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조소瓷器雕塑(자소瓷塑라 간칭)는 우수한 소조예술의 하나이다. 경덕진의 자소瓷塑의 역사는 유구하며 유물도 풍부하다. 청대淸代의《남요필기南窯筆記》에 '수隋 대업연간大業年間(605-618)에 사자형상의 커다란 동물 대좌 두 개를 만들어 현인궁顯仁宮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재 수당대隋唐代의 실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래에 경덕진 호전湖田 등의 요지와 송대宋代의 기년묘紀年墓에서 북송 초기의 영청자기가 출토되었으며, 남송시기에 이르러 품종은 더욱 증가하였다.
송대宋代의 자소를 종합하여 분석하면 ; - 진열과 관상용의 작은 완구(말, 원숭이, 개, 양, 닭, 기마인물, 동자 등) - 사묘寺廟에 봉안된 관음觀音과 부장용의 명기(자소瓷器 인형 - 십이생초十二生肖, 수호무사, 남녀시종, 오락, 문물관리, 효자孝子, 호인胡人, 호인견마胡人牽馬, 사령四靈, 벽사闢邪, 퇴소귀의병堆塑歸依甁, 가축, 가금家禽 등) - 실용적인 자소(교룡자침蛟龍瓷枕, 사자희구자침獅子戱球瓷枕, 해아수련자침孩兒睡蓮瓷枕, 누공로鏤空爐, 훈熏 등) 및 호壺, 병甁, 합盒, 훈熏, 로爐 등의 기물에 부속된 날소捏塑한 동물과 화과花果 종류
이 시기의 제품은 소량의 자기인형이 틀(모범模范)을 이용하여 성형한 것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수날(手捏-손으로 빚음)과 각선(刻線-선을 조각하여 처리)을 결합하고, 부위별로 나누어 빚어가면서 접합하여 만들어, '면소面塑'라는 제작방법과 유사하다. 이처럼 틀을 사용하지 않고 성형한 자조를 '날소捏塑'라고 하는데, 동시대의 정요定窯, 자주요磁州窯, 길주요吉州窯 등의 소조 풍격과 유사하며, 모두 송대 공예미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영교靈巧, 전아典雅, 수려秀麗한 시대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작은 완구류는 날소와 조각기법이 숙련되고 형체가 야무지고 동태動態가 생동하며 형상의 특징이 선명하여, 완구의 사회적인 기능과 부합되었다. 영청影靑 날화합捏花盒과 투각훈로透刻熏爐와 퇴소귀의병도 정교하며 아름다워서, 경덕진의 날조捏造, 누조鏤雕, 부조浮彫의 선구가 되었다. 자기인형의 형체는 날씬하여, 풍만하고 화려하며 기백이 장대한 당대 도용과는 운치가 크게 다르다. 영청유의 유색은 미황색米黃色으로 치우치고, 일부 기물은 갈색의 점채點彩로 장식하였으며, 시유하지 않은 삽태용澁胎俑도 있다. 시유법施釉法은 첨유법沾釉法을 채용하였으며 굽은 시유하지 않았다. 각선(刻線-선을 조각하여 처리)은 중국 조소의 전통적인 표현형식으로서, 송대宋代 자소의 형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물의 오관五管은 각선으로 전신사조(傳神寫照-나타내려는 형상의 느낌과 형태를 생동하게 표현)하였으며, 옷의 무늬도 각선으로 표현하였다. 동물 및 기타 제재의 조소에서는 표정이 가장 풍부한 부위와 가장 특징을 구비한 부위에도 각선을 이용하여 강조하였다. 도법刀法은 날카로우면서 힘차며, 성기고 빽빽함에 운치가 있으면서 배열이 규정하여, 농후한 장식미가 구비되어 있었다.
원대元代는 경덕진의 도자예술이 찬란하게 발전한 시대이다. 이 시기에 자소는 생산량과 품종이 증가하였다. 1955년 북경의 서성구西城區에서 출토된 영청관음影靑觀音은 균형있고 단정한 체형에, 풍만하고 온화한 얼굴모습은 '대자대비하며 복을 내려주고 어려움을 구원해주는' 듯한 미감을 드러내고 있어, 보는 이를 경건하게 한다. 옷주름은 형체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도록 깊이 조각하여 면面과 선線이 융화되도록 하였다. 옷주름의 소밀도疎密度와 허실虛實과 장단長短과 굽이치는 형태와 선의 굵기 등도 질서정연하여 박진감이 있으며, 스케치한 인물의 수려한 옷주름과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妙가 있었다. 이 밖에, 가사의 끝 자락은 얇고 정교하게 빚어 만들어 옷자락이 표표히 날리는 느낌을 드러내었다. 철주문)綴珠紋-구슬을 연결한 문양)은 원대의 자기장식에 흔히 나타나는 형식으로서, 관음이 걸치고 있는 철주영락문綴珠瓔珞紋은 매우 정교하여, 투명하고 윤택한 영청유와 서로 조화롭게 통일되어 극히 청신淸新하며 우아하다.
강서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元 지원무인至元戊寅(1338년) 청화유리홍 누우식곡창樓宇式穀倉과 청화 유리홍 탑식사령개관塔式四靈蓋罐 등은, 조형이 특이하며 누각이 화려하면서 우뚝 솟아 있고, 인물과 기이한 동물의 형상은 생동하는 원대 명기冥器 가운데의 진품珍品이다. 높이가 29.5cm에 이르는 누우식곡창은 정교한 날조기법을 이용한 가작이다. 원대에는 부장풍속이 갈수록 간소화되어, 명기 가운데 자소의 수량과 품종은 모두 송대에 비하여 감소하였으며, 대다수의 기물이 송대의 정교함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실용기물에 속하는 날소한 사자형 꼭지, 사자머리모양의 이耳, 코끼리모양의 이耳, 규룡형 손잡이, 봉황머리모양의 주둥이 등이 더욱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아울러 송대의 정치精致, 수려秀麗,영교靈巧한 풍격이 일변하여 호방豪放하고 응중凝重해졌으며 일부 기물은 청화로 장식하여 원대자기의 조형 및 장식풍격과 잘 조화되었다. 날소기법을 이용한 작은 완구도 생산되었다.
명대明代에, 복건福建 덕화요德化窯와 광동廣東 석만요石灣窯에서도 자소의 생산을 시작하여 유명하였으며, '천하의 자기가 모이는' 경덕진에서 자소의 생산은 새로운 발전을 하였다. 신제품인 송자관음(送子觀音-아이를 안고있는 관음)과 기록수성騎鹿壽星(사슴을 타고 있는 수성노인)과 좌사인坐獅人(사자를 타고 있는 사람)과 견마해동牽馬孩童(말을 끄는 어린이)과 세속인물형의 소완구와 자소필가 및 누화문전오채좌돈鏤花紋塡五彩坐墩 등이 부단히 출현하였다. 제품은 보편적으로 틀로 찍는 성형방법을 채용하여 생산량의 부단한 증가를 반영하고 있었다.
명대 송응성宋應星의《천공개물天工開物》에 '어기御器 가운데 자기병풍과 촛대 종류는 먼저 황니黃泥로 틀을 만들는데 두조각 혹은 통으로 만들다. 그 다음에 백니白泥로 찍어서 만들고 유수釉水로 그 틈을 칠하여 소성할 때 저절로 달라 붙어 틈이 없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니를 빚어 틀을 만들었으므로 비교적 거칠고 성글었으며, 간결하게 찍어 만드는 경향을 추구하여, 틀로 찍어 만든 제품은 윤곽선이 모호하고 형체가 둔탁하여, 선명하고 정교한 송원시기의 날소제품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채색유약의 발달로 자소에 가채加彩하는 기법이 흥성하여 청화, 오채, 소삼채, 법화가채 등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이와 동시에 두청豆靑, 제청霽靑, 요변화유窯變花釉 등의 안색유자소도 나타났다. 이 시기의 가채는 여전히 송원시기의 순박하고 호방한 메우기(전塡)와 칠하기(도塗)와 점찍기(점點)와 두드리기(탁拓) 등의 기법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작품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작품의 채색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청대淸代와 같이 정밀하고 화려한 가채기법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법화유송자관음은 취법랑翠琺瑯과 난유법랑蘭釉琺瑯으로 장식하여 관음의 장엄하고 정숙한 분위기를 구현해 내었다.
상해박물관에 소장된 청유청화가채좌사인靑釉靑花加彩坐獅人은 명대 경덕진의 대표작품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해사海獅에 걸터앉아 있는 형상은 일체를 정복한 듯한 느낌을 준다. 1959년 도자연구소에서 편찬한《경덕진도자사고景德鎭陶瓷史稿》에 '명대明代의 입체조소는 불상佛像으로 유명하며, 이러한 작품은 복건 덕화요를 모방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63년 중국재정경제출판사中國財政經濟出版社에서 출판한《중국의 자기中國的瓷器》에는 '자소 불상은 원래 복건 덕화요의 걸출한 작품으로, 명청이래 복건인이 경덕진에 와서 기법을 전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덕진의 자소瓷塑가 명대明代에 덕화요德化窯를 모방하였는가? 이 때 하조종何朝宗이 경덕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는가? 다만, 이에 관하여 아직까지 설득력이 있는 증거는 없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경덕진에 전문적으로 자소생산에 종사하는 공방과 도공이 갈수록 증가하였으며, 생산제품은 다음과 같다 : 원조圓雕, 날조捏雕, 누조鏤雕, 부조浮彫, 가정의 진열품, 작은 완구, 제기, 실용자소, 기물의 부속자소, 건축장식품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제재도 광범위하여 불보살, 신화와 역사고사와 소설 및 경극京劇의 인물, 문무관리, 서양인, 흑인, 당시의 민간생활을 반영한 제재, 금수禽獸, 상생자(象生瓷-꽃과 과일), 석기와 목기와 칠기와 죽기 나전을 모방한 작품. 그 중에 여전히 신불神佛이 주류였다. 이 밖에 길상吉祥을 나타내는 제재도 아주 많았다.
조組를 이루고 쌍으로 만들어지는 제품으로는 복록수福祿壽 삼성三星, 8선, 18나한, 사슴, 코끼리, 사자, 오리, 공작, 앵무 등이 보편적으로 유행하였다. 이 시기의 자소제품은 국내외로 널리 판매되었다.
청대淸代의 공예는 단순히 공예기술상의 정교함을 추구하여, 예술풍격은 날로 번잡해졌고 세밀해졌으며 나약해졌다. 경덕진의 자소풍격에도 시대의 낙인이 찍혀 있으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번잡하고 화려한 가채加彩자소가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강희시기康熙時期의 오채와 반홍묘금礬紅描金 및 소삼채로 장식한 자소가채, 그리고 옹정雍正과 건륭乾隆 이후의 분채위주의 자소가채를 막론하고, 얼굴부위와 수족에 채색하지 않거나 채색이 적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기물전체에 온통 장식이 가득하여, 일반적으로 '비천한 느낌이 드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채회풍격은 동시대의 동종의 채회자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즉 강희오채 가채자소加彩瓷塑는 당시에 유행한 각종 바탕색과 진주지협채珍珠地夾彩 등을 채용하고, 문양형상과 색채도 강희오채풍격과 일치한다.《음류재설자飮流齋說瓷》의 평론에 의하면, '관음상……나머지는 즉 명청제품이며, 극히 정교한 제품이 있는데, 대개 순백의 제품을 귀하게 여기며, 화려한 오채는 사대부의 본색이 아닌 듯하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순백색의 자소가 번잡한 가채자소에 비하여 고아高雅하게 간주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에 모인성형模印成型과 가채에 편리하고 소성시의 변형 등을 피하기 위하여, 자소의 형체는 비교적 단순하고 개괄적이며 중심이 안정되어 있었다. 강희康熙와 옹정雍正의 자소형상은 고졸古拙하고 의복의 문양이 가지런하며, 빳빳하고 향토미鄕土味가 충만하면서, 민남과 강서성 일대 민간목조民間木彫의 풍격이 스며들어 있다. 다만 지나치게 번모분괴(飜模分塊-하나의 기물을 만들기 위해 조각조각 나누어 만든 틀)가 적으며, 생산시의 탈모(脫模-틀을 벗겨냄)와 접합의 간편함을 추구하고, 가채에 의존하여 형상을 표현하며, 형체와 분위기에 대한 각화刻劃을 소홀이 하였다. 그 결과 많은 제품들은 마무리가 모호하고 형체가 뚱뚱하며 동태動態가 상투적이어서, 우미하면서 풍부한 표정의 변화가 결핍되고, 의복의 문양도 비교적 간단하며, 의복의 가장자리 처리가 지나치게 두텁고 딱딱하여 경쾌하게 날리는 느낌이 없었다.
근 백년간 모방풍조가 매우 성하여, 복건사람들이 '천하의 보물'이라고 불리워지는 하조종何朝宗의 자소작품을 모조하여 외부에 판매하였다. 그들은 경덕진의 제자공예와 소성기술을 학습하기 위하여, 많은 복건의 예술가들이 계속하여 경덕진에 왔으며, '복건회관福建會館'등에서 각종 관음과 달마 및 여래 등을 제작하였는데 아주 우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하조종의 예술적인 풍격을 대표로 하는 복건자소일파福建瓷塑一派는 경덕진의 자소풍격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민국시기民國時期에 이미 유명하였던 자소예술가인 증룡승曾龍昇, 채금태蔡金台 등은 복건 하조종파何朝宗派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아울러 스스로 독창성을 드러내어 일가를 이루었다. '복건회관'의 하씨파何氏派 원로元老부터 유장자游長子(유만자游蠻子), 이산동李山東, 증룡성曾龍昇 등에 이르는 자소풍격은 기본적으로 일맥상통하며, 아울러 경덕진자소파를 탄생시켰다.
그 기본적인 특징은
(1) 관음, 달마, 미륵, 석가모니, 팔선 등의 신불을 제재로 한 소조에 가장 뛰어났으며, 관음은 더욱 더 다양하였다.
(2) 형체가 개괄적이고 풍만하며 형체와 분위기가 사실적이고, 자태가 단정하다. 다만 신불자소의 얼굴부분은 송원시기宋元時期처럼 신묘하지 못하고 비교적 세속화 되어 있다.
(3) 자소조형에서 선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여 형체의 외곽선을 단순하고 유창하며 우미하게 처리하였다. 옷자락의 날조와 선의 시각적인 효과를 중시하여 면面과 선線이 혼연일체가 되도록 하여, 옷주름의 구조와 형태가 조금도 서툴거나 모호하지 않았다. 의복의 문양선은 원만하고 유창하며, 가다가 되돌아오고 굽이돌며 변화하면서 곡선과 직선의 넓이 및 굵기와 길이 등이 서로 어우러져, 그 기세가 끊이지 않았다. 의복 문양의 안배는 공간의 배치가 극히 적절하여 형체미와 선의 장식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의복의 가장자리선은 행운유수처럼 자연스러우며, 깊게 조각하는 방법으로 문양의 가장자리를 영롱하고 얇으며 예리하게 조각하여, 경쾌하게 휘날리는 느낌이 든다.
(4) 표현기법이 풍부하여 하나의 작품에 퇴堆, 소塑, 날捏, 각刻, 루鏤 등의 기법을 종합하여 이용하였으며, 교묘하게 정미精微함과 광대廣大함을 결합시켜 작품을 운치 있게 만들었다.
(5) 신채新彩의 발달과 더불어, '니인장泥人張' 채소彩塑와 같은 가채형식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오채와 분채를 채용한 가채에 비하여 훨씬 간편하였다. 옛 복장을 한 인물의 복식은 경극京劇에서 사용하는 복장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러한 가채의 풍격은 현재까지 줄곧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기제조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자소 가운데 특수한 공예제품은 극히 정교해 졌다(날조한 화조분경花鳥盆景, 난화蘭花, 누조鏤雕한 용주龍舟, 퇴조한 화병).《음류재설자飮流齋說瓷》에 '뛰어난 조소에는 진국치陳國治와 왕병영王炳榮 등 여러 사람의 작품이 있다. 정밀하면서 그림 같은 느낌이 풍부하며, 나무와 대나무 및 상아를 모방한 자소제품은 더욱 흡사하였다.' 또 조자雕瓷이면서 유약을 칠하지 않은 것을 '반자反瓷'라고 하는데, 이유원李裕元의 작품이 많다. '민국시기에 날조, 주조鏤雕, 퇴조기법에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에는 풍성豊城사람이 많았으며, 서순원徐順源(별호 반고盤古), 양해생楊海生, 채수생蔡壽生 등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30여년이 지나면서, 경덕진의 자소생산은 면모가 일신되었으며, 자소의 예술적인 수준도 제고되었다. 자기공장의 가채자소의 생산은 일부분의 전통적인 제품이 전통적인 면모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가채 신제품은 간결함을 추구하여,'화룡점정畵龍點睛'의 작용을 발휘하고, 아울러 '이일당십(以一當十-하나로 열을 대적한다)'의 효과를 추구하여, 자소의 형상미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를 돋보이게 하였다. 진작방陳作芳과 당자강唐自强의 작품은 극히 뛰어나다. 이 밖에 가채의 신품종으로 유하오채釉下五彩와 금채金彩 및 여러 종류의 채색이 서로 결합된 가채 등도 출현하였다.
특히 과거에는 많이 보이지 않았던 안색유자소의 발전이 신속하여, 진귀한 안색유가 모두 자소제작자에게 교묘하게 응용되었다. 이들은 다년간의 탐색을 통하여, 작품의 제재와 내용에 상응하는 안색유와 예술적인 처리기법을 선택하여, 각종 안색유의 특색을 충분하게 발휘하여 자소형상의 제작에 전력하였다. 요영강姚永康, 주국정周國禎 등이 뛰어났다. 이처럼 형식적인 느낌이 강하고 형상미와 재질의 미가 서로 어우러져 일체로 융화된 안색유자소는 1950년대 말에 출현하여 현재에도 유행하고 있다. 자소공예는 재질이 윤택학고 조형이 우미하며 공예가 정교하여, 품종과 수량 및 예술적인 수준에서 모두 전인前人을 초월하여 국내외에서도 손 꼽히고 있다. <黃雲鵬> |