 후고구려의 고중상을 견제하기 위한 인질이었고, 미시아는 임가노장주 말갈인 임장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무 태후의 숙위宿衛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특히 고조영에게는, 그녀의 남총으로서의 지위,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한 여러 보호 장치들 가운데 하나, 후고려국과의 분쟁을 피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볼모, 이런 세 가지 목적을 그녀가 부여하고 있었다. 물론 셋 중 첫 번째 사안은 효과적으로 달성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말갈 추장의 후예 이다조 장군과 거란 송막도독 이진영이 사돈으로 맺어질 경우, 그들의 세력을 한데 응집시키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으므로 무 태후는 이기창과 이루하의 혼사를 겉으로 지지하는 척했으나 속으로 매우 꺼려했다.
물론 이루하나 여미아, 미시아가 고조영과 맺어지는 것도 무 태후는 원치 않았다. 이래저래 최선의 방책은 고조영을 자신의 남총으로 삼아, 그에게서 고려의 혼을 빼버리고 훗날 적당한 화인華人 아낙네와 혼인시키는 것이며, 이루하, 여미아, 미시아 등은 겉을 멀쩡하게 보존해 주면서도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속(?)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었다.
(다음회로 계속)
********************
샬롬.
2024. 9. 6.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