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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대(戀主臺)는 관악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서기 677년(신라 문무왕 17) 의상대사가 관악사(冠岳寺)를 창건할 때 관악산 정상 남쪽 절벽 위에 암자를 지었고, 후에 그 암자를 의상대사가 좌선하던 곳이라 하여 의상대(義湘臺)라 불렀다.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강득룡(康得龍),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등 많은 고려 유신(遺臣)들이 의상대(義湘臺)에 올라 멀리 송경(松京:개경)을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후세인들이 그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의상대(義湘臺)를 연주대(戀主臺)로 개칭하여 부르며 오늘에 이른다.
세자의 자리를 아우인 세종에게 물려주고 지금의 경기도 광주로 퇴출 된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어서도 방탕 생활을 이어갔다.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주색에 빠져있거나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등 끝없는 방황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자 점점 폐인이 되어가는 양녕대군을 안타까워하던 효령대군이 관악사(冠岳寺)에 가서 함께 수양(修養)할 것을 제안한다.
불교를 믿지 않는 양녕대군은 아우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술이 있고 사냥만 할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해 따라나섰다.
관악사(冠岳寺)는 지금의 연주암(戀主庵) 반대편 한양 도성이 내려다보이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관악사(冠岳寺)에 도착한 양녕대군은 아우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법당에 나아가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
불심 깊은 효령대군은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예를 올렸지만, 불교에 뜻이 없던 양녕대군은 형식적인 예만 갖췄을 뿐이다.
의례적인 사찰 방문 절차가 끝나자, 양녕대군은 곧바로 사냥 갈 준비를 한다.
그러자 효령대군이 깜짝 놀라 만류한다.
"형님! 안 됩니다. 오늘은 재(齋)를 올리는 날이니 사냥과 술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불교에서 "재(齋)"란 입, 몸, 마음으로 짓는 삼업(三業)을 청정히 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될 것이니 거리낄 것이 무엇 있겠나." 하였다.
사냥 가는 것을 거둔 양녕대군은 아우 효령대군의 손에 이끌려 연주대(戀主臺)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들이 자라온 한양 도성을 내려다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에 빠진다.
사실 양녕대군은 그 도성이 몸서리쳐지는 곳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차기 국왕이 될 신분으로 만인의 섬김을 받으며 영예로운 삶을 살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술과 여자에 빠져 인간 본성의 밑바닥까지 타락했던 곳이기도 하다.
부왕인 태종은 조선을 창업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수많은 정적을 도륙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권 강화라는 명분 아래 잠재적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권문세도가나 일가친척에 이르기까지 사정없이 처단했다.
더구나 어린 양녕대군을 지극정성으로 성장시킨 처가 식구들도 미래의 위협으로 여기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닌가.
성년이 된 양녕대군은 부왕이 휘두른 칼날에 피로 물든 왕궁을 바라보며 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 후 부왕의 폭정에 혐오감을 느낀 그는 왕궁 담장을 넘어 사람 냄새나는 저잣거리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어울려 대폿잔을 기울이고 기생집을 전전하며 절세미인들의 분 냄새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아첨꾼들이 파리 떼처럼 모여들어 세자의 성총(聖聰)을 흐리게 하고, 앞뒤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러한 생활이 누적되어 폐세자에 이른 것이다.
양녕대군은 햇볕이 따가운 산 정상 너럭바위에 기둥을 박고 차광막을 쳤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그곳이 한양 도성 조망대가 돼버렸다.
그 광경을 본 효령대군이 그 너럭바위를 차일암(遮日巖)이라 명명(命名)하였다.
양녕대군은 그곳에서 도성을 내려다보며 외롭고 따분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간다.
왕세자 신분으로 천하의 주인이 되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취할 수 있었는데,
졸지에 폐세자된 신분으로 관악산 꼭대기 너럭바위에 홀로 누운 신세가 됐으니, 그 심정이 어떠하였으랴.
보이는 건 해와 달, 산새와 나무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별들뿐이고 눈을 돌리면 옛 생각 간절한 도성이 내려다 보이니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고 참담했을까 쉽게 짐작이 된다.
더구나 궁중 생활 내내 끝 모를 기행으로 자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가 아니던가.
이젠 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세월이 갈수록 왕조에 대한 미련과 욕구가 더욱더 끓어올라 자꾸만 도성이 보이는 쪽으로 시선이 끌린다.
하루에도 수십번 무엇에 이끌리듯 너럭바위에 올라 도성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해가 저문다.
밤이 되면 목숨처럼 아끼던 애첩 어리가 사무치게 그리워 엎치락뒤치락 뜬눈으로 지샌다.
눈을 감으나 뜨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어리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양녕대군의 그런 모습을 본 효령대군은 불경 읽기를 간곡히 권한다.
그러나 하 많은 세월 비단결 같은 여인을 품에 안고 천하 명인이 빚은 술로 목을 적시며 끝 모를 향락에 취해 살아온 그가 아닌가.
그런 양녕대군의 마음속에 부처님의 말씀이 닿을 리 있겠는가.
마음 둘 곳 없던 양녕대군은 어느 달 밝은 밤 갑갑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관악사(冠岳寺) 뒤쪽 산에 오른다.
그리고 달빛을 따라 걷던 중 자그마한 암자 하나를 발견한다.
암자라 하기도 허술한, 단 한 사람 겨우 등만 밀어 넣을 정도 되는 움막 같은 그곳에 늙은 스님 한 분이 달맞이를 하고 있었다.
암자 앞 뜨락엔 다 무너지고 한 층만 남은 돌탑이 방치되어 있다.
양녕대군은 노승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나요?"
"달을 보고 있소."
"여기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요?"
"홀로 공부하는 중이오."
"저 아래 절에서 재를 지낸다는데 거긴 안 가시나요?"
"나는 잿밥에는 별 관심이 없소. 소승은 벽곡(辟穀)하며 살고 있소. 그래서 먹을 것 구할 일 없으니, 마음이 평화롭소."
여기서 벽곡(辟穀)이란 솔잎, 대추, 밤 등으로 생식하는 것을 말한다.
노승은 여전히 달만 쳐다본다.
양녕은 다시 묻는다.
"이러한 곳에 혼자 있으면 쓸쓸하지 않겠소?"
노승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은 저 달에게 물어보시오."
그러자 호기심이 생긴 양녕이 다시 묻는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와 재물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사는데, 보아하니 스님께선 하시는 일도 없고, 이 암자 외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으니, 정녕 아무런 욕심이 없나요?"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 있겠소. 저 탑을 보시오." 하면서 무너진 돌탑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소승은 욕심이 자랄 수 없도록 수행을 하는 중이라오."
사람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하는 출세와 부귀영화도 한순간 스쳐 가는 바람 같은 것, 아무리 공들여 쌓은 탑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가 거기에 있지 않은가.
비록 가진 것 없는 노승이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표정에서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하는 진리가 읽힌다.
노승의 범상치 않은 대답에 살짝 충격을 느낀 양녕대군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걸어온 삶과 노승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누려온 왕세자로서의 지위와 권위 그리고 화려했던 궁중 생활 모두가 노승의 삶에 비추어 보면 다 부질없는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 아닌가.
노승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 한켠에 인다.
노승과 말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쌓인 그간의 업보(業報)가 마치 거울에 투영된 것처럼 훤히 드러난다.
양녕대군은 마음속에 이는 혼란스러움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속된 중들은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겠지만 벽곡(辟穀), 즉 솔잎과 대추, 밤 등으로 생식하며 사는 노승에겐 그러한 것들이 불필요한 짐일 뿐이다.
그러니 천석지기 부자가 부러울 리 없고 만석지기 갑부가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낮에는 새들과 노닐고 산짐승들과 어울리며 밤에는 달빛을 벗 삼으니 외로울 것 없는 신선의 삶이 아니던가 말이다.
양녕대군은 노승의 삶을 체험이라도 해 보려는 듯 암자 앞 뜰 아래 몸을 누인다.
등이 땅에 닿으니 세상 만물이 내 것이고 별빛 쏟아지는 온 우주가 나의 집이며 덩굴에 걸린 달이 나를 향해, 아니 나를 위해 비추고 있지 않은가.
이곳은 탐욕이 들끓는 도성도 아니고 아첨하는 간신배도 없으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괴도 없다. 또한 행동의 제약을 받는 궁중 예절이나 규범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니 부귀영화도, 출세도 필요 없는 그야말로 신선들의 세상이 아닌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양녕대군은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살랑대는 바람결에 스르르 잠이 들고 만다.
동틀 무렵 잠에서 깨어보니 어젯밤에 보았던 암자와 노승은 온데간데없고 무너진 돌탑만 남아있다.
양녕은 서둘러 처소로 돌아와 두루마리를 펴고 간밤에 만났던 스님에게 부치는 글을 써 내려간다.
題僧軸(제승축) 스님의 시축에 쓰다. / 讓寧大君(양녕대군)
山霞朝作飯(산하조작반) 아침에는 산 노을로 밥을 짓고
蘿月夜爲燈(라월야위등) 밤에는 덩굴에 걸린 달을 등불 삼아
獨宿孤庵下(독숙고암하) 외로운 암자에서 홀로 잠드니
惟存塔一層(유존탑일층) 남은 것은 무너진 돌탑뿐이라네
아침에는 붉게 타오르는 산 노을로 밥을 짓고
밤에는 덩굴 사이 비추는 달을 등불 삼아
외로운 암자에서 홀로 잠드니
남은 것이라곤 다 무너진 돌탑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다 무너진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잘 표현하고 있다.
효령대군은 관악사(冠岳寺)에서 온종일 북을 치며 속세에서 오염된 마음을 정화 시킨다.
사실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될 때 은근히 다음 세자는 자신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부왕의 시선이 아우 충녕에게 기우는 것을 감지한 그는 마음을 접었다.
효령대군은 한양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관악사(冠岳寺)에서 속세의 유혹을 떨치기 위해 온종일 북을 친다.
그러나 문만 열면 바로 보이는 도성으로 인해 아무리 마음을 닦고 수련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처절하게 북을 치고 불경을 암송해도 고개만 돌리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어찌하랴.
그럴수록 북을 치는 팔에 더욱더 힘을 쏟는다.
얼마나 북을 쳤는지 치던 북의 가죽이 늘어져 가죽 두드리는 소리만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불심이 컸던 효령대군은 관악사(冠岳寺)에서 극락왕생을 꿈꾸며 약 2년간 수련하였다.
그 후 세인들에 의해 관악사(冠岳寺)의 명칭이 연주암(戀主庵)으로 개칭되었으며 지금도 연주암(戀主庵)에는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보존되고 있다.
연주암(戀主庵)이라는 명칭은 왕자가 도성을 그리워해서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사실은 도성을 잊기 위한 왕자의 처절한 몸부림이 만들어낸 명칭이 아닌가 싶다.
다음은 효령대군이 연주암에 머물며 읊은 시(詩)이다.
文殊臺(문수대) / 李補(이보)
仙人王子晉(선인왕자진) 신선 왕자진(王子晉) 이여
於此何年游(어차하년유) 여기서 노닌 때가 어느 해였던가
臺空鶴已去(대공학이거) 문수대는 텅 비고 학은 이미 떠나
片月今千秋(편월금천추) 조각달만 지금껏 세월을 비추는군요.
효령대군의 시(詩) 역시 양녕대군의 시(詩)와 맥락상 상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효령대군의 시(詩)에 등장하는 왕자진(王子晉)은 주나라 영왕의 태자로 바른말을 간하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숭고산(嵩高山)에 들어가 신선(仙人)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효령대군은 왕자진(王子晉)의 사연을 빌어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겄이다.
2010년 4월 3일 연주대에 올라 열운(洌雲)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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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성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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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岩寺)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절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佛供)을 드리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옵니다.”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지겠나.”
하였다.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오,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라.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지겠는가.
生爲王兄(생위왕형)
死爲佛兄(사위불형)
不赤樂乎(부적락호)
양녕대군의 이 일화는 세종실록, 성종실록의 효령대군 졸기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